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와 야성의 화가 고갱

강렬한 원색과 뚜렷한 윤곽선으로 생명력 가득한 ‘원시주의 회화’ 이룩

고갱 (Paul Gauguin 1848~1903)은 프랑스 후기인상주의 화가로 인상주의에서 벗어나 생의 마지막 10여년을 타히티와 폴리네시아에서 보내며 원시주의 (Primitivism)라는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이룩해 많은 걸작들을 탄생시킨 위대한 화가이다. 원시주의란 문명에 찌든 서구사회의 모순을 깨닫고 인간이 문명을 이루기 전으로 돌아가 원시시대의 순수함을 예술로 표현하려는 운동인데, 고갱은 강렬한 원색과 뚜렷한 윤곽선으로 생명력 가득한 원시주의 회화라는 독자적인 장르를 이룩했다.

 

01_살아 숨쉬는 날것의 욕구, 몸 안에서 꿈틀거리는 야생의 본능…

“나는 미개인이다. 문명은 첫눈에 그 사실을 알아챈다. 나의 작품에는 당혹스럽거나 경악스러운 부분이 전혀 없다. 다만 나로서도 어쩌지 못하는 야성적 기질이 있을 뿐이다. 때문에 나의 작품은 모방이 불가능하다”라고 고갱은 말한다.

그는 살아 숨쉬는 날것의 욕구, 몸 안에서 꿈틀거리는 야생의 본능, 순수와 야만 사이를 오가며 이 모든 것을 화면에 담는다.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삶의 에너지가 넘치는 야성적이고 정열적인 화풍으로 서양미술사의 한 획을 긋고 있는 독보적인 화가, 고갱. 그는 오늘도 현대문명의 폐해 속에 찌들어가는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와 새로운 활기와 생명력을 부어준다.

 

02_젊은 날 한곳에 정착 못하고 끊임없이 돌아다녀

고갱은 1848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기자였고 어머니는 스페인과 페루 혼혈인이었다. 갓난아이 때부터 5년간 페루로 이주해 어린 시절을 이국적인 환경과 관습에 젖어 살았기에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남국의 정취는 아마도 이때 형성된 것 같다.

7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남은 가족인 어머니와 누이와 함께 프랑스 오를레앙으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남미의 뜨거운 태양아래 형성된 정열과 자유분방함은 고상하고 관습적인 유럽의 문화와는 맞지 않았다.

고갱은 젊은 날 한곳에 정착을 못하고 끊임없이 돌아다녔는데, 17세에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해 남미, 지중해, 북극 해 등 여러 곳을 여행하였다. 24세가 되어서야 마침내 방황을 끝낸 고갱은 파리증권거래소에서 주식중개인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메트 소피가드와 결혼해 5명의 자녀를 두며 부유하고 안정된 가정도 이루게 된다. 아마도 그의 인생에서 가장 평온하고 평범한 행복을 느꼈던 때가 아닌가 싶다.

 

03_카미유 피사로 만나며 미술에 대한 열망 커져 전업화가로

고갱은 주식중개인을 하면서 그림도 수집하였는데 점차 미술의 오묘한 세계에 빠져들어 취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미술은 고갱의 열정을 사로잡았고 카미유 피사로를 만나며 그의 미술에 대한 열망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마침내 전업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인상파 화가들에게서 뎃생과 유화기법을 습득하고 본격적인 미술가의 삶을 시작해 1879년부터 인상파 전시회에 작품을 전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증권맨에서 화가로 전향한 그에게 프랑스 화단은 혹독했다. 정규미술교육도 받지 못하고, 화단에 인맥도 없던 그의 그림은 신랄한 비판과 무시를 당했고 아무도 그의 그림을 사려고 하지 않았다.

그림이 팔리지 않아 수입이 없었던 고갱은 가족들과 아내의 고향인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갔지만, 화가를 꿈꾸던 고갱은 그곳에서 만족할 수 없었고 가족들 역시 안정된 직장을 뒤로 한 채 가족을 고생시키는 가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가족들과 헤어져 어린 아들 하나만 데리고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단란한 가정, 안정된 삶과 바꾼 고독한 화가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04_고갱과 고흐의 관계는 애증의 관계?!

그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리면서 인상주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화풍을 모색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1886년 부인과 정식으로 이혼한 고갱은 파리를 떠나 브르타뉴 지역의 퐁타방이란 작은 시골마을에 자리 잡고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이곳에 머무르는 몇 년간 단 한번 고흐를 만나러 아를에 갔는데 1888년 고갱과 고흐의 만남은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유명한 에피소드로 남아있다.

고흐의 동생 테오의 소개로 만나게 된 두 사람은 함께 작업을 하기로 하였으나, 고갱은 몇 번씩 날짜를 연기하며 고흐를 애타게 하였다. 아를에서 고갱이 오기를 기다리던 고흐는 서로의 자화상을 그려 교환하기를 제안했는데, 고흐에게 약간의 위축감을 느끼고 있던 고갱은 망설임 끝에 ‘레미제라블’ (1888년)이라는 제목의 자화상을 그려 보내게 된다.

스스로의 모습을 그가 좋아했던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에게 투영해 그린 이 작품은 암울한 자신의 처지와 장발장의 고난을 동일시해 그린 것 같다. 이 그림을 받아본 고흐는 매우 기뻐하며 자신의 자화상을 보내 답하고 그를 독려했다.

고갱 역시 이에 고무되어 ‘해바라기를 그리는 고흐’ (1888년)라는 작품으로 그가 인상 깊게 보았던 고흐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고갱과 고흐의 관계는 애증의 관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과는 다른 서로의 재능에 대한 동경과 사랑, 서로가 서로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질투가 점철된 관계인 것 같다.

고흐의 노란 집에서 9주간 함께 작업한 두 사람의 우정은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잘라내는 사건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다음날 고흐는 아를의 정신병원으로 가게 되었고 고갱은 아를을 떠나 두 사람은 다시는 서로를 보지 않았다.

 

05_”예술은 하나의 추상이다. 나는 보기 위해 눈을 감는다

퐁타방 시절 고갱은 종교와 브르타뉴 지방의 문화를 매치해 상징주의적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1888년 그려진 ‘설교 후의 환영’과 1889년 그려진 ‘황색의 그리스도’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브르타뉴 지방의 사람들은 소박하고 신앙심이 깊은 전형적인 시골사람들이었다. 이들이 특정 성인의 날에 전통의상을 입고 순례제에 참석한 모습을 그린 ‘설교 후의 환영’을 보면, 화면 가운데 굵은 나무를 중심으로 하단에는 전통의상을 입고 기도하며 씨름을 구경하는 여인들의 모습이 있고 오른쪽 윗부분에는 붉은 벌판에서 황금빛 날개를 단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이 있다.

순례제에서 씨름하는 토속문화를 성서 속 인물들로 대치해 환상과 현실을 한 화면에 둔 것이다. 현실과 성서 속의 신화를 교묘하게 섞어놓은 이 작품에서 우리는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가상인지 헷갈리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새로이 맞이하는 이 초현실적인 경험은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현실뿐만 아니라 그 너머에 존재하는 예술가의 심상 속에 자리잡은 또 다른 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이미 인상파에서 탈피해 굵고 유연한 선으로 처리된 인물들은 사실성을 잃고,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이미지로 다가온다.

“예술은 하나의 추상이다. 나는 보기 위해 눈을 감는다”라고 말한 고갱은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인물들의 사실성을 배제함으로써 여태껏 그림이 가지고 있던 사실묘사라는 한계에서 한걸음 더 뛰어넘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였다.

 

06_종교적인 그림 많이 그려… 자신의 심상 표현하려는 상징적 의도

이듬해 그려진 ‘황색의 그리스도’ 역시 이제껏 그려진 어떤 그리스도 성화와도 다른 작품이다. 대담한 색의 분할과 단순화 시킨 형태의 묘사로 좀더 완숙한 종합주의의 기법을 선보인 이 작품은 피카소를 비롯해 많은 후배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종교적인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그것은 성화의 개념보다는 자신의 심상을 표현하려는 상징적인 의도로 그려졌다고 보여진다. ‘황색의 그리스도’는 퐁타방 근처의 트레마로 성당에 있던 십자가를 퐁타방의 전원 풍경 속 소박한 여인들과 매치해서 그린 그림이다.

붉은 십자가에 매달린 노란색의 예수는 다 이루었다는 듯 눈을 감고 평안한 표정이고, 십자가 밑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세 명의 여인들에게서 경건한 신앙심이 느껴진다. 같은 해에 그려진 ‘녹색의 그리스도’에서 보여지는 비탄과 슬픔은 이 찬란하게 빛나는 노란색 화면에 나타나지 않는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같은 사건을 그렸는데, 보는 시각에 따라 이렇게 상반된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게 놀랍다. 노란색 초원과 붉은 나무들은 저 멀리 보이는 푸른 생 마르그리트 언덕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색의 향연을 펼친다.

노란색, 붉은색, 푸른색등 원색의 대비가 이루어낸 조화는 오늘날의 추상화를 보는 듯하다. 인상파가 추구하던 빛과 색의 흐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반추상의 영역으로 확장시켜나간 그의 작품세계는 주제와 개념에서 보여 지는 상징주의와 더불어 기법면에서 종합주의의 완성을 보여주고 있다.

 

07_서구 문명사회에 환멸, 야생의 삶 속에 깃들인 생명력 갈구

메말라가는 서구 문명사회에 환멸을 느낀 고갱은 야생의 삶 속에 깃들인 생명력을 갈구했고, 1891년 자신만의 유토피아, 원시가 살아 숨쉬는 타히티로 떠난다.

그러나 무려 두 달에 걸친 항해 끝에 도착한 타히티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로 들떠있던 고갱을 실망시키고 만다. 타히티의 파페에테는 이미 서구문명의 지배아래 정체성을 잃고 서양화되어 그 순수함을 잃고 있었다.

고갱은 할 수 없이 더욱 오지로 들어가 밀림지대인 마타이에아에 정착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테하마나라는 원주민 소녀와 동거하며 그가 꿈꾸던 원시주의 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1891년 그려진 ‘아이오라나 마리아’는 ‘마리아에게 경배를’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작품은 아름다운 남국의 섬을 배경으로 원주민 여인이 어깨에 아기를 올려 안고 미소 짓는 모습과 그 여인을 향해 기도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그렸다.

화면은 주홍색과 짙은 블루의 대비, 배경을 장식하는 화려한 색상의 퍼레이드로 순수하고도 강렬한 유토피아를 창조한다. 이 작품에서 백인들의 전유물이었던 성서 속 인물들은 갈색의 피부 톤을 가진 원주민으로 대체되었다. 성서 속의 마리아와 예수의 모습을 원주민의 모습으로 환치시켜 그만의 성화를 탄생시킨 것이다.

생생하고 화려한 원색의 향연 속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생명력이 화면 전체에 가득하다. 마치 낙원과도 같은 배경 속 화면 하단에 그려진 과일들이 풍성한 수확을 상징하고, 기독교에서 걸어 나온 예수와 마리아는 그의 환상 속에서 또 다른 풍요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08_세계에서 번째로 비싼 그림 언제 결혼하니?’

1892년 제작된 ‘언제 결혼하니?’ (나페아 파아 이포이포)는 타히티 섬의 뜨거운 태양아래 앉아있는 두 여인을 그린 그림이다. 그의 원시주의 회화가 만개할 무렵의 이 작품은 큼직큼직 하게 나뉘어진 색면의 분할로 배경을 처리하고 있다.

산이나 풀밭, 그림자들이 푸른색, 황금색 덩어리로 표현되어 각 색깔은 스스로의 존재를 강렬하게 드러낸다. 앉아있는 여인의 형태 역시 흰색과 붉은색 의상, 갈색 톤의 피부색이 먼저 색채 그 자체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것은 우리에게 밝고 아름다운 여러 가지 색상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반추상화를 보는듯한 느낌을 준다.

귀에 꽃을 꽂고 수줍게 몸을 꼬고 앉아있는 여인과 뒤에 앉아 그녀에게 속삭이는 여인들의 모습에서 한여름 풀밭에 앉아 “얘, 너는 언제 시집갈래?” 하며 재잘거리는 소녀들의 평화롭고 싱그러운 오후의 한때를 느낄 수 있다. 이 작품은 2015년 경매에서 3억불, 한화로 3000억원에 낙찰 되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비싼 그림이 되었다.

평생 가난과 질병에 허덕이던 고갱의 처지가 안타까워 화가 생전에 사람들이 알아봐주고 1000분의 1이라도 혜택이 돌아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09_’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7년, 인생의 황혼기이자 두 자식의 죽음 후 절망에 빠져있던 고갱은 그의 대표작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그렸다.

괴로움과 절망으로 인생의 회의에 젖어있던 고갱은 그의 마지막 정열을 끌어 모아 이 대작을 완성했다. 인간의 탄생과 삶, 죽음이라는 3가지 단계를 타히티의 여인들과 풍광 속에 녹여낸 이 작품은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의 철학적 물음을 화폭에 담은 것 같다.

화면 오른쪽 하단에 누워있는 아기와 그 아기를 들여다보며 행복해 하는 세 여인의 모습으로 탄생을 표현하고 중앙에는 과일을 따는 젊은이를 중심으로 삶을 살아가는 여러 가지 모습들의 군상들이 다양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가 따고 있는 과일은 선악과로 이 과일로 인해 인간의 생로병사는 시작되었고, 주어진 삶의 굴레 안에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느끼며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그린 것 같다.

화면 왼쪽에는 늙은 여인이 이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마감하듯 앉아있는데, 거부할 수 없는 죽음의 괴로움과 체념으로 가득 차 웅크리고 비탄에 빠진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화면 전체에 퍼져있는 푸른색과 왼쪽, 인생의 끝인 죽음을 표현한 어두운 색조는 우리에게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게 한다.

실제로 이 그림을 그린 뒤, 자살시도를 할 정도로 이 시기의 고갱은 괴롭고 어두운 상태였지만, 절망의 밑바닥에서 길어 올린 위대한 예술혼이 담긴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이 되었고, 지금도 미국 보스톤미술관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10_오로지 예술을 버팀목 삼아 스스로를 불태운 화가

서머싯 몸은 그의 소설 <달과 6펜스>에서 고갱을 모델로 예술가의 삶을 그렸다. 파란만장하고 고통으로 얼룩진 인생을 치열하게 살아간 고갱. “의지를 가지고 삶을 살지 않는다면, 적어도 의지의 한계에 이르기까지 살지 않는다면 삶이란 의미가 없다”며 오로지 예술을 버팀목 삼아 스스로를 불태웠다.

강렬한 원색과 뜨거운 태양이 어우러지고 원시의 향기를 간직한 그만의 이상향에서 아름다운 색채로 이국적인 정취를 마음껏 표현해낸 이 순수하고 열정적인 화가에게 궤테의 ‘오월의 노래’ 한 구절을 드리고 싶다.

 

오오, 찬란하다

자연의 빛

해는 빛나고

풀은 웃는다

 

나뭇가지마다

꽃은 피어나고

떨기 속에서는

새의 지저귐

넘쳐 터지는

가슴의 기쁨

 

대지여 태양이여

행복이여 환희여

사랑이여 사랑이여

 

저 산과 산에 걸린

아침 구름과 같은

금빛 아름다움

 

그 기막힌 은혜는

신선한 들에

꽃 위에 넘친다

 

한가로운 땅에…

 

* 다음은 기묘한 환상의 세계 살바도르 달리와 만나겠습니다.

 

 

글 / 미셸 유 (글벗세움문학회 회원·서양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