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부는 날에는 술잔을 챙긴다

바람이 불어 창밖에 서있는 키 큰 나무들의 우듬지가 흔들릴 때면 으레 술 생각이 난다. 그러면서 ‘개가 주인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침을 흘린다’는 조건반사를 발견한 러시아의 생물학자 파블로프를 떠올린다.

그는 “동물이 그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후천적으로 획득하는 반사 즉, 어떤 자극에 의해 무조건으로 일어나는 반사 (무조건 반사)가 그 반사와 관계되지 않은 제2의 자극을 동시에 반복하여줌으로써 결국 제2의 자극만으로도 일어나게 되었을 경우를 조건반사 라 한다”고 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부딪친다. 어떤 사람은 만나면 반갑고, 함께 여행하고 낚시하고 얘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다. 반면에 가능하면 마주치고 싶지 않아 외면하고 싶은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을 보면 맑게 흐르는 강물이 떠오른다. 어떤 사람을 보면 오물이 둥둥 떠다니는 썩은 개천이 생각난다. 어떤 사람을 보면 기회주의, 거짓, 위선, 교만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어떤 사람을 보면 겸손, 순수, 배려라는 단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상대방으로 인해 경험된 자신의 상태다. 이는 자신이 임의로 설정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행동이 만들어놓은 결과다.

말벌을 보면 살갗에 소름이 돋는 것은 말벌에 쏘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비가 내리면 따뜻한 녹차가 생각나는 것은 비 내리는 날 녹차를 마시며 편안함을 느껴봤기 때문인 거다. 세상 만물은 자신이 스스로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이 행한 행동의 결과로 타인에게 고정적인 관념을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조건반사인거다.

고등학교 3학년때던가. 나는 바람이 거세게 불거나, 하늘이 우중충하거나, 빗방울이 흩날리거나, 흰 눈송이가 하늘로 올라가는 날이면 신문배달을 끝내고 왕십리에서 안암동까지 샛길을 돌아 안암천변에 있는 포장마차로 가곤 했다. 시커먼 구정물이 흐르고 온갖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는 안암천변에는 꾀죄죄한 천막으로 둘러친 포장마차가 있었다.

국물 때가 묻어있는 우중충한 목도리로 목을 감싸고 턱밑에 흰 수염이 듬성듬성한 노년의 포장마차주인은 인텔리 출신이라는 냄새를 풍겼다. 배가 고플 때마다 들러 배달하고 남은 신문 한 부를 주면 나를 긍휼이 여긴 포장마차주인은 뜨끈한 국물에 통통하게 살찐 우동 한 그릇을 말아주곤 했다.

가끔은 석쇠에 잘 구운 참새구이 한 점을 소금에 찍어 먹어보라고 내놓기도 했다. 손님이 없을 때는 언뜻언뜻 자신이 살아온 얘기를 한 조각씩 흘리곤 했다. 그는 나에게 책을 많이 읽으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인생을 알게 된 것은 사람들과의 사귐에서보다는 책을 통해서가 더 많았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바람이 몹시 불던 날, 한기로 진저리를 치며 포장마차로 들어선 나에게 그는 막걸리 한 사발을 권했다. 마시고 나자 잠시 후 온몸이 훈훈해졌다. 마음도 그렇게 따뜻해지고 편안해질 수가 없었다.

그것은 묘약이었다. 그날 이후 자연스레 막걸리 마시는 횟수가 잦아졌다. 막걸리를 마실 때마다 힘든 세상이 저만치서 흔들거리며 흘러갔다. 나는 점점 그가 좋아졌다. 바람 부는 날이면 으레 막걸리 생각에 입에 침이 고이고 발걸음은 터덜터덜 안암천변의 포장마차로 향하는 것이 습관이 돼 갔다.

바람이 으스스하게 불던 그날도 당연하듯이 포장마차를 찾아갔다. 헌데 어둠이 내려 별이 총총할 때까지 기다렸는데도 포장마차는 밧줄에 묶여있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포장마차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온통 마음이 공허했다. 나는 다른 포장마차를 찾아갔다. 그리고 막걸리를 한 사발 시켜 마시면서 내가 좋아한 것은 포장마차주인이 아니라 술이었음을 알았다. 바람은 나에게 술이라는 조건반사를 심어준 것이었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나는 바람소리 들리는 날이면 술잔을 챙긴다. 술 한잔 따라 앞에 놓고 술잔에 어리는 세월을 응시하면서 바람 부는 날의 나의 조건반사는 술인데, 나를 보는 사람들의 조건반사는 어떤 것일까 생각한다.

부드러움일까, 딱딱함일까, 곧음일까, 구부러짐일까, 정직일까, 거짓일까, 순수일까, 교만일까, 겸손일까…. 그러면서 덧붙여 되돌릴 수 없는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도 생각한다. 술잔을 기울이면서 나는 중얼거린다, 인생이란 참 무서운 조건반사로구나!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 최원규 님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는 8월부터는 2주에 한번, 격주로 연재됩니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