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기생충은 다른 생물에 기생하며 그로부터 양분을 섭취하고 사는 동물의 총칭이며, 남에게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의 별칭이다.

최근에 봉준호 감독이 만든 영화 ‘기생충’이 한국뿐만 아니라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전세계적인 화제의 중심이 됐다. 온통 기생충과 봉준호의 이야기로 들썩인다. 한국사회의 문화 예술계는 말할 것도 없고 정치 사회 경제계도 기생충과 봉준호와 관련된 이야기들뿐이다. ‘기생충 신드롬’에 더해 ‘봉준호 신드롬’까지 일고 있다.

기생충은 앞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지난 2월 9일 미국 LA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시상식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극영화상 4개부문을 휩쓸었다.

‘비(非)영어권 영화 최초로 칸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작품상을 동시 수상한 역대 세 번째 작품이다. 역대 아시아출신 감독 중 두 번째 감독상 수상, 아시아 영화 최초이자 비 영어권 영화 중 여섯 번째 각본상 수상, 작품상과 국제 장편영화 최초 동시 수상’ 등 봉준호 감독과 기생충은 세계영화사에 남을 대기록을 썼다.

영화 기생충은 위선과 거짓, 계획과 무계획 같은 수많은 양면성을 보여주면서 한국사회의 빈부격차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우리시대의 속살을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다. ‘스토리가 가진 우스꽝스러운 면도 있지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가증 (可憎)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씁쓸한 현실이다.

빈부격차를 상징하는 반지하와 높은 언덕과 계단을 통해야 하는 저택은 말 그대로 절벽처럼 갈라진 계급의식이 좁혀질 수 없는 실체임을 절감하게 한다. 상류층과 하류층의 수직적 관계를 암시하는 곳곳에 등장하는 계단은 쳐다보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고 아린다.

기생충의 영어단어 Parasite는 ‘~옆에’라는 뜻을 가진 Para와 ‘곡식, 음식’ 등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남성형 명사 Sitos가 합쳐진 단어로 ‘남의 식탁에 꼽사리 끼어서 차린 음식을 먹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영화에 식탁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영화는 부러움과 역겨움과 자학과 분노가 아닌 슬픔을 자아내게 한다. 그래서 ‘기생충’은 아프다.

지난달, 한국의 2심재판부는 대통령을 지냈던 ‘그’에게 징역 17년, 벌금 130억원, 추징금 58여억원을 선고했다. 횡령 252억원 뇌물 89억원 외 10만불 수수혐의가 인정됐다. 기생충에서 곱등이나 바퀴벌레처럼 살아가는 ‘기택’이네 가족에겐 헛된 꿈속에서나 헤아려볼 수 있는 액수다.

그는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 받았지만 뇌물수수액수가 늘어나 징역도 2년이 늘어났다. 실형이 선고돼 법정구속의 수모를 당했다.

그는 재판부로부터 치욕스런 훈계를 들었다. 재판부는 “국가원수이자 행정수반인 대통령으로서 의무와 책임을 저버리고 뇌물을 받고 부정한 처사를 하기도 했다”고 질타했다. 또 “수수 방법이 은밀하고 사적 이익을 취하기 위한 목적이 드러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는 유죄로 인정된 부분을 모두 부인하며 대법원에 상고했다. 그는 리플리증후군 (Ripley Syndrome) 중증환자임이 확실하다.

그는 1941년생으로 79세다. 대법원의 최종판결이 남아있긴 하지만 17년 징역을 다 채우면 100세에 가깝다. 물론 ‘정무적 판단’에 따라 ‘국민화합’ 어쩌고 하면서 그 징역을 다 살지는 않겠지만, 참으로 허무하고 참담한 인생이다.

그는 어린 시절 가난했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온갖 고생을 했다. 풀 빵 장사도 했다. 그렇게 성장한 그는 가난한 노동자들에 맞서서 사주의 금고를 지키느라 칼을 맞았고, 사주의 절대적인 신임 속에 가진 자의 대열에 합류했다.

정직, 신뢰, 결백을 부르짖던 그의 인간성은 점차 ‘탐욕’으로 변해갔다. 출세를 위해 불법을 저질렀고,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신뢰를 저버렸고,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높은 계단을 오르기 위한 그의 가식과 허구의 끝은 처연했다.

기생충에서 아들 ‘기우’에겐 요행과 거짓의 ‘계획’이 있지만 ‘그’에겐 계획이 아닌 ‘집착’만 있었다. ‘그’는 못 가진 자를 멸시하며 가진 자의 식탁에 붙어 앉아 ‘짜파구리’를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배부른 기생충이다. 하여, 나는 봉준호 감독에게 묻고 싶다. “기생충은 못 가진 자의 은유인가?”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