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골치 아픈 녀석

이기주의가 넘쳐나는 세상은 인간관계를 이분법적으로 분류하는 경향이 짙다. 내편 아니면 적이다. 이웃은 없다. 모든 다툼은 법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뻑 하면 고소 고발이다. 공존과 공생을 거부한다. 더불어 사는 인간미 라는 말이 낯설다.

내가 살아온 옛날 얘기 한 토막이다. 내가 처음으로 몸담은 회사는 대리 이하 직원은 수위와 함께 숙직을 했다. 숙직자는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면 회사 출입문을 닫고 매시간 회사 건물을 순찰했다. 숙직 다음날은 정오까지 근무하면 됐다. 그러나 누구도 정오까지 근무하고 퇴근하지 않았다. 일에 대한 열정 때문이 아니라 회사분위기가 그랬다.

숙직하는 날 저녁식사는 회사 주변의 음식점에서 배달해 먹는데 으레 소주가 곁들여졌다. 수위에게 소주라도 대접해야 숙직 근무가 편했다. 술대접 받은 수위는 순찰을 혼자 맡겠다며 숙직실에 가서 자라고 생색을 냈다. 그렇지 않으면 원칙대로 수위와 함께 밤새도록 순찰을 돌아야 했다.

입사 2년차인 내가 숙직인 그날도 출입문 셔터를 내리고 수위와 나는 수위실에서 저녁식사와 함께 소주를 즐기고 있었다. 얼큰해진 밤 늦은 시간, 회사 출입문 셔터가 요란하게 흔들리면서 쿵쾅거렸다.

깜짝 놀라 수위를 쳐다봤다. 수위가 상소리를 뱉었다. “저 씨벌새끼 또 왔네! 저 새끼 깡패 같은 새낀데, 뻑 하면 술 처먹고 와서 술 내놓으라고 깽판을 쳐. 술 안주면 계속 셔터를 발로 찬다고. 몇 번 파출소에 신고도 했는데 어찌된 게 며칠 있으면 다시 온다고. 줘서 보내는 게 편하지. 술 남은 거 있지?” 내가 말했다. “남은 거 내가 마실 건데요.” “그럼 술값 몇 푼 주자고.” “술 값을 왜 줘요?”

나는 말리는 수위를 뿌리치고 셔터를 올리고 그 깡패 같다는 녀석에게 “너 줄 술 없으니 돌아가라”고 윽박질렀다. 그리고, 그래서, 녀석과 나는 시비가 붙었고 급기야는 엉켜 붙었다. 얼마를 치고 받았는지 정확하게 기억은 없지만 얼추 한 시간 정도를 헉헉대며 난투극을 벌였다.

끌려간 파출소에서 날이 훤하게 밝아오자 담당 경찰관이 화해하고 돌아가라고 했다. 녀석과 통성명을 하고 보니 나와 비슷한 또래였다. 녀석이나 나나 코피가 터졌고 입술이 찢어졌고 광대뼈가 부풀어올랐다.

녀석과 나는 서로를 고소하지 않았다. 서로에게 치료비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냥 쿨하게 악수만 하고 헤어졌다. 그 모습을 하고 근무하겠다고 회사로 출근을 했다.

회사에는 오전도 지나기 전에 소문이 쫙 퍼졌다. 나는 숙직근무 중에 싸움질을 했으니 틀림없이 징계를 받을 거라고 각오했다. 헌데 잠잠했다. 오히려 총무부장은 나를 부르더니 괜찮냐며 걱정도 해줬다. 하지만 정작 골치 아픈 일은 그 후에 찾아왔다.

녀석과 다툰 상처가 아물어갈 즈음, 녀석은 사흘이 멀다 하고 회사 앞에서 퇴근하는 나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냥 술 한잔 하자는 거였다. 분명히 뭔가 속셈이 있을 터인데도 녀석은 본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게다가 술값도 녀석이 지불했다. 술자리의 대화도 시시콜콜한 것들이었다. 도대체 나를 기다리는 이유가 뭐냐고 수 차례 물었지만 “니랑 술 한잔 하고 싶어서다”라며 자기는 한번 끝난 일 가지고 지저분하게 뒤통수치는 놈 아니니 신경 끄라고 했다.

녀석의 속내를 알길 없는 나는 골치가 아프기 시작했다. 녀석을 피해 뒷문으로 도망가려고 멈칫거리기도 했다. 그런 날들이 점점 짜증나기 시작할 즈음, 녀석이 “오늘이 니랑 마지막 아이가”라며 술잔을 부딪쳤다.

녀석은 막일을 하면서 혼자 살아가고 있었다. 녀석은 나하고 그렇게 진탕 싸우고 난 후 자신을 돌아봤다는 거다. 그리고 아랫녘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산동네 단칸방 월세를 살았는데 떠나려고 보증금을 돌려달라고 했지만 집주인이 돌려줄 돈이 없다는 통에 3개월을 더 머물게 된 거라고 했다. 녀석은 “깡패처럼 깽판치면 웬만한 건 통했는데 니한테는 안 통했다”고 씨익 웃으며 그 동안 피하지 않고 만나줘서 고맙다고 했다.

녀석의 영혼은 맑았다. 녀석에게는 인간미가 있었다. 녀석은 안정되면 연락하겠다며 떠나갔지만 연락은 없었고 난 녀석을 잊었다. 지금 녀석은 살아있을까?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