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역할이 없으면 하나님 나라의 연극은…

성경을 하나의 연극 무대로 비유한다면 침례 (세례) 요한의 가정은 주연이신 예수님의 가정을 돕는 조연으로 그려져 있다. 누가복음 1장 전체가 그의 가정사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왜 누가는 복음서의 주연인 그리스도 혹은 메시야인 예수님의 출생 이야기보다 조연인 선지자 요한의 출생 스토리를 더 비중 있게 다루고 있을까?

 

01_조연이 없다면 주연도 없다

이 점이 필자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필자의 소견으론 조연인 요한의 역할이 주연인 예수의 출현을 더욱 빛나게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연극에서 조연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으면 주연이 아무리 뛰어난 배우라 할지라도 그리 큰 빛을 발휘하지 못한다. 조연이 주연의 자리를 시기하고 탐하면 제대로 된 연극을 무대에 올릴 수 없을 것이다. 작품성이 뛰어난 연극이 되지 못할 것이다.

조연인 ‘선지자 요한’이 주연인 ‘메시야 예수’의 길을 제대로 닦아놓지 않고 그 자리를 시기하고 탐냈다면 예수님의 메시야 길은 난황을 겪었을 것이다.

 

02_조연 위해 부름 받음

연극 무대에서 주연과 조연의 차이를 결정짓는 기준은 대사의 분량과 역할의 중요성이다. 비중을 많이 차지하는 주연을 중심으로 극의 시나리오가 짜여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대부분 무대는 주연만 관객들에게 오래 기억되고 조연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관객들의 기억에서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조연과 주연의 차이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역의 소명 (Calling)에 따른 역할 차이로 생각한다. 예수님만이 우리 모든 크리스천의 주연이시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는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사역을 돕는 조연이다. 이 조연의 역할을 위해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조연인 우리의 역할은 너무나 소중하다. 조연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역할이 없으면 하나님 나라의 연극은 무대에 올려보지도 못하고 사라질 것이다.

우리 각자의 소중한 역할을 우리는 달란트 (talent) 혹은 은사 (gift)라 말한다. 우리 모두의 ‘은사에 따른 역할’ 그 자체가 가치 있고 소중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각기 다른 은사를 연극 무대처럼 출연자의 역할의 중요성이나 대사의 분량에 기준을 둔 관점에서 접근하면 절대 안 된다. 큰 오해와 다툼의 불씨가 된다.

누가 (Luke)의 관점으로 묘사된 침례 요한의 부모는 하나님께서 아들 요한에게 맡겨주신 사명과 역할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했다. 요한의 부모는 요한이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할 수 있도록 어렸을 때부터 제대로 교육시켰다.

 

03_유혹 많은 조연의 삶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상의 어느 부모가 자식이 조연되기를 기대하며 교육시키겠는가?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우리 자녀를 어느 한 특정인의 조연이 되도록 교육시키는 것이 아니란 사실이다. 메시야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주연이신 예수님의 조연으로 교육시키는 것이다.

그 분의 사역을 충실히 돕는 조연이다. 필자는 이 교육을 ‘소명(Calling)에 충실한 자녀 교육’이라 부른다. 이 교육의 모델이 바로 침례 요한의 부모인 사가랴와 엘리사벳이다.

그들은 요한을 어렸을 때부터 철저하게 하나님의 소명에 입각해서 교육시켰다. 소명의 가치와 중요성을 늘 일깨워주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성실히 준행하도록 교육시켰다.

자신의 부모님께 받은 교육대로 침례 요한은 기꺼이 조연되기를 기뻐했다. 주연이신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스포트 라이트를 한 몸에 받고 멋있게 입장하시도록 화려한 레드 카펫을 깔아주었다. 조연의 역할을 아주 충실히 이행했다.

선지자 요한에게 주연이 될 수 있는 유혹은 아주 많았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유혹을 단호히 뿌리치고 조연의 사명을 성실히 감당했다. 그의 설교를 듣고 그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사람들은 그가 기다리던 ‘메시야’ 혹은 ‘그리스도’라 생각했다. 이들을 향해 요한은 단호하게 말한다.

“나는 당신들에게 물로 침례를 베풀지만 나보다 더 크신 그 분이 오시고 있느니라. 나는 그 분의 샌달 끈조차도 풀지 못하느니라. “(눅 3.15).

그는 일평생 하나님께 조연으로 캐스팅 (casting) 되었음을 잠시도 잊지 않았다. 오실 메시야이며 주연이신 예수님의 길을 평탄하게 닦는 조연으로서의 역할에 만족했다. 단 한번도 주연의 역할을 탐하거나 욕심내지 않았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우리가 자녀들을 교육시킬 때 절대로 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 가정 교육의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교회 교육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04_그 부모의 아들

그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은 친척인 마리아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임을 알고도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리아와 그 아이를 마음껏 소리 높여 축복해주었다.

“그대는 (모든) 여인들 가운데 축복받았다. 그대의 태의 열매도 축복받았다”(눅 1.43).

이런 축복의 기도는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절대로 실천할 수 없다. 부모로서 내 자녀가 같은 또래의 다른 자녀에 비해 열등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어느 부모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누가 과연 다른 아이의 부모를 축복할 수 있겠는가? 내 자녀의 소명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이런 축복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엘리사벳의 축복과 환대를 받은 마리아는 그 집에 3개월을 머물렀다. 잠시 방문차 들린 친척 집에서 무려 임신 기간의 3분의 1을 모든 것이 익숙한 자기 집이 아닌, 모든 것이 낯선 다른 집에서 머무른 것이다.

임신한 여인은 정신적으로 예민하고 민감해서 어지간해서는 자신에게 익숙지 않은 곳에서 오래있지 못하지 않는가?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얼마나 편하게 해줬으면 마리아가 임신 기간 중3분의 1을 엘리사벳 집에서 머물렀겠는가?

만약 엘리사벳의 집이 불편했다면 이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선지자 요한의 부모인 엘리사벳과 사가랴는 영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아주 성숙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성숙된 삶을 통해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축복을 받았다. 이렇듯 성령으로 충만하고 영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성숙해야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고 세워줄 수 있다.

조연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침례 요한의 부모를 통해 우리는 충분히 배우고 있다. 그들은 자식인 요한을 메시야의 조연으로 키우기 전에 그들 스스로가 먼저 조연의 본이 되었다.

이들의 섬김의 자세가 그대로 자식인 요한에게 자연스럽게 전수되었다. 침례 요한이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조연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의 부모의 가정 교육의 힘으로 여겨진다. 우리의 자녀를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귀하게 쓰임 받는 멋있고 쿨한 조연으로 키우기를 몸부림치자!

 

글 / 권오영 (철학박사·알파크루시스대학교 교수· 신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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