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이 숨쉬는 세상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전쟁이 없고 다툼이 없는 세상?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구분이 없는 세상? 미움과 증오가 없는 세상? 사람마다 살아가는 철학이나 방식에 따라 생각은 다르겠지만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그건 ‘상식’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세상 아닐까?

상식이란 학문적인 측면에서는 교육에서 배울 수 있는 정상적인 사람들이 가지고 있거나 또는 가지고 있어야 할 일반적인 이해력, 판단력, 사리분별 능력을 뜻한다.

예컨대 칼슘이 부족하면 근육이 발작하거나 경련이 일어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칼슘흡수율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다. 어학사전에는 상식이란 ‘보통사람이 다 가지고 있거나 가지고 있어야 할 지식이나 판단력’이라고 설명돼 있다.

컴퓨터정보용어 대사전에는 ‘상식이란 한정된 지식범위만으로는 처리할 수 없는 종류의 문제해결에 요구되는, 보다 일반적인 지식이다. 새는 보통 날기 때문에, 어느 새가 날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고 하는 경우, 일단 그 새는 날수 있다고 보는 것이 상식이다’라고 정의돼 있다. 어려운 설명이다.

그러나 상식이란 쉽게 말하면 보통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일반적인 지식을 뜻하는 거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 길거리에 휴지를 버려서는 안 된다, 아무데나 침을 뱉지 말라, 욕심을 부리지 말라, 도둑질을 하지 말라, 남을 속여 이득을 취하지 말라, 남을 모략하지 말라, 편갈라 싸우지 말라’라는 것들이 우리들의 상식이다. 단순하다.

헌데, 살아보면 알겠지만 이 간단하고 단순한 것 같은 상식을 지키는 것이 결코 쉽지 않고 생각보다 어렵다. 상식을 잘 따르다 보면 남들이 바보라고 비웃음 짓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대다수 서민들은 상식대로 살아보자 애쓰고 있다. 분명히 말하건대 상식이란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할 호모사피엔스들에겐 언제까지나 반드시 지켜져야 할 가장 중요한 도덕이다.

내가 살아가는 곳에 걸핏하면 니편 내편으로 갈라져 얼굴을 붉히며 끊임없이 다투는 인물들이 있다. 한인회와 관계된 인물들이다. 남들 앞에서는 우리는 한민족이라고 떠들어대는 웅녀 (熊女)의 후손, 자랑스런 단군할아버지의 후예들이다. 사람들은 비록 얼굴을 붉히는 사이일지라도 가는 해를 보내고 오는 해를 맞이할 즈음에는 따뜻한 ‘덕담’을 나누는 것이 세상 살아가는 상식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지난해 끝 무렵, 교민사회의 정도를 들먹이며 명색이 언론이라고 행세하는 한 ‘교민신문’의 머리기사는 그런 상식을 거부했다. ‘분란’ ‘전락’ ‘몰지각’ ‘변명’ ‘꼼수’라는 단어가 어지러웠다. 한인회와 관련된 한인회장에 대한 지적이었다. 정상적인 기사라고 하기에는 사용된 단어가 지나치게 거칠고 자극적이었다.

칼럼의 생명은 칼날 같은 비판과 문제의식이다. 그러나 기사는 치우치지 않은 공정과, 얼음처럼 차가운 냉정과 분명한 근거를 가진 사실 확인이 생명이다. 칼럼의 핵심은 글 쓰는 자의 의견과 주장이다. 하지만 기사의 핵심은 기사작성자의 의견과 주장이 아닌 정확한 사실 보도다. ‘하더라’가 아닌 ‘하다’여야 한다.

전문가인 척 허세를 부리지만, 사실은 전혀 전문가가 아닌 인물들이 의외로 흔한 교민사회에서 이런 상식을 바라는 것은 어쩌면 연목구어 (緣木求魚)일수도 있겠지만, 그 기사는 기사라기보다 자기기만의 확증 편향이었다.

뭔가 감춰진 한인회와 관련된 편가르기가 보이는 ‘험담’의 열매일 뿐이었다. 문장 곳곳이 명예훼손의 소지까지 안고 있었다. 교민사회의 혼탁을 부추기는 상식을 벗어난 행태였다. 동네구멍가게 같은 교민언론에 너무 거창하게 바라는 희망인지 모르겠지만, 자칭이든 타칭이든 ‘언론’이라고 한다면 편가르기는 하지 말아야 한다. 누구보다 상식 앞에 바르게 서야 한다.

한인회에서 2020년 신년하례식을 가졌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한인회장은 자신을 지적한 그 기사에 대해 함구하면서 “서로 힘을 합치면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다”고 했다 한다. 상식을 말한 거다. 말은 그 사람의 품격이다.

오른뺨을 때린 사람에게 웃으면서 왼뺨도 내민다고 하는 것이 사랑인지 온유인지 믿음인지 용서인지 나는 모른다. 다만 그런 몸짓들이 상식이 숨쉬는 세상의 뿌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