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인 박정자 어머니 김진옥 여사

 ‘자식이 원하는 일 허락하는 게 부모의 가장 큰 사랑’이라 믿어

이 내용은 <코리아 타운> 김태선 발행인이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재직 당시 한국 정부와 함께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 역대 수상자 15명의 자식 사랑 이야기를 묶어 단행본으로 펴낸 것입니다.

자녀 예술가들이 어머니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는 1인칭 서술기법을 사용한 이 책은 단행본 사상 최초로 사진을 곁들인 잡지식 편집기법을 도입, 독자들로부터 높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제 7년여의 세월이 흘렀지만 본란에서는 당시의 내용을 가감 없이 그대로 수록, 성공한 예술가 자녀를 키워낸 장한 어머니의 사랑 이야기가 우리 교민사회에 타산지석의 효과를 가져오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항상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녔던 어머니

연극이라는 것이, 연극인의 삶이라는 것이 어떤 건지도 제대로 모르고 어린 시절부터 나는 ‘당연히 연극인이 돼야 한다’는 일념을 가지고 40여년 간 연극과 더불어 살아왔다.

강산이 네 번이나 변했을 이 긴 시간 동안 나는 오직 연극에만 몰두해왔고 연극을 위해서만 살아왔다. 연극인으로서의 나는 주위로부터 늘 ‘최고’라는 찬사를 들어왔고, 내 자신도 이 사실을 부인하지 않지만 연극을 제외하고는 나는 아주 기초적인(?) 지식조차 부족한 그런 사람이다.

그런 나를 오늘의 위치에 오르게 한 건 항상 내 곁에서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니며 나의 팬이 되고 조언자가 돼준 나의 어머니 김진옥 여사의 노력과 희생 덕분이다.

어머니는 항상 내게 공기와 같이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존재였지만 나는 그 고마움을 알지 못한 채 어머니를 잃었다. 나는 어머니를 잃고 나서야 비로서 어머니의 소중함과 그 희생을 조금씩 깨닫는다.

결코 평범하지도 순탄하지도 않은 연극인의 삶. 누구나 한 번쯤 꿈꿔 보지만 그 삶이 자기의, 자기 자식들의 몫이 아니길 바라는 연극인의 길. 세상의 모든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들만은 그런 고단한 삶을 선택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나의 어머니 역시 그랬을 것이다.

나는 연극을 하는 내 동료들이 연극인으로서의 길을 가기 위해 겪게 되는 주위로부터의, 가족으로부터의 반대를 수도 없이 보아왔다. 연극인으로 발을 들여 놓기까지의 순탄치 못한 그런 과정들을 지켜보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는 이 길을 내 나이 또래의 다른 동료들보다 한결 수월하게 시작한 것 같다. 그 점에 대해서는 내가 연극인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앞길을 터준 오빠와 이 길을 허락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어머니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이다.

 

판사나 변호사가 될줄 알았던 아들이…

내가 연극에 몸을 담게 된 것은 뜻밖에도 지극히 자연스럽고 평범한 상황에서 시작됐다. 서른 다섯의 나이에 남편을 여읜 어머니는 장남인 오빠가 얼른 자라 판사나 변호사가 돼 자신의 곁에서 훌쩍 떠나간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해주기를 은근히 바라고 계셨다.

그런데 어머니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오빠가 난데없이 연극인이 되기로 선언을 한 것이었다. 남보란 듯이 당당하고 훌륭하게 자라줄 것이라 믿었던 그런 아들이 춥고 배고픈 광대짓을 하겠다니!

어머니는 오빠의 말에 실망과 혼란을 느끼시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오랜 고민 끝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처럼 자신의 뜻을 접고 오빠의 결정에 동의를 하셨다.

어머니는 “자식이 하고 싶은 일은 아무리 부모라 해도 막을 수 없다. 자식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하는 것도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 아니겠는가?”란 결론을 내리신 것이었다.

그렇게 결정을 내리신 후에 어머니는 언제 반대를 했느냐는 듯 과감하고 추진력 있게 일을 밀고 나가셨다. 어머니는 여장부처럼 당당하게 한 손에는 오빠를 이끌고 또 다른 한 손에는 “우리 아들 잘 봐달라”는 뜻으로 비싼 술 한 병을 들고 극단 ‘신협’을 찾아가셨다.

엄마가 그렇게 믿고 의지하시던 오빠가 연극인의 길을 걷게 돼서인지 어머니는 내가 대학에서 처음으로 연극을 하겠다고 ‘선언’을 했을 때도 그 사실을 너무도 담담하게 받아들이셨다.

오빠의 연극계 진출 이후 내가 연극에 관심을 보이고 오빠와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어머니는 아마도 그것을 미리 각오하셨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차츰 시간이 지나며 “자식들이 당신의 바램대로 만은 살아주지 않을 것이란 것”을 일찌감치 예상하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머니는 내 곁에서 묵묵히 내가 하는 연극을 지켜봐 주셨고 나는 그런 어머니의 구속하지 않는,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염려해 주시는 만큼 한 번의 뒤돌아 봄도 없이 열심히 걸어왔다.

 

구속하지 않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선 염려

극단 ‘신협’의 멤버가 된 오빠를 따라 나는 일곱 살 되던 해 지금의 서울시의회 사무실인 부민관에서 ‘원술랑’을 낮은 키로 올려다 보았다.

사물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인 일곱 살짜리 계집애는 그 연극이 대체 어떤 이야기로 이루어졌는지 알지 못하는 난해함 속에서 막연하게 미래를 보아버렸는지도 모른다.

전쟁 전 오빠의 도시락을 들고 신협의 무대를 찾았던 나는 동양극장에서 ‘마의태자’를, 인천애관에서 ‘처용의 노래’를 보았다. 무대가 횡횡 돌아가는 ‘춘향전’은 열 두 번이나 보았고, ‘마의태자’에서 공주의 마지막 대사는 힘 안들이고 줄줄 외웠다.

나는 그토록 ‘장대한’ 공연장을 드나드는 것에 당당했던 특권계급(?)인 채 김동원, 최은희 선생님의 연극을 달뜬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배우들은 바위처럼 커보였고, 무대는 경복궁만큼 웅장하게 느껴졌다. 막이 오르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심장이 너무 뛰어 내 마음을 진정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했다.

내가 돈암초등학교 2학년 때 6.25전쟁이 일어났다. 강화도에서 전쟁을 피한 우리 일가는 다시 1.4후퇴 때는 제주도로 피난을 내려가 3년 후 다시 서울로 올라왔고, 나는 미동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나의 여학교 시절은 연극과 상관 없었던 유일한 시기였다. 초등학교 학예회나 크리스마스 때 교회에서 성극에 출연하는 게 고작이었던 나는 진명여중과 여고 6년을 다니면서도 연극부가 없었기 때문에 한 번도 연극을 할 기회가 없었다.

중고등학교 연극 경연대회라는 것도 있었지만 그때는 웅변, 한국무용, 합창 같은 학교 행사들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연극을 하지 못하는 섭섭함이 6년 내내 지긋지긋하게 날 따라다녔다.

중고등학교 시절 공부는 상위권에 속했다. 나는 특히 국어와 세계사를 좋아했다. 공부도, 합창도, 웅변도 식욕좋게 잘 해치우던 나는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졸업과 맞바꾼 방송국 성우

그리고 그때 나는 이미 오빠의 영화 제작현장의 작은 스탭이었다. 나는 각광받는 감독이 돼버린 오빠의 책상 위에 쌓인 시나리오들을 1차로 심사하기도 했다.

대학에 입학한 후 나는 ‘페드라’라는 공연으로 처음 연극과 접하게 됐다. 나는 대학극을 학예회 수준으로 우스워하는 푼수인채 ‘페드라’의 시녀 파노프 역으로 첫 배역을 맡았다.

3학년 봄에는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을 공연했다. 대학을 떠난 후에도 후배들과 함께 ‘피의 결혼’에 출연하며 꾸준히 연극을 계속했다.

그 무렵 나는 개국을 눈앞에 두고 있던 동아방송의 제1기 성우 공채시험에 응시했다. 1백 50대 1의 경쟁률. 합격했지만 방송국에서는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증명서를 요구했고 나는 급한 마음에 학교를 포기했다.

2개월의 수습을 마치고 단역으로 전속 성우생활을 시작했다. 라디오 드라마를 통한 대사 트레이닝과 연기수업도 함께. 나는 방송국이라는 거대한 장소 속에서 매일을 흥분된 상태로 보냈다. 나는 그 속에서 도달하고 싶은 배우인 내 모습을 미리 보고 싶어했다.

동아방송 입사 후 실험극장의 ‘팔려가는 골동품’으로 첫 무대에 섰고 ‘악령’, ‘담배내기’ 등에 출연했다. 66년 6월 나는 선배 나옥주씨의 추천, 그리고 대학에서 만났던 김정옥씨와의 인연 등으로 극단 ‘자유’의 창단 멤버가 되었다.

‘자유’와의 만남은 그레첸의 순수한 영혼이 파우스트를 구원한 것처럼 그렇게 젊은 나의 지향이 돼 주었다. 그리고 ‘대머리 여가수’, ‘무엇이 될꼬 하니’, ‘피의 결혼’, ‘위기의 여자’, ‘엄마는 50에 바다를 발견했다’, ‘신의 아그네스’, ‘햄릿’, ‘내 사랑 히로시마’로 공연이 이어지면서 나는 내가 비로소 배우가 되어간다는 사실을 가슴 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상하게도 ‘무녀도’의 무당 모화나 ‘파우스트’의 마녀, 할머니 같은 배역이 언제나 내 차지가 되곤 했다. 낮고 음울한 목소리 탓이었을까. 공포스러운 역도 단골이었다.

 

‘위기의 여자’가 만들어준 스타덤

내 배역은 늘 노역 아니면 조역이었다. 하지만 배우는 맡겨진 역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소화했다. 내가 정작 스타가 된 것은 나의 고향인 ‘자유’를 떠나고 나서였다. 남편의 외도로 고민하는 중년 여자의 아픔을 담은 극단 ‘산울림’의 ‘위기의 여자’가 도약대가 됐다.

‘위기의 여자’는 극단 산울림의 개관 1주년 기념작으로, 연출자 임영웅씨에게 주인공 ‘모니끄’ 역은 선뜻 어느 한 배우를 지정하기 힘든 매우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

그 동안 내가 맡아온 역할들이 하나같이 개성이 강하고 특징적인 것들이었던 터라 우여곡절 끝에 나에게 주인공 출연 제의가 왔고, 나는 나 자신조차도 성공여부가 불안한 그 역할을 위태위태한 심정으로 받아들였다.

한달 반 동안의 연습기간 동안 나는 온통 ‘나를 죽이는 작업’으로 일관했다. 지금까지의 열정적인, 개성이 두드러진 배우 박정자를 죽이고 전혀 다른,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주위의 부정적인 시각, 불안을 일시에 걷어버리고 공연은 성공했다. 극장에는 주부 관객들이 장사진을 쳤고 2백 50회가 넘도록 장기 공연이 이어졌다.

나는 이어 ‘웬일이에요, 당신’, ‘굿나잇 마더’, ‘엄마는 50에 바다를 발견했다’로 연극인으로서 세간의 관심과 주목을 받으며 내가 가진 모든 열정을 한껏 발산했다.

나에게도 한때 시련이 있었다. 90년 극단적인 절망과 30년간의 연기생활에 대한 회의가 한꺼번에 밀려 들었던 것. 그러나 거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나는 관객을 한 명이라도 더 모으려고 열심히 티켓을 팔고 엽서를 보냈다.

나의 분투를 본 둘째 언니와 친구들이 표를 사주기 시작했다. 박정자를 후원하는 ‘꽃봉지회’는 91년에 그렇게 만들어졌다. 17명의 회원으로 시작된 꽃봉지회는 이내 1백 50여명으로 늘어났고, 그들은 지친 나를 일으켜 세워 용기와 힘, 그리고 희망을 주었다.

 

남편 잃고 나서 투사(?)가 돼버린 어머니

나의 어머니는 조용하고 자상한 한국적인 여성이셨다. 당시 네 살 배기였던 내 기억에 어머니는 손도 발도 너무도 아담했고 그 자태가 매우 고우셨다. 머리는 언제나 곱게 쪽을 지시고 한복 입은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우셨던 어머니였다.

45년, 어머니는 서른 다섯의 나이에 5남매를 가진 채 혼자가 되셨다. 해방직후 어수선한 상황에서 갑자기 지병으로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으리라.

그나마 염색공장을 운영하며 근근이 우리를 키워가시던 어머니에게 6.25전쟁은 그 작은 여유(?)마저도 송두리째 앗아 갔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런 현실을 원망하고 주저 앉지 않으셨다. 당신에게는 먹여 살려야 할 5남매가 딸려 있었으므로. 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청상이라는 굴레를 쓰시면서 모든 나약함과 부드러움을 감추고 어느새 ‘투사’가 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지니고 있던 패물을 모두 팔아 생활을 꾸려나갔고 전쟁 후에는 삯바느질로 한복을 지으시고 행상이나 다른 궂은 일도 마다하는 법이 없었다. 어머니는 그런 고단한 생활에서 피곤한 기색 한 번 없이 그저 담담하고 꿋꿋하게 그 생활들을 버텨 나가셨다.

어머니는 유난히 바느질 솜씨가 좋으셨다.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시면서도 우리가 행여 다른 집 아이들에 뒤질세라 손수 만든 한복을 지어 입히셨다. 그 옷을 입혀주실 때마다 어머니는 기쁨과 안도가 뒤섞인 엷은 미소를 머금으셨다.

어머니는 당신의 그런 고생을 당신 딸들은 하지 않기를 바라셨다. 어머니가 바느질을 하고 있는 광경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고 있을 때면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너희는 이렇게 어렵고 힘든 일 하지 말아라”며 자신에게 되뇌듯 늘 말씀하셨다.

 

딸이 출연한 연극은 빠짐 없이 보신 어머니

어머니는 나의 열성 팬이 되어 언제나 내 연극을 지켜보고 격려 해준 조언자셨다. 어머니는 평생 당신이 살아계신 동안 딸이 출연한 연극 1백여 편을 빠짐 없이 지켜보셨다.

몇 년 전인가 어머니는 나에게 뜬금 없이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머리가 하얘가지고 너의 공연을 보고 있자니 왠지 쑥스럽고 미안한 생각이 들더라.”

나는 어머니를 꼭 안아 드렸다. 그리고 “박정자를 낳으시고 연극인으로서 이만큼 클 수 있게 해주신 분이 바로 어머니이세요. 어머니는 박정자의 어머니란 사실만으로도 제 연극을 보실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계세요”

어머니는 당신이 이해하기 힘드셨을 난해한 공연들조차 열심히 와서 지켜 봐주셨고 나의 곁에서 항상 힘이 되어 주셨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다.

자살을 결심한 딸과 그 딸의 자살을 말리려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굿나잇, 마더’의 공연에서였다. 이 연극은 항상 내 마음을 아프고 했고, 나는 공연 때마다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넘쳐나는 눈물을 가누기 힘든 그런 공연이었다.

공연이 끝나자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시며 내가 있는 분장실로 달려 오셨다. 그리고 나서는 딸 역할을 맡았던 후배 연극인의 가슴을 치며 꾸짖으셨다. “왜 내 딸의 마음을 그리도 아프게 하느냐. 정말 나쁘다. 못됐다”며…. 어머니는 그렇게 딸을 아끼시던 그런 분이셨다.

어머니는 나와 오빠가 연극인으로서의 길을 가는 것을 이해하시면서도 당신의 마음 한 켠에는 항상 연민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가끔 나를 보실 때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너를 가졌을 때 거리의 남사당패를 보면서 속으로 ‘저 사람들은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 광대가 됐을까? 불쌍하기 짝이 없다’고 동정했는데 그게 죄가 돼 너 같은 딸을 뒀나 보다.”

내가 남들처럼 한 남자의 아내로, 자식들의 어머니로, 며느리로서 고단하지 않은 삶을 살아주길 한편으로는 바랬을 어머니는, 연극배우로 버거운 삶을 살아가는 막내딸을 늘 안쓰럽게 바라보셨다.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걱정 가득한 모습으로.

 

자식 키워봐야 부모 마음 안다던가?

어머니는 연세가 들고 노환이 생기면서 무슨 일이든 척척 잘해내던 예전의 여장부 같던 모습을 차츰 잃어 가셨다.

어떤 때 어머니는 삶 자체를 지루하게 느끼시는 것처럼도 보였다. 어머니가 앓아 누우시면서 어머니는 나를 부쩍 자주 찾으셨다. 그럴 때면 나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당장 내 눈앞에 이득이 되는 일 때문에 “다음에, 다음에요”라고 미루기만 했다.

나는 그 당시 어머니는 항상 내 곁에 있는 사람으로, 결코 돌아가시지 않으리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그렇게 자신의 뼈를 깎아가며 자식을 키우고 언제 어디서나 항상 노심초사 하셨다. 하지만 우리들은 가끔은 어머니를 생각하고 염려하지만 뒤돌아서면 어머니란 존재를 까마득히 잊어버린다.

어머니는 우리의 생명을 이어주는 공기 같은 존재이지만 우리는 그 고마움을 알지 못하고 지낸다. 자식들이란 바로 그런 존재들이다.

이제는 결혼을 하고 지금은 두 남매의 어머니가 된 나. “자식을 키워봐야지만 부모 마음을 안다”는 말처럼 나는 자식들을 키우면서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 그리고 어머니의 아픔을 조금씩 느껴가고 있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던 그 시절, 어머니 역시 자식들의 어머니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여자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때문에 어머니도 여자로서 나약하고 여린, 바로 나 자신과 같은 존재로 때론 좌절하고 절망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늘 꿋꿋하고 강하다고만 생각했다.

어머니가 한 여자라는 사실을 나도 미처 알지 못했듯이 우리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내 아이들에게 나도 ‘여성’이라는 사실을 항상 상기시킨다. ‘엄마는 50에 바다를 발견했다’에서 어머니의 대사에서처럼 “너희는 엄마가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완벽하게 해 낸다고 생각하지? 아니, 엄마도 너희들처럼 나약하고 연약한 존재에 불과해. 엄마가 평생에 가장 훌륭하게 이루어 놓은 거라곤 너희 두 남매를 낳았다는 것 밖에는 없어”라고.

 

8년 전 공연장에서의 어머니는…

91년 ‘엄마는 50에 바다를 발견했다’를 공연할 때도 어머니는 딸의 공연을 보러 오빠 내외와 공연장에 오셨다. 오른쪽에 오빠를, 왼쪽에는 며느리를 앉히시고 딸의 공연을 지켜보시던 그때가 어머니 생에 가장 행복한 날이 아니었을까?

어머니는 공연 내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보였다. 공연이 모두 끝나고 분장실로 나를 찾아 왔던 어머니. 나는 어머니가 또 어떤 지적을 하실지 내심 긴장되기도 했다. 그 때 어머니가 내게 하신 말씀 “얘, 공연중에 화장실 장면 말이다. 그게 뭐냐? 좀 너무 심하다 싶더라. 아무리 연극이라지만 왠지 창피해서…”라며 얼굴을 붉히셨다. 나의 어머니는 그만큼 천진난만하면서도 순수한 분이셨다.

그 후로 꼭 8년 만에 ‘엄마는…’을 앵콜 공연하게 됐다. 오빠 내외가 바쁜 와중에도 공연을 보러 왔다. 무대 위에 올라갔을 때 오빠와 올케는 8년 전 이 공연을 봤던 바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한 가지 달라진 게 있다면 오빠와 올케 중간에 앉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내 공연을 관람하시던 어머니의 자리가 비어있다는 것. 나는 공연 내내 어머니의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 날은 정말이지 가장 슬프고도 외롭고 어머니가 미치도록 그리웠던 날이었다.

어머니는 여든 넷의 나이로 평화롭고 행복하게 생을 마감하셨다. 어머니는 힘들기만 했던 당신의 삶을 접으시고 이제 평화와 휴식의 공간에서 조용히 쉬고 계신다. 이제 자식들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가슴 상하실 필요 없이 오직 자신만의 공간에서 자신의 시간을 보내고 계실 것이다.

때문에 나는 어머니의 ‘부존’이 마냥 슬프고 비극적이지만은 않다. 나는 어머니의 제사 때면 어머니의 생전에 기뻐하시던 모습을 보며 어머니의 행복했던 기억들을 가슴속에 깊이 간직한다. 그리고 우리 가족들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며 어머니를 추억한다.

우리 자매들 중에서 내가 어머니를 가장 빼 닮았다고들 한다. 그리고 내 공연을 보는 가족들은 나를 통해서 어머니를 다시 보는 듯하다고들 한다.

나 역시 공연을 하면서 잃어버린 내 어머니의 이미지를 발견한다. 어머니가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시던 모습, 좌절의 눈물을 흘리시던 모습, 아파하시던 모습, 혼자서 회상에 잠기시던 모습, 쓸쓸해 하시던 모습, 우리를 부르던 모습….’

그런 모습 하나 하나를 되살리면서 나는 비로소 나의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를 진정으로 느껴가고 있다.

 

어머니가 주신 변함없는 가르침 일곱 가지

 

  1. 하고 싶은 일을 하라

어머니는 당신의 소망을 접으시고 내가 연극인의 길을 가도록 해주셨다. 연극인의 삶이 얼마나 고달프고 힘든지를 아시면서도 어린 나의 생각을 막지 않으셨던 것은 ‘자식이 원하는 일을 허락하는 것이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1. 한 번 결정한 일은 끝까지 밀고 나가라

나와 오빠가 연극인의 길로 들어선 이후 어머니는 “언제 반대했느냐”는 듯이 우리의 적극적인 후원자가 돼주셨다.

그리고 외롭고 힘든 연극인의 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갈 수 있도록 항상 격려해주시고 아낌없는 조언을 주셨다.

 

  1. 매사에 성실하라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내 6.25전쟁이 나자 어머니는 삯바느질과 행상으로 우리를 키우셨다. 어머니는 그런 고단한 생활에서도 피곤한 기색 한 번 없이 그저 성실하고 꿋꿋하게 그 생활들을 버텨 내셨다.

 

  1.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은 더 중요하다

과정보다 결과가 중시되는 것이 요즘 세태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린 나에게 ‘과정의 중요성’을 알려 주신 분이다.

어머니 앞에는 ‘대충대충 적당히’라는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우연히 좋은 결과로 인해 주위의 칭찬을 받을 때 나는 항상 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 미비했던 점이나 누락됐던 것들을 머리 속에 기억해뒀다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해왔다.

 

  1. 사람을 사랑하라

어머니는 늘 “세상은 자기가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혼자서는 살 수 없다”고 강조하셨다. 어머니는 어려운 생활 여건에서도 항상 어려운 이웃을 돕고 사랑하셨다.

“행복이나 성공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얻어지지 않는다. 항상 주위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라. 그들로부터 그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어머니의 변함 없는 믿음이자 가르침이었다.

 

  1. 네가 가진 것들에 항상 감사하라

젊은 나이에 홀로 되신 후 갖은 고생을 다하신 어머니는 그런 환경을 불평하기보다 자신이 가진 몇 안 되는 것에 늘 감사해 하셨다. 자식들이 건강하다는 것에, 당신 두 손으로 우리를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가족들이 화목하게 함께 모여 산다는 것에 대해 늘 감사하셨다.

 

  1. 겸손하며 자만하지 말아라

자신이 최고임을 자만하는 사람은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 자만은 사람을 머물러 있게 하고 교만하게 한다. 서 있는 자리가 높아질수록, 더 많이 배울수록, 더 많이 알수록 겸손하고 노력할 것을 어머니는 항상 당부하셨다.

 

후배 예술가들에게 주는 조언 일곱 가지

 

  1. 연극배우는 관객의 마음을 보듬어주는 서비스직이다

연극배우의 임무는 항상 관객의 곁에서 그들의 지치고 황폐한 마음을 보듬어주는 것이다. 때문에 연극배우라는 직업은 일종은 서비스직이다. 관객을 위해 최선의 서비스를 다한다는 마음으로 매 공연에 임해라.

 

  1. 프로의식을 가져라

연극을 시작한 이후 나의 내면에는 “나는 연극인이다”라는 근성과 프로의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어떤 일을 하든 프로의식이 없으면 살아 남을 수가 없다.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를 바란다면 철저한 프로의식을 가져라.

 

  1. 일을 사랑하라

자기 일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자신의 일을 아끼고 사랑하라. 그러면 성공은 자연히 뒤따라 오게 된다.

 

  1. 작은 배역에도 최선을 다하라

대가가 되기까지는 숱한 역경들이 있다. 연극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10년 가까운 기간 동안 변변한 주연 하나 맡지 못했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서글프고 속상했지만 나는 작은 일, 작은 역할 하나에도 최선을 다했고 결과적으로 오늘의 자리에 서 있게 됐다.

 

  1. 고정된 이미지를 벗어라

연기자의 생명은 ‘연기 변신’이다. 내 이미지와 역할은 대부분 할머니, 마녀, 무당 등 강한 여자의 이미지로 고정돼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머물렀더라면 오늘의 나는 있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나의 이미지를 변화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위기의 여자’, ‘백양섬의 욕망’, ‘대머리 여가수’ 등에서 기존의 ‘나’와는 전혀 다른 다양한 여성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1. 과욕을 부리지 말라

매사에 의욕적으로, 일에 대해 욕심을 가지는 것은 자기를 발전하게 한다. 그러나 과욕을 부리면 일을 망치게 된다. 자신이 해 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되 무리한 과욕은 삼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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