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인 신수정 어머니 김석태 여사

 ‘최선을 다하라, 남의 장점을 찾아라, 선생님께 감사하라’ 가르친 언제나 고우신 어머니

이 내용은 <코리아 타운> 김태선 발행인이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재직 당시 한국 정부와 함께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 역대 수상자 15명의 자식 사랑 이야기를 묶어 단행본으로 펴낸 것입니다.

자녀 예술가들이 어머니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는 1인칭 서술기법을 사용한 이 책은 단행본 사상 최초로 사진을 곁들인 잡지식 편집기법을 도입, 독자들로부터 높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제 7년여의 세월이 흘렀지만 본란에서는 당시의 내용을 가감 없이 그대로 수록, 성공한 예술가 자녀를 키워낸 장한 어머니의 사랑 이야기가 우리 교민사회에 타산지석의 효과를 가져오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멀쩡한 옷 놔두고 옷은 왜 사?

어머니는 지금도 우리가 입던 옷을 아무렇게나 입는 것이 편하다고 말씀하신다. 예쁘게 꾸미고 치장하는 일이 도통 체질에 맞지를 않는 모양이시다.

젊었을 때 사진을 보면 꽤 미인이셨고 지금도 “고우시다”는 소리를 들으시는데도 어머니는 젊어서나 지금이나 매 한가지로 그냥 그렇게 아무렇게나 옷을 입으신다.

다 자란 자식들이 “좋은 옷 한 벌 해드리겠다”고 말이라도 꺼낼라치면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손을 내저으신다. “멀쩡히 성한 옷을 놔두고 왜 옷을 사느냐?”며.

그 시절 이 땅에 태어난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그러하셨듯이 나의 어머니 김석태 여사도 평생을 그렇게 허리띠를 졸라매며 자식들 뒷바라지 하시느라 여자로서의 욕심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살아오셨다.

그리고 자식 잘 되는 일이 마치 당신 일인 양 여기며 지금껏 그렇게 사는 것을 가장 큰 낙으로 삼고 계신 분이다.

조금이라도 당신을 위한 삶을 사셨다면 지금의 자식들 마음이 조금은 편했을텐데…. 그러나 그게 어머니의 타고난 성품이니 이제 와서 바꿀 수도 없는 노릇, 그저 어머니 편하신 대로 어머니 즐거우신 대로 곁에 있는 수밖에.

어머니는 무남독녀 외동딸로 자라셨다. 형제 없이 자란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끼리 싸우기라도 하면 늘 “이해가 안 간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넉넉한 집안의 외동딸이시라 우리 외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온갖 정성을 쏟으며 키우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당시 청주에서는 단 하나뿐인 보통학교 여자반에 입학하셨는데, 반 아이들이 대부분 나이가 많아서 엎혀 다니는 등 애기 취급을 당하기도 하셨다지만 꽤 공부를 잘 하셨다고 한다.

그 당시는 모두 ‘책보’를 들고 다녔는데 어머니만은 유일하게 예쁘게 수놓은 우단 가방을 메고 다니셨고, 외할머니는 매일 보약을 달여 학교까지 가져다 주시는 것으로 유명하셨다고 한다.

 

스파르타식으로 우리를 기르시고…

무척 여름을 타서 과일로만 지내는 어머니를 위해 찬 우물물에 수박을 담가 두었다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주시곤 하셨는데 지금도 어머니는 그때의 수박 맛을 그리워 하신다.

여학교를 거쳐 어머니는 경성여자사범학교(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의 전신)에 진학하셨고, 졸업 후 교편을 잡으셨는데, 그 곳에서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셨다.

결혼 후 어머니는 자식들을 키우시면서 성격이 많이 변하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책 읽기를 무척 좋아하셔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죄와 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의 세계문학전집을 탐독하셨는데 나에게 젖을 먹이실 때에도 책을 들고 계셨다고 한다.

지금도 그 읽으신 책 내용 얘기를 하실 때면 목소리가 높아지고 눈동자도 더욱 반짝이시는 어머니는 슬픈 이야기에 금세 눈물을 흘리는 감수성이 풍부한 분이셨는데, 차츰 생활력이 강하고 현실적인 어머니의 모습으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어머니는 집안 살림에 교사 생활까지도 충실하게 해야 했으며 늘 쉴 틈이 없이 바쁘셨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는 외할머니가 우리를 돌봐주셨는데, 어머니는 그렇게 바쁜 중에도 카스테라와 도너츠 등 간식을 만들어주곤 하셨다.

우리들을 일일이 챙길 여유가 없으셨던 어머니는 스파르타식으로 우리를 기르신 것 같다. 새벽이면 어머니는 종을 쳐서 우리를 일찍 일어나게 하셨다. 찬 물에 세수를 한 우리는 마당에서 체조를 하고 아침 일찍 공부를 한 다음 학교로 향했다.

거기에 내게는 피아노 연습까지 보태졌으니 나의 가장 큰 소원은 ‘아침에 잠 한 번 실컷 자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록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이 너무 힘들고 짜증스럽기도 했지만, 우리 형제들 모두 공부로 어머니의 속을 썩이지는 않았다.

 

음악과 책 통해 감수성 길러주는 교육

어머니는 그 점이 늘 고맙고 대견했다고 지금도 곧잘 말씀하신다. 어머니의 잔소리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났던 어릴 때의 습관이 내게는 큰 도움이 됐지만 아무리 부지런을 떨어도 어머니의 부지런함 만큼은 지금도 따라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내가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것은 여섯 살쯤이었다. 당시 시골에는 학교에 조차도 피아노가 없는 곳이 많아 나는 이곳, 저곳을 다니며 피아노를 얻어 칠 수밖에 없었는데 마침 아버지가 교장선생님으로 계시던 중학교 안에 낡은 피아노가 한 대 있어 그 곳에서 피아노를 칠 수 있었다.

피아노조차 구경하기 힘들던 시절 어머니께서 애써 내게 피아노를 배우게 했던 것은 나를 피아니스트로 키우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학교 선생님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일찍부터 아이들에게 음악이며 책을 통해 감수성을 길러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아셨고, 또 한편으로는 당신 학창 시절의 서러움을 내 피아노 공부에 풀고자 했던 심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학창시절 충청북도에는 여성 중등교육을 위한 학교라고는 일본인 여학교 한 곳 뿐이었기에 어머니는 일본 학생들 틈에 끼어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학교 피아노는 일본 학생들에게는 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지만, 한국 학생들에게는 피아노 칠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다는데 어머니는 늘 그 서러움이 사무치곤 했다고 한다.

막내 동생이 태어난 50년 6월 23일 이틀 후 6.25전쟁이 터졌다. 아버지는 공산군을 피해 친구들과 남하 하시고, 산후 회복도 제대로 못한 어머니는 어린 우리를 데리고 피난을 떠나야 했는데 멀리 가지를 못하고 가까운 곳으로 간 곳이 격전지 한 가운데였다.

 

설날이든 추석날이든 30분씩은 피아노 앞에

폭격 소리에 귀를 막고 이불을 쓰고 떨던 기억이 아직도 내게는 생생하다. 그런 와중에도 어머니는 우리에게 ‘소공녀’ 이야기며 재미있는 얘기들을 창작하셔서 공포에 떠는 우리의 마음을 달래주셨다. 그런 격전 속에서도 우리 식구들이 상처하나 없이 무사했던 것에 새삼 감사할 뿐이다.

피난을 떠나기 전 어머니는 무엇보다도 책들을 소중히 마루 밑에 감추고 떠나셨는데 그 아이디어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언뜻 떠올리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어떠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자기 중심을 지키며 침착하게 살아오셨다. 우리가 살고 있던 청주는 문화도시로 알려져 있었고, 6.25 당시 유명한 교수님들이 내려오셔서 연주회를 가지곤 했다.

그 분들이 내 피아노 연주를 들으시고는 “재능이 있는 것 같다”고 하시며 정식으로 피아노 레슨을 받을 것을 권하셨다.

어머니는 대구에 피난 가 계신 이애내 선생님을 소개받아 찾아 뵈었고 선생님은 선뜻 나를 받아 주셨다. 당시 청주에서 대구까지 가는 길은 기차 지붕에 까지 사람이 타고 다니던 시절이어서 고생이 무척 됐지만 그 고생을 무릅쓰고 대구까지 피아노 레슨을 받으러 다녔다.

선생님은 기초가 더욱 단단해야 한다며 내게 훈련을 시키셨는데, 나를 무척 예뻐하셨고 어머니도 선생님을 하늘 같이 존경하셨다.

어머니는 시골 닭을 잡아다 드리기도 하고 편찮으신 선생님 시중과 더불어 얘기 동무도 되어 주시기도 했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우리의 갈 길을 열어주시기는 했지만 무엇이든 강요하지는 않으셨다. 다만 나에게는 설날이든 추석날이든 단 30분씩이라도 피아노 앞에 앉아 있게 해 피아노 연습을 쉬지 않도록 배려하셨다.

 

서울예고에 장학금 1억 원 은밀히 기부

지금 화가로 활동하고 있는 여동생도 나와 함께 피아노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동생은 미술에 조예가 깊으셨던 아버지를 닮아 피아노 보다는 미술에 더 관심을 보였다.

부모님은 청주에 오신 화가 정창섭 선생님께 동생의 그림 지도를 부탁하셨고, 동생은 온갖 대회에서 특선을 한 후 열살 때 서울 올라와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동생은 이경성, 이응로 선생님들로 부터 격찬을 받았다.

나도 ‘이화 경향콩쿨’에 입상하고 서울에서 모짜르트 협주곡으로 데뷔를 해, 우리 자매는 ‘천재 자매 상경’이라는 기사로 주요 일간지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나는 여섯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시골이라 유치원이 없어 어머니가 근무하시던 학교에 함께 데리고 갔는데, 큰 아이들한테 좀 치이기는 했지만 공부를 곧잘 해 별 어려움 없이 진학했던 것이다.

중학교를 마치고 나는 당시 서울예고 신봉조 교장선생님과 임원식 교감선생님이 장학금을 주선하시며 적극적으로 추천하시어 서울예고에 입학했다.

그해 동생 수희는 이화여중 1학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는데 우리 자매는 장학금은 물론, 1등 성적 학생에게 주는 상금도 받아 이화재단과 예고재단에서 큰 은혜를 입었다.

어머니는 항상 그 고마움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슴에 늘 간직하고 계시다가 자녀 교육이 모두 끝난 다음에도 계속 검소한 생활을 신조로 평생을 살아 오셨다.

또 내가 받은 급료 등을 모아 두었다가 1억원을 서울예고에 장학금으로 기부하셨는데, 이같은 일이 신문 등에 발표 되는 것을 질색하신 어머니는 은밀히 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 하셨다.

우리 자매가 서울예고, 이화여중에 입학하게 됐던 그때에 우리 가족 모두는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서울 이사는 전적으로 어머님의 의지에서였다.

 

콩쿨, 연주로 학교 못가면 어머니가 직접 가르쳐

옛날 양반 선비이신 아버지는 서예가로 일본에까지 명성이 있었고 문교부의 서예 교과서도 쓰셨던 분이다.

워낙 책 읽고 그림 그리고 글씨 쓸 수 있는 조용한 시골 생활을 좋아하셔서 번잡한 서울을 질색하셨지만 어머니의 끈질긴 설득으로 서울행에 동의하시고 우리 모두 서울로 이사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자식들 교육에만 힘을 기울이셨지만, 차츰 서울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다시 장충유치원을 시작하셨다. 어머니는 사치나 유행과는 철저하게 담을 쌓으시고 근면과 검소를 신조로 삼아오신 분이셨다.

어머니는 늘 “겉 보다는 속이 가득 차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음식도 ‘맛 보다는 영양’이 중요하다며 우리에게 시금치, 당근 등을 삶아 주시곤 하셨다.

우리가 아주 어릴 때부터 손수 뜨개질을 해서 입히셨는데, 우리가 자라 옷이 작아지면 뜨개질 한 옷을 풀어 다시 떠 입히고는 했다. 조각조각 남는 실을 엮어 뜰 때도 많아 색깔이 제대로 맞지 않는 옷을 떠주시기도 했는데 어린 마음에는 그 옷 입기가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남들 운동화 신을 때 고무신을 신고 학교에 다녔고 가방도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주신 헝겊으로 된 것을 들고 다녔다. 그러나 나는 우리 집이 가난하다고 여긴 적도 없었고 그것 때문에 속상해 한 적도 없었다.

오히려 우리 집에는 다른 친구 집에서는 볼 수 없는 갖가지 책들이 너무도 많았기에 자부심을 느꼈다. 어머니는 학습에 필요한 자료며 책 등은 아낌없이 사 주셨고, 학교에서 숙제를 내주면 일본 백과사전을 꺼내 직접 번역해 도와주셨으니 남들보다 알찬 숙제를 낼 수 있었다.

나는 그 점이 늘 자랑스러웠다. 내가 피아노 콩쿨이나 연주로 어쩔 수 없이 학교 수업을 빠지는 일이 가끔 있었는데, 그때마다 어머니가 직접 수학을 가르쳐주시고, 글짓기도 지도해주신 덕분에 성적은 뒤지지 않았다.

 

교육에 남다른 열성, 치맛바람은 질색

어머니의 정성덕에 우리 형제들은 어릴 때부터 공부를 꽤 잘해 1등을 자주 하곤 했으나 어머니는 1등 했다고 칭찬하기 보다는 “결과 보다는 과정이 중요한 일이다. 최선을 다 했느냐?”고 물으시며 또 “절대 교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어머니는 “최선을 다하라, 남의 장점을 찾아라, 선생님께 감사하라”는 교훈을 써서 벽에 붙이시고 이를 늘 강조하셨다.

학교 근무를 하셔야 했던 어머니는 이른 아침과 저녁 시간밖에는 우리와 같이 할 시간이 없으셨다. 그래서 아침에는 지시, 저녁에는 체크로 우리를 챙기셨는데 매일 일기를 쓰게 하시고 또 그래프를 만들어 벽에 붙이시고 그날 그날 해야 할 일들을 제대로 했는지 ○, ×를 해가며 반성하도록 하셨다.

하루는 바깥에서 놀고 있는데 동생을 부르시더니 다짜고짜 종아리를 때리셨다. 어머니와 약속한 ×의 수가 넘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어머니는 사랑보다 엄격함을 앞세워 우리를 키우면서도 책 읽기를 통해 감수성을 길러주려고 무척 노력하셨다.

우리 형제들은 그런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리려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 잡지를 만들어 보여 드리기도 했다. 어머니는 내가 피아노 콩쿨에라도 나갈 때면 집안 가족들 모두에게 총 비상령을 내리고 내가 편한 마음으로 피아노 연습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

때문에 동생들은 시험 기간 중이라도 내 시끄러운 피아노 소리 속에서 공부를 해야 했다. 어머니께서 나를 위해 명동성당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정성껏 기도 드리는 모습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 있다.

어머니는 교육에 남다른 열성을 보였지만 치맛바람 같은 것은 질색을 하신 분이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학부모들끼리 모이는 모임에도 가급적이면 빠지려 하셨다.

 

여든이 다 되신 요즘에도 내 걱정을…

그런 어머니는 항시 진지하면서도 이성적인 분이었다. 작고하신 신봉조 교장선생님은 그런 어머니를 믿으시고 가끔 학교 문제도 어머니께 상의하러 오시기도 하셨다.

학교 피아노를 치다가 내 피아노를 갖게 된 것은 중학교 때였다. 6.25전쟁 때 버려진 속 없는 피아노를 구해 야마하 액숀을 사서 서울 을지로의 한 악기점에서 조립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추운 아침에 일어나 학교까지 가지 않고 방에서 피아노를 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토록 기쁠 수가 없었다. 그 후 서울로 올라오면서 나는 신품 야마하 피아노를 가질 수 있었다.

서울대 음대를 졸업한 여름 나는 곧 바로 오스트리아 카톨릭부인회 장학금으로 비엔나로 유학을 떠났다. 어머니는 내 앞에서는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으셨는데 내가 떠난 뒤 무척 우셨다고 한다.

그때는 한 번 유학을 가면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는 고국 땅을 밟는 것도 전화하는 것도 상상할 수가 없는 시절이었다. 내가 비엔나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는 2주일 뒤에야 받아 보셨다고 하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어머니는 내게 너무도 특별한 존재이시다. 자식에게 특별하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고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피아노를 처음으로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어머니의 힘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내 모습은 없었을 것이다.

부모님의 정성과 사랑 덕에 현재 여동생은 서울미대를 나와 화가로 활동하고 있고 오빠는 서울산업대 교수, 남동생은 연세대 상경대 교수로 있으며 막내 동생은 미국 메이요크리닉 신경내과 의사로 있다.

우리 형제들의 지금이 있기까지는 어머니의 철저한 정성과 노력이 숨어 있기에 가능했다. 요즘에도 여든이 다 되신 어머니가 거꾸로 내게 전화를 하셔서 내 걱정을 하신다.

한 번은 내가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나와 함께 주무시며 일일이 시중을 들어 주셨다. 어머니는 당신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자식 일만큼은 당신이 해결하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는 그런 분이시다.

 

단순한 의미의 규칙 아닌 ‘사랑의 표현’

이제는 조금 편히 쉬실 때도 됐다 싶어 어머니가 조용하고 편안한 노년을 보내시기를 바라지만 어머니는 그 조그마한 몸으로 우리보다 더 바쁘게 움직이신다. 여전히 자식들을 당신 손으로 일일이 챙기고 유치원 활동까지 하고 계시니 말이다.

어머니는 어린이들을 무척이나 좋아하시며 귀여워 하신다. 우리가 “이제 유치원 활동은 그만 하시고 노년을 편안하게 보내시라”고 하면 어머니는 단호하게 “내가 너희들을 키우며 성공한 노하우와 반성할 점 등을 보완해서 지금의 새싹들에게 좀 더 이상적인 교육을 위한 최후의 봉사를 하는 것이다” 하시며 지금도 서울의 남산 한 기슭에 있는 남산유치원에서 어머니의 꿈을 가꾸고 계신다.

어머니는 미국에 있는 동생을 보러 갔다 오시거나 해외 여행이라도 갔다 오실 때면 당신을 위해 쓰실 물건보다도 유치원 아이들 교육에 필요한 교육 자재들을 먼저 챙기며 사오신다.

어머니는 동물을 무척 사랑하신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가운데서 가장 좋아하는 것도 동물의 세계를 다룬 프로그램들이다. 어머니는 동물을 상대로 함께 하는 시간이 가장 편안하다고 하신다.

특히 요즘 들어 어머니의 가장 큰 즐거움은 강아지를 키우는 일인데, 어머니는 강아지 기를 때도 ‘규칙’에 엄격하려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 다 자란 자식들에게 더 이상 어머니의 사랑을 퍼 부을 수만은 없어서일까?

어머니의 ‘규칙’은 단순한 의미의 규칙이 아니라 ‘사랑의 표현’이었다. 평생을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온 어머니의 삶은 그 시대 어머니들의 사랑 방법이었다.

나는 요즘도 세상 일이 힘들 때면 어릴 적 어머니가 들려 주시던 ‘소공녀’, ‘비밀의 화원’ 같은 동화책을 읽으며 마음의 안식처로 삼는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엄격함 속에 우리를 기르셨던, 아무도 따를 수 없는 어머니의 사랑의 깊이를 다시금 느끼곤 한다.

 

어머니가 주신 변함없는 가르침 일곱 가지

 

  1. 건강 하라

어머니는 다른 무엇보다 건강을 최우선으로 삼으셨다. 음식 하나를 만들더라도 늘 맛보다는 영양을 먼저 생각해 만들어주셨다.

 

  1. 근면하고 검소 하라

어머니는 학교 선생님 역할에, 한 집안의 아내이며 어머니 노릇까지, 1인 3역을 근면과 검소로 해내오신 분이다.

넉넉한 집안의 외동딸로 곱게 자라셨으면서도 늘 검소하게 살아오신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근면과 검소의 중요성을 몸소 실천으로 보이신 분이다.

 

  1. 규칙적인 생활을 하라

어머니는 학교 공부나 다른 일에 있어 늘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교육하셨다. 새벽이면 종을 쳐서 늦잠 자는 우리 형제들을 깨우곤 하셨다.

 

  1. 최선의 협력을 중히 여겨라

어머니는 무슨 일이건 가족간의 협력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내가 어려운 피아노를 칠 수 있었던 것도 가족들의 협력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시끄러운 피아노 소리를 참아가며 공부하던 동생들, 피아노 콩쿨 때가 되면 온 집안이 비상이 걸린 듯 나를 위한 아낌없는 사랑과 배려를 해주셨다.

 

  1. 남의 장점을 칭찬하고 남의 단점을 말하지 말라

사람에게는 누구나 흉이나 허물이 있게 마련이다. 어머니는 지금도 내게 남의 단점에 대해 그를 탓하지 말고 남의 장점을 보고 칭찬하라고 말씀하신다.

 

  1. 감사와 기쁨의 마음을 가져라

어머니는 늘 “현재에 감사하고 작은 일에도 기뻐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자신이 느낀 감사와 기쁨 이상을 다른 사람을 위해 베풀 줄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1. 봉사하며 살아라

어머니는 연로한 나이이심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유치원 원장 선생님으로 일하신다. 당신이 우리에게 교육했던 방식의 장단점을 살려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더 좋은 교육을 시키고자 하는 마음에서이다. 늘 남에게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오신 어머니의 마지막 봉사는 바로 아이들의 교육인 것이다.

 

후배 예술가들에게 주는 조언 일곱 가지

 

  1.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

누구에게나 인생은 단 한번뿐이다. 그런 만큼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최선을 다하며 사랑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

 

  1. 성공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요즘에는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는 이들이 많지만 사실 피아니스트로 세계적인 이름을 떨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만큼 힘들다는 얘기다.

그러나 비록 피아니스트로 재능을 인정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이 그 일이 즐겁고 기쁨이 된다면 열심히 하라고 말하고 싶다. 화려한 스포라이트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1. 탄탄한 기초를 쌓아라

피아노 공부는 기초가 중요하다. 먼저 단단한 기초를 쌓고 그 기초를 그릇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자신을 기르는 것이다.

 

  1. 열심히, 부지런히, 노력하며 살아라

부지런히 노력하는 사람을 따라올 장사는 없다고 한다. 지금 당장 무엇이 내 눈앞에 놓이기를 바라지 말고 열심히, 부지런히, 노력하며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개척해 나가라. 자신의 꿈이 한 발 다가와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 음악을 사랑하라

음악을 사랑하지 않고는 결코 음악인이라 할 수 없다. 누구의 강요가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음악을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이 생길 때 비로소 자신의 음악 세계가 보일 것이다.

 

  1. 좋은 책을 많이 읽어라

책 속에는 음악 공부 이상으로 음악에 도움이 되는 여러 가지 요소 들이 많다. 책을 통해 음악적 감흥을 일깨울 수도 있고, 음악이나 다른 예술 분야를 이해하는데 더 많은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좋은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1. 생활의 규칙을 가져라

지나친 규칙 생활은 다소 피곤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어느 정도 규칙을 정하는 것은 많은 도움이 된다. 음악 공부도 마찬가지이다.

 

연재를 마치고…

이번 호로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 연재를 마칩니다. 많은 분들이 그 동안 총 열 다섯 차례에 걸쳐 소개 된 예술가 어머니들의 자식사랑 이야기를 통해 타산지석의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고 격려 해주셨습니다.

다시 한 번 사랑과 성원에 감사 드리며 더 좋은 이야기로 보답할 것을 약속 드립니다.

지금까지 게재된 열 다섯 편의 이야기들은 코리아 타운 홈페이지 www.koreatown.com.au를 방문하시면 다시 만나실 수 있습니다. 코리아 타운 홈페이지 ‘칼럼게시판’에서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들의 헌신적인 사랑을 다시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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