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인 김영욱 어머니 이현경 여사

음악성이나 기교보다는 인간 됨됨이, 겸손한 생활 강조한 산 스승

이 내용은 <코리아 타운> 김태선 발행인이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재직 당시 한국 정부와 함께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 역대 수상자 15명의 자식 사랑 이야기를 묶어 단행본으로 펴낸 것입니다.

자녀 예술가들이 어머니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는 1인칭 서술기법을 사용한 이 책은 단행본 사상 최초로 사진을 곁들인 잡지식 편집기법을 도입, 독자들로부터 높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제 7년여의 세월이 흘렀지만 본란에서는 당시의 내용을 가감 없이 그대로 수록, 성공한 예술가 자녀를 키워낸 장한 어머니의 사랑 이야기가 우리 교민사회에 타산지석의 효과를 가져오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어머니는 영원히 늙기만 하는 존재인줄 알았는데…

어머니. 세상에 어머니란 이름처럼 푸근하고 정겨운 말이 또 있을까? 아니, 적어도 내게만큼은 어머니라는 부름 자체가 늘 따스한 봄볕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토록 정겹기만 했던 어머니란 부름이 이제는 “어머니!” 하고 가만히 입 속으로 불러 보기만 해도 슬픔이 가득 차 오르고 만다.

나의 어머니 이현경 여사는 지난 1월 24일 새벽 3시, 가족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들과 영원한 이별을 고하셨다. 아흔 한 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셨으니 남들은 “살만큼 사셨다”고들 말하지만, 내게 있어 어머니는 마치 ‘영로당 (永老堂)’이라고 쓰여진 우리 집 현판처럼 영원히 늙기만 하는 존재인줄 알았다.

나의 어머니 이현경 여사는 음악가와 음악을 무척 사랑하신 분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4남 2녀의 자식들 모두에게 어려서부터 음악 교육을 시키셨다.

굳이 연주자를 만들 생각이었다기보다 음악이 아이들의 성장에 좋은 자양분이 되리라고 여기셨던 것이다. 어머니는 유난히 내게 음악 공부를 시키려 애쓰셨는데, 그 정성 덕분에 나는 우리 6남매 가운데 유일하게 음악을 평생의 업으로 삼고 있다.

내가 음악을 시작한 것은 네 살 때부터였다. 어머니 손에 이끌려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 여섯 살 되던 해 바이얼린으로 악기를 바꾸었다.

굳이 바이얼린으로 악기를 바꾼 데에는 별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고, 그 시절 우리 나라에서 그나마 쉽게 접할 수 있었던 악기라고는 피아노와 바이얼린이 고작이었기 때문이었다.

철부지 어린 시절에는 여느 사내아이들이 다 그러하듯 나 역시 꽤나 장난꾸러기였다. 어머니가 바이얼린 연습하라고 하면 놀고 싶은 마음에 자전거를 타고 도망간 일도 있었고, 악보 속에 몰래 만화책을 숨겨 보기도 했다. 또 초등학교 시절에는 연습을 빼먹고 극장에 갔다가 어머니에게 들켜 혼쭐이 난 적도 있었다.

 

‘스승의 조언, 연습 선생님의 지도’ 방식 도입

어머니는 내가 꾀라도 부릴라 치면 어김없이 회초리를 들 정도로 엄하게 교육하셨지만, 그 밑바탕에는 더 큰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아는 까닭에 나는 그런 어머니가 무섭다기 보다는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일부러 떼를 쓴 적도 많았다.

늘 어떻게 하면 연습을 안 할까 잔꾀를 부리는 내가 못미더워서인지 어머니는 밖에 볼일이 있을 때면 꼭 형들에게 나를 지키라고 당부하시고서야 외출을 하시곤 했다.

어머니는 음악 교육에 관한 한 하루 몇 시간씩 정해놓고 내게 연습을 시켰다. 바이얼리니스트 원 경수씨(전 서울시향 상임지휘자) 등 장안의 유명한 선생님들을 모셔다가 매일 세시간 이상 레슨을 받게 했으며, 특히 연습을 지도하는 ‘연습 선생님’을 따로 두고 교육 시키기도 했다.

그 시절 어떻게 그런 교육 방법을 생각해 냈는지 ‘스승의 조언과 연습 선생님의 지도’라는 어머니의 교육 방식은 현재 우리나라 음악 실기 교육의 중요한 시스템으로 자리잡고 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일 무렵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커티스음악학교 교장 루돌프 제르킨 선생님이 우리 나라에 왔다. 그 때 어머니는 그분을 우리 집으로 초대했고, 내 바로 위 덕주 누나와 내게 음악적 재능이 있다며 우리를 필라델피아의 커티스음악학교로 유학시키라고 어머니에게 권유했다.

그러나 아무리 교육열이 높은 어머니셨지만 어린 나를 머나 먼 이국 땅으로 유학 보내기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내색은 안 하셨지만 어머니는 그 일로 무척 고민하셨고 내가 중학교 1학년이 돼서야 마침내 유학을 보내기로 마음을 굳히셨다.

고작 열세 살이던 어린 나를 외국으로 유학 보내는 어머니의 심정이 오죽했을까? 그러나 어머니는 신 사고를 가진 분이셨다.

그 시절 우리 나라 교육 환경이야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아는 바이겠고, 어머니는 더 나은 교육을 위해 자식을 자신의 품에서 떼어 놓는 아픔을 감내하시기로 결심하셨던 것이다.

 

“나서지 말고 겸손 하라, 낭비하지 말라”

생각해보면 나는 그때 이미 어머니의 커다란 사랑을 확인한 셈이다. 어린 내가 많이 걱정 됐을 텐데도 나를 믿고 보내주셨으니 말이다. 만일 내가 그 입장이었다면 나는 도저히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큰 형과 둘째 형은 미국 의과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중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덕주 누나와 유학 길에 올랐다.

어머니의 엄한 교육 방식 탓이었던지 유학을 떠나면서도 나는 어머니와의 헤어짐을 슬퍼하기 보다는 그저 “이젠 해방이구나!” 하는 생각이 앞서 마냥 즐겁기만 했다.

그리고 그렇게 유학을 떠나면서도 나는 내가 음악가로서의 길을 걷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나는 커티스음악학교에서 공부했다. 유학 가 있는 동안 어머니는 내게 자주 편지를 띄웠다. 어머니의 편지에는 언제나 “앞에 나서지 말고 겸손해라. 낭비하지 말아라” 등의 당부의 말이 가득 적혀 있었다.

그러나 굳이 편지가 아니더라도 어머니는 늘 내 마음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나는 어머니와 함께 있는 것과 진배 없었다. 그리고 마음속 깊이 간직한 어머니 모습은 내가 오랜 세월 미국 생활을 해나가는데 도덕적인 기준이 되어 주었다.

나는 62년 유진 오먼디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협연해 열 다섯 살에 국제 무대에 데뷔했다. 그러면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많은 연주회를 가졌고 점차 이름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어머니는 막내인 나를 연주자로 키운 것에 대해 두고 두고 후회하시는 듯했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 만큼은 양보가 없던 어머니였지만 쉰 살이 넘도록 해외를 돌아다니며 연주 생활을 하는 내가 안쓰러웠던지 늘 “미안하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본래 예술이란 분야가 평생을 바쳐도 늘 부족하게 여겨지게 마련이어서 쉼 없이 연습해도 언제나 갈증을 느끼곤 하는 내 모습에 어머니는 늘 마음 한 구석이 편치 않으셨던 것이다.

어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고개를 가로저으시며 “다 내 잘못이다. 내 잘못이야!”라고 한탄하시곤 했다. 그때면 나는 우스갯 소리로 어머니 말씀에 맞장구를 치곤 했다. “맞아요. 다 어머니 잘못이에요!”

 

객석 맨 앞자리에 앉아 묵묵히 아들의 연주를…

그러나 사실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내게 곧잘 묻곤 한다. “다시 태어나도 또 다시 음악가가 될 것 같은가?”라고.

나는 그때면 늘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아리송한 대답을 하곤 한다. 왜냐하면 다시 태어났을 때 지금의 우리 어머니 같은 사람을 못 만날 수도 있는 까닭에서다.

그만큼 음악은 조기 교육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철부지 어린애가 음악이 뭐 그리 좋다고 고된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야 하는 연주자의 길을 스스로 택하겠는가 말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가들을 보더라도 그 뒷자리에는 늘 부모의 지극한 정성이 함께 자리하고 있지 않은가. 나 또한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음악 세례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음악가로서의 삶을 살아가는데 대해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릴 때는 그저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바이얼린을 배웠지만 20대가 되자 문득 “내가 바이얼린을 왜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워낙 어려서부터 해온 바이얼린 연주는 이미 내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 버렸다. 만약 내가 음악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나와는 또 다른 모습의 사람이 됐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어머니는 앞에 나서지는 않으시면서도 내가 음악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세세한 부분에까지 마음을 쓰시며 내 뒷바라지를 하셨다.

굳이 내가 동행하지 않더라도 외국의 저명 음악가들이 내한하면 집으로 초대해 손수 만든 궁중 한식을 대접하셨고, 내 귀국 연주회가 있는 날이면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객석 맨 앞자리에 앉아 묵묵히 아들의 연주를 들으셨다.

 

음악성, 기교보다 인간 됨됨이 더 강조

어머니는 당시 우리 나라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숙명여고를 졸업하시고 초등학교에서 교편 생활을 하셨다. 그러다가 스물 세 살 되던 해 동갑내기인 아버지와 결혼하셨다.

아버지와 어떻게 만나 결혼하시게 되었는지는 대부분의 옛 어른들이 그러하듯 통 말씀이 없으셔서 잘 모르지만, 간간이 아버지 말씀을 내비치는 어머니 얘기로 미루어 볼 때 틀림없이 연애 결혼을 하셨던 듯싶다.

나의 아버지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주치의셨다. 보수성이 강한 집안에서 자란 분이어서 자식을 음악가로 키운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분이셨다.

그래서인지 어머니가 내게 음악 공부를 시키고 유학을 보냈을 때도 내가 진짜 음악가로서의 삶을 살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셨나 보다. 후에 내가 음악에 본격적인 발을 들여 놓는 모습을 보며 아버지는 무척 놀라고 당황하셨다.

어머니는 지극히 여성적이면서도 강하고 지혜로운 분이셨다. 아버지를 받드는 내조자로서도 빈틈이 없는 분이셨고 늘 밝은 미소를 잊지 않고 생활하신 분이었다.

그러나 왜 그런지 나는 어머니를 떠올릴 때면 어머니의 근심 어린 표정이 더 먼저 생각난다. 여섯 형제를 키우시느라 어머니의 마음 속에는 늘 근심이 떠나질 않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까닭이다.

그만큼 어머니는 자녀들에 대해 꿈이 큰 분이셨다. 그것은 세속적인 성공이 아니라 인품이 뛰어난 자녀로 키워 내고 싶었던 바램이었다. 내게 음악성이나 기교를 가르치는 일에는 개방적이었지만, 인간 됨됨이를 더 먼저 따지며 교육하셨다.

특히 서양 음악을 전공하는 시야가 넓은 국제적인 인물로 키우면서도 한국 정신을 잃지 않도록 힘을 기울이셨다. 또한 우리들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방향은 일러주되 간섭하거나 참견하지는 않으셨다.

어머니는 “진정한 교육은 개인의 개성을 최대한 발현시키는 것이다”라며 엄격한 가운데에서도 우리 남매의 자유 의지를 중히 여기셨다.

 

음식 만들기, 사람 부르기 즐기셨던 분

어머니의 지극한 교육 덕에 큰형은 미국 UC버클리대 교수이고 둘째 형은 미국 미네소타대 교수, 셋째 형은 우리나라 법률회사 김&장 대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누나 둘은 피아노 공부를 시켰는데, 막내 누나 덕주는 한때 피아니스트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도 했다. 다들 남부럽지 않은 자기 일을 하고 있으니 남들은 “자식 농사 잘 지었다”고 하지만, 이런 세속적인 성공의 잣대 말고도 우리6남매는 “어머니의 바람 대로 바르게 살고 있다”고 감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어머니는 헌신적으로 자식 뒷바라지를 하시면서도 자식들에게 대접받는 것은 원치 않으셨고 그저 자식 잘 되기만을 바라셨다.

한편, 어머니의 ‘노력하는 삶’은 우리 남매들에게 늘 귀감이 됐다. 자식들이 모두 두 세 살 터울이라서 키우기도 무척 벅찼을텐데, 그런 와중에도 궁중요리나 예법, 한국 고서화 등을 배우면서 당신의 능력 계발에도 열심이셨다.

특히 어머니는 음식을 잘 만드셨고, 음식 만드는 일을 즐기셨는데 그래서인지 우리 집은 늘 저녁 식사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또 내 연주회가 끝나면 집으로 친구들을 불러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큰 즐거움으로 여기셨다.

하지만 말이 쉬워 음식 만들기가 즐겁다 하지 번번이 그 많은 손님들을 초대해 손수 음식 장만을 하시고 뒷 설거지까지 해야 하는 일이 어디 보통 일이던가. 그래도 나는 어머니의 표정에서 힘든 내색 한 번 보지 못했다.

저녁 식탁에 온 가족이 함께 둘러 앉아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맛난 음식을 먹으며 왁자지껄 떠들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것이 어린 시절 내게는 가장 즐거운 시간이기도 했다.

더구나 너무 일찍 어머니 품을 떠나 타지에서 살아서인지 내가 늘 그리워하던 것은 어머니의 손맛과 가족들과 함께 왁자지껄 저녁 식사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나는 손수 장을 보고 음식 만들어 먹는 것을 큰 즐거움으로 여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이 음식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가지게 한 듯싶다.

 

어머니의 정갈한 궁중음식에 모두들 ‘원더풀’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 후 50여 년 동안 서울 운니동에 있는 옛 한옥집에서 사셨다. 아버지가 50여 년 전에 구입한 이 집은 흥선 대원군의 사재 운현궁의 별채로 조선말기 건축 양식이 그대로 살아 있는데 지금은 전통 보존 가옥으로 지정돼 있다.

내가 한 살 때 이 집에 이사 왔으니 내게는 고향 같은, 어머니 품 같은 집이다. 어머니는 이 집을 당신 몸 가꾸듯이 늘 쓸고 닦으며 본 모습 그대로 지키려고 애쓰셨다. 어머니는 특히 꽃과 나무를 좋아하셔서 정원 가꾸는 일에 정성을 쏟으셨다. 나도 국내 연주회가 있을 때면 꼭 이 고옥에 머물며 어머니 곁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곤 했다.

아버지의 성격이 조용하고 밖으로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던 반면 어머니는 화통한 성격에 사교적인 분이셨다.

한일합방 후 왕족들이 머물던 이왕직 (李王稷)에서 궁중 생활을 접했던 어머니는 뛰어난 민간 외교관이기도 했다. 레너드 번스타인 등 외국 음악가와 형님이 하는 김&장 법률사무소의 해외 고객들이 찾아올 때면 늘 그 손맛을 발휘하시어 궁중 음식 등을 내놓고는 하셨는데 그들 모두 고택의 운치와 어머니의 정갈한 음식 솜씨에 매료되어 ‘원더풀’을 연발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언제 어디서건 자기 이름을 앞장서 자랑하고 내세우는 법이 없으셨고, 그런 까닭에 그 동안 사회 여러 곳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어머니에게 여러 가지 상을 드리고자 했지만 번번히 사양하셨다.

어머니는 뇌졸중으로 쓰러지시던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여든 두 살의 노인답지 않게 단아하고 고운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계셨다.

기억력과 의지에 있어서는 여느 젊은이 못지 않으셨는데, 고령에도 불구하고 늘 책을 가까이 하셨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영어를 배우기 시작해 외국인들과도 자유롭게 대화하고 영어 소설을 읽을 정도였다.

 

어머니와 ‘제인에어’ 그리고 뇌졸중

어머니의 머리 맡에는 늘 영어 소설이 놓여져 있었는데, 6년전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시던 날의 풍경이 지금도 내 기억 속에는 또렷이 남아 있다.

그때 나는 한국에 와 있었는데 새벽 두시쯤 됐을 때였다. 어머니 방에서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들려와 깜짝 놀라 달려가보니 어머니는 쓰러져 계셨고, 어머니 머리 맡에는 잠들기 전에 읽으셨던 영어 원서로 된 소설책 ‘제인에어’가 놓여져 있는 게 아닌가.

그 연세쯤 되면 모든게 귀찮아지기도 할법한데 어머니는 언제나 시간을 아끼며 그렇게 살아오셨다. 자식 교육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게도 그토록 엄격함을 가지고 살아가셨던 분이셨던 게다.

어머니는 중풍으로 7년간 누워 계셨다. 긴 세월을 그렇게 누워만 계셨으니 엉덩이 뼈에 이상이 생겼고 작년 12월 병원에 입원하셨다. 당시 나는 한국에 와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가족들과 보내고 파리로 돌아갔는데 그때만 해도 단지 엉덩이뼈에 이상이 생겼을뿐 별 문제될게 없어 보였다.

며칠 뒤에는 퇴원하시리라 여겼는데 오랜 병치레 끝에 면역력이 떨어진 어머니는 병원에서 감기에 걸려 어처구니 없게 돌아가시고만 것이다.

어머니가 타계하시기 이주일 전이었다. 나는 연주차 암스텔담에 머물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전화가 왔다.

당시 스위스, 독일, 프랑스, 스페인 등지에서 잡혀 있던 연주회 일정이 빡빡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고민도 잠시뿐, 그 어떤 중요한 것도 어머니보다 앞설 수는 없었다.

1월 중에 잡혀 있던 연주회 14건을 모두 취소하고 허겁지겁 어머니께로 달려갔다. 내가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비록 의식은 없었지만 마지막 생의 끝자락을 놓지 않으시려는 듯, 아니 막내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고 떠나시려는 듯 가는 숨을 힘겹게 내쉬며 계셨다.

 

자식에게 들어오면 더 커지는 어머니의 힘

그런 상태로 일주일을 보내시다가 어머니는 끝내 눈을 감고야 마셨다. 어머니가 눈을 감기 전 일주일 동안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어머니의 병상을 지켰다. 이 나이가 돼서도 어머니라 부를 수 있는 분이 계시는 게 그토록 행복한 줄 그제서야 깨달았다.

어머니는 내가 한국에 오면 나를 가슴에 안고 “아이구, 니가 내 아들이냐?” 하고 묻곤 하셨다. 그러면 나는 큰 소리로 “네, 제가 어머니 아들입니다!” 하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열 세 살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늘 어머니 품에서 잠들곤 하던 내가 어느덧 다 자라 어른이 된 모습에 어머니는 여간 흐뭇해 하시지 않았다. “어린 것이 엄마 품에서 떠나 혼자 살면서도 잘 자라줬다”며 무척 자랑스러워 하셨고, 내 연주회 전날에는 한잠도 못 주무시고 초조해할 정도로 나를 끔찍이 생각하셨다.

나는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씩은 어머니에게 안부 전화를 드렸지만, 연주회 때문에 늘 어머니와 멀리 떨어져 있어 안타깝고 죄스럽기마저 했는데 그렇게라도 마지막을 지켜드리고 나니 마음이 좀 풀린다.

93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이미 호흡이 다 끊기신 뒤에야 한국에 도착했다. 억장이 무너진다는 이야기가 바로 이럴 때를 두고 하는 이야기구나 싶었다. 가슴이 미어졌고 아버지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내 자신이 몹시 원망스러웠다. 그때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는 꼭 곁에서 지켜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영어로 “See You Soon!”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나셨다. 우리는 어머니를 경기도 파주 선산에 모셨다. 어머니가 50여 년을 지켜오던 운니동 고택은 아직도 어머니의 온기가 남아 있는 듯해 더욱 적막하고 쓸쓸하게만 느껴진다.

내게는 어머니가 큰 스승이자 버팀목이었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어머니의 빈 자리가 더 그리워진다. 혹여 연습을 게을리 할라치면 지금도 귓전에서 어머니가 야단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제 비록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여전히 내 곁에는 어머니가 살아 계신 것만 같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그러하겠지만 어머니의 힘이 자식에게 들어오면 더 큰 힘으로 되살아나는가 보다. 아직은 그 힘이 무언지 잘 모르겠지만.

 

어머니가 주신 변함없는 가르침 일곱 가지

 

  1. 앞에 나서지 말고 겸손 하라

어머니는 초등학교에서 교편 생활을 하셨고, 다양한 분야에 걸쳐 지식이 매우 풍부한 분이셨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항상 겸손하게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고 함부로 나서는 경우가 없으셨다.

 

  1. 낭비하지 말라

비교적 풍요로운 삶을 사신 어머니는 어떠한 경우에도 필요 이상의 것을 쓰거나 낭비하는 일이 없으셨다. 우리에게도 늘 “작은 것부터 아끼는 마음을 길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1. 끊임없이 자기 계발을 위해 노력하라

어머니의 ‘노력하는 삶’은 우리 남매들에게 늘 귀감이 됐다. 어머니는 바쁜 와중에도 궁중요리, 예법, 한국 고서화 등을 배우면서 당신의 능력 계발에도 열심이셨다.

 

  1. 정직하게 살아라

어머니는 우리에게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솔직하고 거짓이 없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별 것 아닌 듯싶은 작은 일을 속이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는 말씀이셨다.

 

  1.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

나에게 없는 것,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을 남에게 요구하는 것은 엄연히 폐를 기치는 것이므로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어머니의 생각이었다.

 

  1. 무슨 일이건 열심히 하라

어머니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늘 책을 가까이 하셨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영어를 배우기 시작해 외국인들과 자유롭게 대화도 하시고 영어소설도 읽으셨다.

그 연세쯤 되면 모든 게 귀찮아지기도 할텐데 어머니는 언제나 시간을 아끼며 그렇게 살아오셨다. 자식 교육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엄격함을 가지고 살아가셨던 분이었다.

 

  1. 자신의 삶은 결국 스스로가 개척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그 시절 어떻게 생각해냈는지 ‘스승의 조언과 연습 선생님의 지도’라는 교육방식을 도입하셨다. 아울러 좋은 선생님들이 늘 곁에 계실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자발적인 계획에 의해 끊임 없는 연습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하셨고, 중학교 1학년 때는 이 같은 뜻에서 나의 유학을 결심하셨다.

 

후배 예술가들에게 주는 조언 일곱 가지

 

  1. 음악도 자기 자신이 원해서 해야 한다

요즘 음악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면 부모가 원해서 마지 못해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결코 행복한 인생일 수가 없다. 무슨 일이건 자기 자신이 원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즐겁고 의미가 있는 법이다.

 

  1. 진정으로 음악을 사랑하라

제 아무리 힘든 시련이 있어도, 슬럼프에 빠져도 음악이 내 인생에 얼마나 소중한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한다면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음악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와 사랑이 필요하다.

 

  1. 끊임없이 노력하라

제 아무리 음악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다 하더라도 꾸준한 노력 없이는 무용지물일 따름이다. 끊임없는 노력이야 말로 예술인이 갖추어야 할 필수 조건이다.

 

  1. 생활의 중심을 가져라

언제 어디에서건 생활의 중심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방탕한 생활 속에서 훌륭한 연주자가 만들어질 수는 없는 법이다.

 

  1. 음악을 생활화 하라

무슨 공연이나 연습 시간이 아니더라도 음악과 늘 가까이 하면서 생활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활 속에 음악이, 음악 속에 생활이 묻어나는 연주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1. 좋은 스승을 만나라

연주자는 특히 1대 1 교습이 많다. 혼자서 꾸준한 연습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스승을 만나 훌륭한 가르침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1. 다른 사람의 곡도 많이 들어라

자신의 곡을 자주 듣고 분석하고 열심히 연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되면 자칫 고립된 연주자가 될 수 있다.

남의 곡을 자주 듣는 습관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남의 곡을 듣고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장점을 배우고 단점은 버릴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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