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인 장혜원 어머니 김태임 여사

 “가정을 지키는 예술가가 진정한 여성 예술가다” 강조한 수퍼 우먼

이 내용은 <코리아 타운> 김태선 발행인이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재직 당시 한국 정부와 함께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 역대 수상자 15명의 자식 사랑 이야기를 묶어 단행본으로 펴낸 것입니다.

자녀 예술가들이 어머니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는 1인칭 서술기법을 사용한 이 책은 단행본 사상 최초로 사진을 곁들인 잡지식 편집기법을 도입, 독자들로부터 높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제 7년여의 세월이 흘렀지만 본란에서는 당시의 내용을 가감 없이 그대로 수록, 성공한 예술가 자녀를 키워낸 장한 어머니의 사랑 이야기가 우리 교민사회에 타산지석의 효과를 가져오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아흔 아홉간 집’ 개성 최고 갑부의 딸

미당 서정주 선생은 ‘자화상’이라는 시에서 참으로 어려운 고백을 아주 당당하게 하신 바 있다. “아비는 종이었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다…” 이 얼마나 외롭고 괴로운, 그러나 당당한 고백인가!

사실이 아버지가 종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기억 속에 화석처럼 굳어 있을지라도, 그것을 잊어버리고 싶고 감추고 싶은 것이 보통 사람들의 심정이고 보면 이 고백은 우리에게 충격으로 다가오기에 충분하다.

더구나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역정에는 천형처럼 고난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고백에 이르면 여기에 내재된 의미가 결코 예사롭지 않음을 직감하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선생을 그렇게 당당하게 만들었을까? 어떻게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을까?

그러면 나는 어떠한가? 감히 서정주 선생식으로 말한다면 이렇다. “아버님은 귀족이셨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햇볕이었다.” 진실로 그렇다.

소문난 지주의 아들이며 경성제국대학(지금의 서울대학교) 출신 의학박사인 아버지와, 아흔 아홉 간 집을 가진 개성 최고 갑부의 딸이며 경기여고를 졸업한 어머니.

그러한 두 분 사이의 4남 1녀 중 한 사람. 서울공대를 나와 대기업 부회장을 지낸 큰 오빠, 서울상대를 나와 비즈니스를 하는 둘째 오빠, 연세대 상대를 나와 투자금융회사 사장을 하는 셋째 오빠, 연세대 의대를 나와 미국에서 의사를 하는 남동생, 이쯤이면 나를 키운 건 8할이 아니라 온통 햇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그러나 어쩌랴. 이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배경’만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은 아닌 것을! 아무리 비옥한 텃밭에 씨를 뿌렸어도 농부의 노고와 정성스러운 손길이 닿지 않으면 잡초에 묻혀 실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 땅이 비옥하면 잡초도 무성하게 자라는 법이다.

 

좌절된 피아니스트의 꿈, 딸을 통해서…

그래서 나는 ‘선택 받은 사람’이라고 자부하면서도 늘 “나를 키운 뜨거운 가슴과 냉정한 지혜와 정성어린 손길에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다”고 생각하며 산다. 그 한복판에 바로 내 어머니 김태임 여사가 자리하고 계시다.

이제는 팔순도 훨씬 넘어 뼈마디도 굳어지고 몸무게가 많이 가벼워진 내 어머니. 나는 당신께 진 빚 때문에 감사하고 감사 하고 또 감사할 따름이다. 음악대학 학장, 음악연구소 소장, 피아노학회 회장, 이런 나의 위치마저도 당신의 정성에 비추면 결코 빛날 수가 없어 한편으로는 죄송하기까지 하다.

사실 나는 피아니스트가 되도록 운명 지어진 사람이다. 만일 피아니스트가 되지 않았다면 한 사람의 생애의 의미를 적잖이 훼손시켰을 사람이다.

내 어머니는 여고시절 피아노를 너무 좋아하셔서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피아노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가고자 했다. 당시 개성의 제일 가는 갑부의 딸이니 경제적 여건이야 문제가 될리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았다. 사람은 시대를 잘 타고나야 한다는 말이 그래서 있는가 싶다. 당시로서는 여자는 모름지기 여고 정도를 졸업했으면 요조숙녀의 미모와 덕을 닦아 결혼을 하고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 마땅했다.

또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부모를 떠나 여자 혼자서 외국유학을 떠나는 일은 위험의 정도를 넘는다는 봉건적 편견 때문에 어머니는 그 꿈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스물 한 살의 나이에 어머니는 아버지와 중매 결혼을 하셨다. 이러한 어머니의 소망이 무엇이었겠는가? “내가 딸을 낳으면 반드시 훌륭한 피아니스트를 만들리라!” 이것이 바로 어머니의 한 맺힌 소망이었다.

아들 셋 끝에 내가 딸로 태어난 것은 그러니까 어머니의 소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결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던 셈이다.

 

피난 통에도 밥상에서 건반연습

내가 다섯 살 때 피아노를 시작했으니 예술에 대한 당시 우리나라의 인식 정도를 생각하면 어머니의 소망이 얼마나 각별한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들은 스스로 크는 나무이지만 딸은 사랑과 정성으로 피우는 꽃”이라면서 나에게 온갖 열정을 다 베풀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내가 나의 이 ‘운명’에 감사하면서 “다시 태어나도 피아니스트가 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도 바로 여기에 연유한다.

내 어머니가 나를 피아니스트로 만드는 과정은 자식을 통해 자신이 이루지 못한 소망을 실현하려는 괜스러운, 그리고 일회적인 보상심리의 차원을 넘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신께서 평생을 걸고 설정한 생애의 프로그램이었다. 아버지의 명성도, 아들들의 출세도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나는 결국 ‘짐스러운 복덩어리’였던 셈이다.

어머니는 일찍부터 나를 피아니스트로 키우기 위해 나의 바탕부터 닦으셨다. 피아니스트의 신체적 조건중의 하나에 손가락의 크기와 유연성이 있는데, 내 손이 지금 이만큼이나마 유연성이 있는 것은 순전히 어머니 덕분이다.

어머니는 목욕을 하고 나면 내 손을 꼭 잡고 친히 안마를 해서 손과 손가락을 늘 유연하게 할 수 있도록 정성을 기울이셨다. 다음 일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열 두살 때 6.25전쟁 통에 대구로 피난을 가게 됐는데, 피아노를 가지고 가지 못해 안타까워하던 중에 어머니가 한가지 지혜를 짜내셨다.

문에 바르는 커다란 창호지에 하얀 키, 검은 키의 건반을 실제 피아노 크기로 정확히 그려서 그것을 밥상 위에 얹어두고 내 손의 유연성을 위해 스케일 연습을 시키셨다.

 

자신과 자식들에게는 매우 엄격했던 분

이것 뿐만이 아니다. 어머니는 내가 피아노를 시작하던 어린 시절에 일본어 서적을 번역해서 음악가들의 이야기를 동화 들려주듯 하셨다.

술주정뱅이 아버지에게 매를 맞으며 음악을 한 베토벤의 이야기를 들으며 무서워했던 것, 왕의 총애를 받으며 음악을 한 모짜르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부러워했던 것, 슈만과 클라라의 사랑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이 따뜻해 오던 것 등은 지금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나의 가슴과 뇌리에 음악과 음악인의 삶을 각인시키려는 어머니의 노력은 이처럼 치밀한 일상 생활의 관리에까지 닿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가르치는 사람은 역시 스승이다. 나는 늘 선생님 복도 참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감사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어머니의 열성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

중학교 때까지는 우리나라 최초로 독일 유학을 하신 이애내 선생님으로부터 사사를 받을 수 있었고, 고등학교 때부터는 이애내 선생님의 제자이기도 하며 당시 이화여대 교수이셨던 신재덕 선생님으로부터 과분한 사랑과 정성의 사사를 받을 수 있었던 것 역시 어머니의 지극한 열성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세상 일이 어디 물질의 힘만으로 성취되는가? 일에 임하는 사람의 생각과 태도가 올곧고 진지할 때, 그리고 일을 하는 중에 맺어지는 인간 관계를 성실하게 유지할 때 세상 일이 순탄하게 이루어지는 것임을 생각하면 우리 어머니의 외유내강의 성격이 나를 복 많은 여자로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어머니의 열성은 어린 나에게 약간은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남에게 화 한번 못 내시고 남의 흉은 결코 입밖에 올리지 않으셨던, 그리고 가난한 학생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해 월급까지 털어주시던 로맨티스트요 낙천주의자였던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자기 자신과 자식들에게 지극히 엄격한 분이셨다.

 

배반할 수 없었던 어머니의 기대

수송초등학교 시절 하교 길에 경복궁 쪽에서 친구들과 까만 버찌 열매를 따먹고 시커먼 입술로 집에 돌아와, 결국 피아노 연습 시간을 펑크 내는 바람에 당한 어머니의 꾸지람은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것이었다.

이후 나는 친구들과 놀려면 빡빡하게 짜여진 스케줄을 먼저 수행해야만 했다. 지금의 내가 ‘약속 지키기’를 이만큼이나마 생활화하고 사는 것도 어쩌면 어머니의 덕이리라. 그러나 피아노 연습을 모든 일에 우선하는 어머니의 엄격함은 결코 나의 원망의 대상은 아니었다.

경성제국대학 의과대학 시절 그 대학 오케스트라의 첼리스트요 지휘자였던 아버지와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수준급의 첼로 연주자인 형제들, 특히 재미 의사인 남동생은 무대에서도 첼로를 연주하는 ‘닥터 첼리스트’로 통한다.

덕분에 나 또한 음악적 분위기에 익숙해 피아노 연습 자체가 결코 따분한 것은 아니었다. 피아노 연습은 나의 어린 시절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 있었던 셈이다.

어머니의 열정과 엄격함, 이것을 나는 나이가 들면서 결코 ‘배반할 수 없는 어머니의 기대’로 인식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대학원까지의 과정을 마치고 6백대 1 가량의 경쟁에서 뽑혀 독일 국비유학을 할 수 있었던 것, 64년부터 만 4년 이상을 독일에서 유학하는 동안 노는 일과 여행을 극도로 자제하고 결혼은 생각지도 못한 채 피아노 공부에만 매달릴 수 있었던 것.

이런 것은 바로 “게으르면 안돼. 나는 어머니의 기대에 반드시 부응해야 해. 나의 행복은 곧 어머니의 행복이야!” 하는 나 스스로의 최면에서 가능했다.

낯설고 먼 이국에서 외롭고 쓸쓸할 때 위대한(?) 정신적 후원자의 따뜻하고도 엄한 눈을 의식한다는 것은 차라리 나에게 위안일지언정 결코 무서움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열정과 지혜를 동시에

내 어머니는 열정에 못지 않게 지혜를 지니신 분이기도 하다. 어머니께서 나에게 음악 못지 않게 강조하신 것은 독서와 외국어 학습이었다.

독일 유학시절 나는 이 덕을 톡톡히 보았다. 나는 독일에서 유학하는 동안 헝가리 태생의 베른아트라는 교수의 전속 반주를 4년 동안 했는데, 그분의 지론은 반주자도 성악가와 마찬가지로 시를 이해하고 그것에 감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엄청난 깨달음이었다. 실제로 그 관점에서 들여다보니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 브라암스 등의 주옥 같은 명곡들은 바로 쉴러, 하이네, 괴테, 뮐러 등의 명시들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시와 음악은 결코 분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거장의 가슴 속에서 다시 하나로 융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베른아트 교수는 레슨 시간이 한 시간이면 30분은 반드시 시의 이해와 감상에 할애하는 분이셨다. 이러한 당위적 현실을 내가 제대로 수용할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의 독서에 대한 소중한 일깨움 때문이었다.

내 중고등학교 시절 국어 교사였던 김종오 선생님의 “음악가는 음악을 통해 시인이어야 한다”는 말씀이 새삼 진리의 말씀으로 떠오르던 것도 이 즈음의 일이다.

어머니께서 외국어 학습을 강조하신 것도 내 삶에서 귀중한 밑바탕이 되었다. 물론 당신께서 경기여고를 나온 재원이신 면도 있었겠지만, 아직은 척박한 한국의 현대음악 풍토에서는 외국 유학은 필수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러기에 외국어 학습을 그렇게 강조하셨고, 독일 유학 길에 오를 때쯤에는 내가 이미 독일어를 유창할 정도로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만일 그렇지 못했더라면 나는 독일에 건너가서도 독일 음악을 이해하려면 독일의 시를 먼저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독일 문학을 위해 독일어 공부부터 다시 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나의 피아노 공부도 늦어졌을 것이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문화에 대한 이해는 언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이치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유효하지 않은가!

 

가정 지키는 예술가가 진정한 여성 예술가

내 어머니께서 나를 음악인으로 키우기 위해 당신의 온갖 정성을 쏟은 것은 음악 자체에 대한 당신의 사랑과 열정이 지극한 때문이기도 하다.

당신께서 틈이 있을 때면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하시고, 집에 항상 음악이 흐르게 하시고, 내 연주회에 참석하는 것을 굉장한 영광으로 아시고, 음악과 관련된 나의 성취를 가장 기뻐하시고, 연주회에 오셔서도 연주자에 대한 예의보다 음악 자체에 대한 예의를 더욱 소중히 여기시어 어떤 일이 있어도 음악회가 마무리 되기 전에는 미동도 아니 하시는 것, 이것들은 가히 음악에 대한 어머니의 경건한 사랑을 이해하기에 충분하다.

쇼펜하우어는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동경한다”고 했다. 내 어머니는 “우리의 삶 자체가 음악의 상태를 동경한다”고 믿는 분이시다.

음악이 자연의 섭리에 따르는 삶, 조화로운 삶을 우리에게 가르친다면 어머니께서 일상 가운데에서 나에게 전해 준 교훈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어머니께서는 늘 말씀하셨다. “가정을 지키는 예술가가 진정한 여성 예술가다”라고. 참 곱씹어 볼 말씀이다. 예술가에 대한 편견중의 하나가 “예술가는 개성적이고 낭만적인 사람일 수밖에 없어서 그들이 일상의 진부한(?) 삶의 틀을 파괴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의 특권이요 미덕이다”라는 것이고 보면 어머니의 말씀은 참으로 고전적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위대한 예술가이면서도 지극히 요조한 아내요 현명한 어머니인 것, 이 얼마나 짐스러운 수퍼 우먼의 전형인가?

그러나 내 어머니는 일찍부터 그것을 내게 여성의 모델로 제시하셨다. “여자는 출가해서 고생하면 안 된다. 여자가 고생을 하지 않으려면 사람을 모실 줄 알고 살림을 잘해야 한다”고 가르쳐 아버지 손님이 집에 오실라치면 어린 나이에도 어머니 옆에서 요리를 살피고 거들어야 했고, 김장을 할라치면 고무 장갑을 끼고 김장도 거들어야 했다.

내가 지금 ‘일급’의 요리를 할 수는 없지만 내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식탁에 그런대로 괜찮은 음식을 올려 놓을 수 있는 것도 모두 어머니 덕분이다.

 

스스로가 끝까지 현모양처이고자

음악을 한답시고 항상 고답적인 삶만 지향했다면 나의 일상은 얼마나 삭막하고, 또한 그 탓에 음악으로부터도 오히려 멀어지지나 않았겠는가를 생각하면 하찮은 것 같은 가르침이 새삼 고맙다.

요리의 묘미도 조화에 근본을 두고 있음을 감안하면 그것 역시 음악의 상태와 무관하지 않으니 어머니의 이 사소한 가르침도 역시 음악에 대한 당신의 애정이 일상에서 변용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아름다운 음악이 인간의 건전한 정신을 담보하는 것이라면, 맛 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은 건강한 신체를 담보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음악과 요리는 결국 상보적 관계에 있는게 아닐까 싶다.

이런 내 어머니가 ‘로맨티스트 기질의 학자님’인 내 아버지를 어떻게 대하셨을까? 사람됨이라는 것이 가까운 인간 관계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고 보면 이 점은 내 어머니를 이해하는 데 참으로 중요한 것이리라.

10여년 전 부산에서 연주회를 가졌을 때의 일이다. 연주회를 마치고 로비로 나오는데 여자 한 분이 나를 반갑게 맞이 하고는 아버님께 드리라며 금일봉을 전했다. 사연인즉 자신이 의과대학에 다닐 때 아버님이 등록금을 대신 내 주신 덕에 지금은 부산에서 ‘성공한 여의사’로 활동하고 있으니 그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고 싶다는 것이었다.

세상사 중에서 자식 교육을 최우선으로 여기시는 내 어머니가 이 사실을 어떻게 대하셨을까? 6.25전쟁 중에 겪은 고생을 생각하면 참 야속하기도 하였으리라.

그러나 나는 어머니로부터 이에 대한 어떤 불평도 들은 적이 없다. 사리 분별을 제대로 하시는 외유내강의 내 어머니가 천하의 영재를 얻어 그를 교육하는 것을 보람으로 여기는 아버지의 숭고한 길에 어찌 한 잡음이 될 수 있었으랴?

자기 친 자식도 아닌 며느리 하나를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낸 죄인이라는 ‘꼬장한’ 명분 때문에 회혼례를 거부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흔쾌히 따라 화사한 잔치를 포기하신 어머니이고 보면 당신 스스로가 끝까지 현모양처이고자 했으리라.

 

다음에도 예쁜 딸 낳아 또 피아니트로 키우실 분

아버지가 평생 동안 낙천적 사고를 지니고 영국 신사라는 별명에 걸맞게 살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넓고도 넓은 치마폭 덕분이 아니었을까?

어머니는 나에게 넓고도 포근한 분이다. 그곳에 들어서면 세상사의 바람이 멈추고 꽃들이 제 이름에 맞게 갖가지 나비를 부른다. 이런 어머니가 지금 소파에 앉으셔서 서쪽 하늘의 빠알간 노을에 안겨 떨어지는 해를 보고 계신다.

올해 88세. 이태 전에 하늘 같은 남편을 먼저 하늘나라에 보내시고 그분의 뒤를 따라 가실 날을 수틀에 수를 놓는 정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계신다.

나는 지금 어머니에게 죄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나에게 주어진 직책 때문에 일찍 출근하고 밤 늦게 집에 돌아온다는 핑계로 주말이나 공휴일을 틈타 일주일에 겨우 한 번 정도 문안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것도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면서 그러하니 이것으로 어찌 자식의 도리를 다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죄송한 일은 이것만이 아니다.

이제는 후학을 기르는 일에 더욱 열심일 수밖에 없어 거동이 예전처럼 자유롭지 못하신 어머니를 내 연주회에도 3년 동안이나 안내하지 못했으니 어머니의 가장 큰 즐거움 하나를 채워 드리지 못한 셈이 되었다.

나는 믿고 소망한다. 내 어머니는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셔서도 예쁜 딸을 낳아 또 피아니트로 키우실 것이다. 나보다 몇만 배 훌륭한 피아니스트로 키우시리라.

이제 남은 시간, 어머니의 분지에 꽃들이 시들지 않고 벌과 나비가 꿀을 따고 춤추는 일이 끊이지 않기를 진정 나는 소망하고 기원한다.

 

어머니가 주신 변함없는 가르침 일곱 가지

 

  1. 자식은 뜨거운 가슴과 냉정한 지혜로 키워라

어머니는 자식을 키우는데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는 사랑하되 자식의 장래를 위해서는 냉정한 판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하셨다.

자식이 원하는 것을 다 해줄 생각보다는 진정 자식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판단해 그것을 골라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이셨다.

 

  1. 부지런한 생활을 익혀라

하루 아침에 부지런을 떤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매사에 부지런함을 익혀야 후에 무슨 일을 해도 쉽게 할 수 있다”고 강조하셨다.

 

  1. 시간을 철저히 지켜라

연습 시간을 펑크 낸다든가 조금이라도 늦을 경우 어머니의 꾸지람은 대단했다. 어쩌면 지금의 내가 이만큼이나마 약속 지키기를 생활할 수 있는 것은 그때의 어머니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 여성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라

어머니는 “여자가 출가해서 고생하지 않으려면 사람을 모실 줄 알고 살림을 잘해야 한다”고 늘 가르치셨다.

때문에 집에 손님이 오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머니 옆에서 요리를 살피고 거들어야 했다. 내가 지금 내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식탁에 그런대로 괜찮은 음식을 올려 놓을 수 있는 것도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 곁에서 함께 요리를 했기 때문이다.

 

  1. 집안의 분위기를 만들어라

어머니는 나를 음악가로 키우기 위해 틈이 있을 때마다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하셨고 집에 항상 음악이 흐르게 하셨다.

 

  1. 남편을 믿고 따라라

로맨티스트였던 아버지, 낙천주의자였던 아버지는 가난한 학생을 보면 참지 못하시고 월급을 털어주는 등 늘 남 돕기를 좋아하는 분이셨다.

하지만 힘든 살림에도 한 번도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그같은 문제로 싫은 소리나 불평을 하시는 것을 본 적이 없다.

 

  1. 다양한 분야의 공부를 하라

어머니는 나에게 음악뿐만 아니라 독서, 외국어 등 다른 분야의 많은 것들을 공부하게 하셨다. 이 모든 것들은 훗날 내가 음악을 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지식으로 자리 잡았다.

 

후배 예술가들에게 주는 조언 일곱 가지

 

  1. 음악에 대한 열정을 가져라

열정 없이 하는 음악은 살아 있는 음악이 아니다. 그저 기계적인 소리만 낼 뿐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낸 소리, 음악에 대한 열정이 묻어 나는 소리야 말로 청중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1. 다른 사람의 음악에 귀를 기울여라

자신의 음악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독불장군 식으로 음악을 한다면 그것은 벽에 갇혀 내는 공허한 울림이다.

음식마다 맛이 다르듯 음악도 작품과 연주자의 성격에 따라 다르게 표출된다. 내 음악을 인정하듯이 다른 사람의 음악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1. 문학을 사랑하라

문학과 음악은 분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시는 더욱 그러하다. 음악을 이해하고 명곡들을 수용하는데 있어 문학의 바탕은 엄청난 힘으로 다가온다.

 

  1. 소리에 영혼을 담아라

그저 기계적인 소리, 악보 그대로 옮겨내는 소리는 기교는 있을지언정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힘이 없다.

유능한 음악가는 자신의 소리에, 자신의 악기에 자신의 영혼을 담아낸다. 음악과 악기와 연주자가 하나가 되는 과정을 위해 노력하라.

 

  1. 자연과 사물에서 음악을 찾아라

음악은 악보만 보고 연주하는 것이 아니다. 늘 생활하면서 눈에 들어오는 모든 자연과 사물에서도 음악을 떠올려야 한다. 항상 음악과 결부지어 생활하라. 음악에 빠져 살아라.

 

  1. 나에게 스스로 최면을 걸어라

음악가의 길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힘든 상황에 처할 때마다 잘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최면을 자신에게 걸어라. 그것은 자신에게 커다란 용기와 자부심을 주게 된다.

내가 힘든 유학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것도 나 자신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 자신의 최면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1. 진정한 예술가가 되어라

가정을 지키는 예술가가 진정한 예술가이다. 예술가는 개성적이고 낭만적이어서 진부한 삶의 틀을 파괴하는 것을 특권이자 미덕으로 생각하는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자신의 주위, 자신이 속해있는 울타리를 지켜나가며 자연의 섭리와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음악가가 진정 위대한 예술가이다.

 

Previous article무용인 조흥동 어머니 김음성 여사
Next article국악인 정순임 어머니 장순애 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