바닥에 화폭 깔고 페인트 떨어뜨려 작품 만들며 현대미술의 한 획 장식

잭슨 폴록 (Jackson Pollok, 1912-1956)은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대표 화가로 바닥에 화폭을 깔고 페인트를 떨어뜨려 작품을 만드는 획기적인 방식으로 현대미술의 한 획을 긋고 미술의 정의를 새로 쓰게 한 위대한 화가이다. 폴록이라는 화가에 의해 태어난 ‘액션 페인팅’이란 용어는 말 그대로 화가의 신체적 동작 즉, 하나하나의 액션에 의해 창조되는 예술로 동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화면이 화가의 내면세계를 보여주는 화풍을 일컫는 말이다.

 

01_여태껏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길 보여준 폴록의 작품세계

No.5 (1948년)

이것은 어떠한 형체도 통하지 않고 오로지 우연에 의해 결정되는 순간적인 물감의 드로핑이 영원히 화면 위에 박제되는 순수한 사념의 결정체라 할 수 있겠다. 화가와 화면 위에 떨어지는 물감의 흔적은 혼연일체가 되어 화가 개인의 인생과 사상, 감정을 표현하게 된다.

수직으로 서있던 캔바스를 끌어내려 수평의 화면에 작업을 한다는 발상과 붓을 그림을 그리는 도구가 아닌 물감을 떨어뜨리는 막대기로 사용해 붓의 본질적인 의미를 확장시켰다는 점, 그 동안 그려졌던 추상화가 단순화 되었든 왜곡되었든 간에 어떤 형태로든 형상을 표현한 데 비해 형상이 존재하지 않는 예술을 창시했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세계는 여태껏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02_아메리카 인디언 문화와 멕시코 벽화 운동에 관심

No.17A (1948년)

1912년 미국 와이오밍주에서 5형제중 막내로 태어난 폴록은 아버지가 측량사인 관계로 아버지를 따라 자주 이사를 다녀야만 했다. 애리조나와 캘리포니아 등 타지를 떠돌며 학교도 여기저기 옮겨 다녀야 했던 폴록은 마음 붙일 곳이 없어 몇 번씩 퇴학 당하고 방황하는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1928년 로스엔젤레스의 매뉴얼미술고등학교에서 미술공부를 했지만 졸업은 못하고 1930년 뉴욕 아트스튜던트리그에서 화가 토마스 하트 벤턴에게 그림을 배웠다. 이 시기에 그는 형이상학적이고 초자연적인 정신을 추구하는 신지학의 개념을 접하고 깊이 심취하게 되었다.

1935년 작 ‘서부로 가는 길’은 폴록이 20대 초반에 그린 그림으로 어둡고 소용돌이 치는 화면 속에 젊은 날 잭슨의 혼돈과 방황, 불안한 정신상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미국 서부 와이오밍의 광활한 자연 속에서 힘들게 마차를 끌고 가는 말들과 뒤에 떨어져 덩그러니 놓여있는 마차가 힘겨운 그의 일상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중심의 달을 에워싸고 하늘을 가득 채운 검푸른 구름은 그를 향해 휘몰아치는 암울한 그의 환경을 나타내는 듯하다. 굵고 거침없는 붓터치로 과감하게 표현된 화면은 그의 열정과 필력을 보여준다.

또한 폴록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문화와 멕시코 벽화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멕시코 벽화 화가인 시케이로스에게서 다양한 벽화 기법을 배웠다. 폴록은 미술이 캔바스에 붓질을 하는 것만이 아닌, 페인트를 붓고 떨어뜨리거나 하는 다양한 기법이 존재한다는 것, 에나멜 페인트나 라커, 모래 등을 그림 표면에 입혀 또 다른 느낌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그에게 회화에 대한 열린 시각을 갖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폴록은 1937년부터 1943년까지 연방정부가 주도하는 공공작품 제작 프로젝트에 참여했는데 모두가 어려운 대공황시기에 예술가들에게 일자리를 주기 위해 만든 프로젝트였다.

 

03_폴록에게 무한한 지지와 사랑 보낸 리 크레이스너

다섯길 깊이 (1947년)

이 시기는 폴록이 자신의 폭력적이고 충동적인 성향과 술에 취해 저지른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던 시기였다. 넉넉지 못한 집안 환경과 어린 시절부터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타지를 떠돌아야 했던 폴록은 자격지심과 반항심으로 똘똘 뭉친 폭력적인 사람으로 성장했다.

경찰서와 병원을 밥 먹듯이 드나들던 그에게 한줄기 빛으로 다가온 이는 리 크레이스너라는 여인이었다. 일찌감치 폴록의 숨겨진 천재성을 알아보고 그의 빛나는 재능을 사랑했던 그녀 역시 화가였는데 자신의 작업을 뒤로 한 채 폴록의 곁에 머물며 폴록의 알코올 중독을 치료하고 작업을 할 수 있게끔 다잡아 주었다.

그녀는 폴록에게 무한한 지지와 사랑을 보내며 그의 예술세계를 응원하였다. 아마도 그녀가 아니었으면 오늘날의 잭슨 폴록이라는 위대한 화가는 태어나지 못했으리라.

그녀는 미술에 대한 자신의 욕구를 안으로 누른 채 오로지 폴록의 예술성을 꽃피우기 위해 자신의 젊음을 바쳤다. 폴록이 죽은 후에 다시 붓을 잡은 그녀는 세계 500대 화가에 들 정도로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녀에게는 폴록이 그녀의 세상이고 예술이었던 것 같다.

 

04_초현실주의와 입체주의에 기반 둔 자신만의 스타일 시작

달의 여인 (1942년)

끝없이 망가져가던 폴록은 1937년 정신병원에 넉 달간 입원하고 1938년부터는 알코올 중독을 끊으려 심리상담을 받기도 하였다. 자신의 무의식을 표현하는 그림을 그려보라는 의사의 권유로 폴록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초현실주의와 입체주의에 기반을 둔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점차 추상적으로 변한 그의 화풍은 피카소와 후안 미로에서 따온 모티브와 시케이로스에게서 배운 기법들을 이용했는데 이러한 특징은 1942년에 그려진 작품 ‘원을 자르는 달의 여인’과 ‘달의 여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들에는 그의 작품 전반에 드러나는 중요한 세가지 요소 즉,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 융의 집단 무의식 이론, 미국 원주민 문화의 영향이 골고루 들어있다.

‘원을 자르는 여인’은 푸른 바탕에 붉게 너울거리는 자유로운 형태들이 마치 인디언 여인이 춤을 추며 원을 가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네모난 무늬들 역시 인디언 모포에 새겨진 무늬를 연상케 해 이 작품이 원주민의 신화적 모티브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한다.

‘달의 여인’에서 보여지는 상징적 기호들은 융의 집단무의식 이론에 입각해 그린 것 같다. 융은 현대인의 기억 속에는 원시시대부터 이어진 인류의 모든 기억을 포괄하는 상징적 이미지들이 저장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집단무의식 안에 잠겨있는 원형적 이미지의 힘이 문명과 물질의 과잉에 지친 현대인의 정신을 치유할 것이라고 믿었다.

 

05_페기 구겐하임, 폴록에게서 가능성 발견, 전폭 지원

벽화 (1943년)

폴록의 작품이 빛을 보게 된 것은 당시 뉴욕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화상 페기 구겐하임의 공이 컸다. 서양의 현대미술사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전설적인 콜렉터이자 후원자였다. 미국의 부유한 가문의 상속녀였던 페기는 젊은 나이에 유럽으로 떠나 화가들과 교류하고, 재능이 반짝이는 신진 화가들의 작품을 사 모으며 그들이 훌륭한 작품을 그릴 수 있도록 생활을 도와주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마르셸 뒤샹, 샤갈, 칸딘스키 등 많은 예술가들이 자유로운 상상력의 예술가를 말살하려는 나치의 마수에서 도망쳐 미국으로 향했다. 페기는 전쟁 중 핍박 받는 예술가들이 미국으로 피난하는 것을 도와주고 그들이 안전하게 정착할 수 있도록 뒤를 봐주었다. 그녀는 뉴욕에 ‘금세기미술관’을 오픈하고 유럽에서 건너온 화가들의 작품을 소개했다.

그런 그녀가 잭슨 폴록을 발굴해 그에게 전시의 기회를 준 것은 폴록에게는 커다란 행운이었다. 애초에 페기는 피카소가 추구하는 입체주의의 영향을 받은 폴록의 그림에 큰 관심이 없었으나 유럽에서 그녀에게 미술에 대한 모든 것을 알려준 마르셸 뒤샹이 폴록에게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하자 마음을 바꿔 폴록을 지원하기로 하였다. 한적한 교외에 집을 마련해주고 생활비를 지원해 작업을 계속할 수 있게 하였다.

 

06_1943년-1946년 입체주의에서 벗어나 추상주의로 향하는 여정

블루 (모비딕) 1943년

페기 구겐하임은 1943년 금세기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어 폴록을 뉴욕 미술계에 데뷔시켰지만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대중의 반응은 미미했고 작품도 팔리지 않았다.

그러나 1943년부터 1946년까지 그의 작품은 점차 발전해나가 입체주의에서 벗어나 추상주의로 향하는 여정을 걷고 있었다. 1947년 액션 페인팅으로 그의 추상표현주의가 탄생한 것은 이 시기의 밑거름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리라.

1943년 그려진 ‘블루 (모비딕)’는 푸른 바탕에 추상적인 형태들이 부유하고 있는 그림이다. 배경의 푸른 색은 바다를 상징하고 노란색과 흰색, 붉은 색, 진한 갈색으로 이루어진 형태들은 그 속에서 뛰노는 생명체들같이 보인다.

왼쪽 하단에 뾰죽뾰죽 튀어나온 부분은 파도를 묘사한 것 같고, 바다에서 자유롭게 뛰노는 생명들의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같은 해 그려진 ‘벽화’는 페기 구겐하임의 요청으로 그녀의 집에 그려진 대작이다.

이 작품에는 그가 그 동안 살아온 모든 이야기를 집약한 듯 복잡한 속에서도 작품을 가로지르는 일관성이 엿보인다. 반복된 형태의 배열은 구성의 리듬감을 느끼게 하고 작품 전체에서 격렬하고 본능적인 힘이 느껴지는 추상표현주의의 시초가 된 작품이다.

 

07_어떤 충동에 의해 캔바스를 바닥에 누이고 물감을 들이부었다

서부로 가는 길 (1935년)

1947년 폴록은 이젤에 캔바스를 세우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어떤 충동에 의해 캔바스를 바닥에 누이고 물감을 들이부었다. ‘드리핑 아트’의 탄생이었다. 그는 거대한 캔바스 천을 바닥에 펼쳐놓고 그 위를 앞뒤 좌우로 누비며 물감을 뿌렸다. 캔바스에 나타난 것은 형체를 알 수 없는 물감의 흔적이었다. 그는 모든 기초적인 형태마저도 거부하고 각기 다른 색채들이 화면에 뿌려진 흔적만으로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1947년 그려진 ‘다섯 길 깊이’는 검정색과 흰색, 푸른색의 색채들이 자유롭게 난무하는 그림이다. 이 부정형의 뒤엉킨 색선과 점들 사이에서 우리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고독을 느낄 수 있다. 우연히 생겨난 효과와 무정형의 자유로운 형태, 계산되지 않은 즉흥적인 움직임은 의식의 밑바닥에 잠들어 있던 무의식을 끌어올려 화가의 내면을 화면 속에 펼쳐놓는다.

1948년 작품 <No.5>는 캔바스 가득 뿌려진 블랙, 버건디, 그레이등 많은 색깔들 사이로 노란색 선이 마치 우주를 유영하는 영혼들의 춤과도 같은 느낌을 준다. 이 작품은 드리핑 아트의 정수라 불리며 2006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억 4000만불에 팔려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으로 명성을 누렸다. 또한 같은 해에 그려진 ‘No.17A’ 역시 2016년 2억불에 매매되어 풀록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을 남긴 화가가 되었다.

 

08_미국, 예술삼류 오명 씻기 위해 국가적으로 폴록 지원

심연 (1953년)

폴록의 이 특이한 작업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었고 물질주의와 풍요를 상징하던 미국은 예술에 있어서는 삼류라는 오명을 씻기 위해 전 국가적으로 폴록을 지원했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가장 미국적인 화가가 예술의 큰 장을 열고 새로운 이념을 탄생시켰음을 세계 방방곡곡, 특히 콧대 높은 유럽에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이 낯설고 난해한 작품 앞에서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개념이 필요했다. 이러한 사람들의 욕구에 부응한 것은 시대를 풍미하던 두 비평가이다.

뉴욕의 저명한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항상 ‘회화는 회화만의 순수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해왔는데 폴록은 그의 회화의 순수성에 대한 갈망을 채워준 예술가였다. 피카소가 원근법이라는 미술의 개념을 파괴하고 입체주의를 창시했지만 그의 그림에도 3차원적 공간감은 존재한다.

그러나 폴록의 작품에는 오로지 물감의 배열로만 이루어진 순수한 2차원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린버그는 폴록과 그의 추상표현주의가 미국 미술의 미래라고 선언했다.

또한 평론가 로젠버그 역시 폴록의 작품에 큰 의미를 부여했는데 그는 작품을 하는 행위에 화가의 내면과 에너지가 녹아 있기에 작품 자체보다도 화가의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보고 작품은 이 과정에서 생겨난 흔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로젠버그는 ‘액션 페인팅’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해 폴록의 행위 자체가 예술이라는 점을 역설하였고 이것은 오늘날 ‘행위 예술’이라는 개념으로 이어지고 있다.

 

09_그림 속에 있을 때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해

원을 가르는 달의 여인 (1942년)

폴록이 자신의 작업일지에 남긴 말들은 그의 예술과 자신이 혼연일치된 순간을 잘 표현하고 있다. “나는 그림 속에 있을 때 나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 내가 어떤 행위를 저질렀는가를 알게 되는 것은, 그림과 친숙해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경과한 뒤에야 가능해진다. 그림은 스스로의 생명력을 지니기 때문에 나는 그림을 고치거나 이미지를 부수는 일에 대해 조금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저 나는 그런 식으로 그림이 완성되기를 허용해줄 뿐이다. 나 자신과 그림의 접촉이 끊어지는 경우는 결과가 엉망진창으로 나타난 때뿐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림과 나 사이에 서로 주고 받는 완벽한 조화 관계가 성립되며 이때 그 그림은 괜찮은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오랫동안 아무 움직임 없이 조용히 화폭을 응시하다 자신의 내면과 화면이 하나가 되었다고 느껴지는 순간 미친 듯이 화폭에 물감을 뿌려대는 폴록의 모습이 연상되지 않는가?

우리는 그의 작품을 감상하며 구체적인 이미지를 떠올릴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안에 우주가 우리를 감싸고 있다는 느낌과 함께 무한대로 달려가는 의식의 확장을 느낄 수 있고 사랑, 평화, 분노, 절망 등 다채로운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어느 작품 앞에서 우리가 이렇게 사고의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을까? 작품 안에서 우리가 마음껏 유영할 수 있는 세계를 창조해준데 대해 감사할 뿐이다.

 

10_44세에 요절한 가엾고도 위대한 천재

잭슨 폴록의 작업모습

한 순간에 살아있는 신화가 되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가 되었지만 자신의 벽에 갇힌 그는 다시 술에 빠지고 우울증과 강박증은 더욱 심해졌다. 인정받길 원했으나 그에 따른 관심과 시선을 못 견뎌 하는 내성적인 남자. 평생 술과 여자를 달고 살았지만 헌신적인 아내 리 크레이스너에게만 매달리는 어린애 같은 남자. 순식간에 다가온 부와 명성에 어찌할 줄 몰라 헐떡거리다 죽음으로 달려간 남자.

이 가엾고도 위대한 천재를 보면 젊은 나이에 최고의 배우가 되었지만 오토바이 사고로 요절한 제임스 딘이나 밑바닥에서 악착같이 올라가 성공을 거머쥐었지만 최고의 정점에서 삶을 마감한 ‘위대한 갯츠비’의 비극적인 종말이 떠오른다.

44세의 젊은 나이로 술에 취해 차동차를 몰다 나무에 처박힌 채 세상을 뜬 폴록. 그의 인생은 불안과 고독과 상처로 점철되었지만 그의 작품은 현재까지도 20세기 최고의 예술이라 불린다. 오늘은 그의 무덤가에 한잔의 술을 부어주며 폴 발레리의 시 한편을 읽어주고 싶다.

 

잃어버린 술

 

언젠가 나는 바다에 던졌다.

어느 하늘 아래서인지 모르지만

무 (nihill) 속에 바치듯이

아주 고귀한 술 조금을

 

오 술이여, 누가 너의 추락을 원했던가?

아마도 운명에, 아마도 내 가슴의

근심에 내가 복종하여

피를 생각하며 술을 쏟은 것이랴.

 

그을린 장미에 뒤이어

순수한 바다는

습관적인 투명함을 되찾는다.

 

술은 잃어버렸고 물결은 취했다!

나는 쓰디쓴 공기 속에서, 보았다,

가장 깊은 모습이 뛰어 오르는 것을.

 

 

* 다음에는 기묘하고도 신비로운 초현실 세계를 창조한 막스 에른스트와 함께 하겠습니다.

 

 

글 / 미셸 유 (글벗세움문학회 회원·서양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