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죽음과 자유

지난 10년간 고국의 60세 이상 황혼이혼율이 평균 42%에 달한다고 한다. 3쌍 중 1쌍 이상이 이혼하는 것으로 확인된 거다. 이유야 어찌됐든 황혼이혼은 사회의 고령화 문제와 더불어 또 다른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황혼이혼 방지법’이라는 인터넷 유머가 있다. 유머라고 하지만 행간에는 쓸쓸함이 스며 있다. “함께 있는 시간을 줄여라. 그래야 의견충돌로 다툴 일이 적어진다 / 서로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마라. 치매환자가 아닌 이상 허튼 짓은 안 한다 / 쪼잔 하게 여자 돈 쓰는데 간섭마라. 돈 쓰는데 간섭 받으면 제일 열 받는다. 스트레스 받아 병들면 돈 더 많이 든다 / 같은 취미를 가지지 마라. 서로가 어울리지 않는 게 좋다 / 식사는 각자가 알아서 챙겨 먹어라 / 집안일도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은 사람이 알아서 하라 / TV 채널은 여자에게 우선권을 줘라. 아니면 한대 더 사라 / 모임을 부부 함께 하지 마라. 서로 비교하고 나쁜 일만 생긴다.” 즉, 황혼이혼을 방지하려면 서로에 무관심하고 서로를 구속하지 말라는 의미다.

우리는 결혼할 때 사랑을 맹세하는 증표로 반지를 나눈다. 반지는 원이다. 원은 탈출구가 없다. 원은 구속을 의미한다. 반지는 구속이다. 결혼이란 서로가 서로에게 구속당하겠다는 맹세인 셈이다. 아이를 낳고, 키우고, 가르치는 것은 서로에 대한 구속이다. 울고 웃고 다투는 것도 서로에 대한 구속이다. 삶 자체가 구속이다. 우리는 그 구속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슴에 담는다.

이따금 주위에서 어느 부부가 황혼이혼을 했다는 풍문을 듣는다. 그들은 끈질기게 참아왔던 다툼과 미움과 지겨움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아 훨훨 날개를 달았다고 한다. 아들 딸 모두 보내고 마지막 곁에 남아있던 사람도 보냈다면서, 드디어 하늘로 날아오를 자유를 얻었다고 한다.

자유를 얻고자 이혼을 한다? 쓸쓸하고 어리석은 자기위안이다. 풀려난 해방감보다 부셔버린 절망감 때문에 몹시도 혼란스러울 것이다. 황혼이혼은 포용할 줄 모르는 이기심 때문이다. 새로운 것의 환상, 오래된 것의 무관심, 길들여진 것의 권태가 혼재된 차가운 이기심이다. 상대에 대한 존중을 거부하고, 자신만을 생각하는 비틀린 이기주의다. 함께 살아온 날들에 대한 애틋함, 감쌈, 측은함이 결여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따뜻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다투는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미움도 생기는 것이다. 사랑은 구속이며 관심이다. 족쇄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라 사랑을 버린 것이다. 황혼이혼은 아낌과 짠함의 인간애가 결여된 개인과 사회가 도덕적으로 마비되고 정신적으로 붕괴되는 현상인 것이다.

다큐멘터리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공무도하 公無渡河)’에서 76년을 함께 살아온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손을 마주잡고 그렇게 같이 가면 얼마나 좋겠소”라며 병든 할아버지의 뒷모습에 애통해 한다. 그러면서 “석 달만 더 살아 주오, 석 달만”이라고 중얼거린다. 76년을 같이 살았으면서도 더 같이 있고 싶어한다. 황혼에 기운 할멈의 머리카락이 시리다. 할아범의 발걸음이 서두름 없는 평온이다. 붉은 노을을 마주하며 손을 꼭 잡고 느리게 걷는 늙은 부부의 뒷모습이 몸서리쳐지도록 아름답다.

어느 날, 흰머리가 늘어가고 얼굴에 주름살이 패어가고, 허리가 굽어가고 손등이 소나무 등걸처럼 거칠어져 가는 어느 날, 저 멀리 창공을 가르는 새들을 보면서 마침내 알게 된다. 그래, 저녁노을이구나. 되돌아올 수 없는 먼 길 떠날 날이 그리 머지 않았구나. 그렇구나, 자유가 눈 앞에 왔구나.

그런 것이다. 자유란 구속을 벗어났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자유란 사랑을 가슴에 품고 죽어야만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보들레르는 죽음 속에서만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새겨 두라.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