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사랑하라면서…

아내를 사랑하라. 고속도로 주행을 마치고 만남의 광장을 거쳐 서울로 들어서는 차량들이라면 안 볼래야 안 볼 수 없었던 유명한 칠언절구 (七言絶句)입니다. 자타공인 여성지왕국 ‘여원’이 내걸었던 이 캐치프레이즈는 서울 서초동 여원 사옥에 대문짝만한 크기의 네온사인으로 만들어져 밤낮 없이 스물네 시간 번쩍거리고 있었습니다.

한국 남성들의 아내 사랑이 지금처럼 활발하지는 못했던(?) 시절 ‘아내를 사랑하라’ 일곱 글자는 당시의 한국사회에 매우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 줬습니다. 여원 김재원 발행인은 아내 사랑, 여성 존중을 외치는 대표적인 페미니스트로 각종 강연과 기고 그리고 TV 프로그램 진행자로까지 바쁘게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특정 다수에게 아내를 사랑하라고 외치는 회사에 소속돼 있었던 저는 정작 아내 사랑과는 거리가 먼, 상당히 이율배반적인 행보를 계속하고 있었음을 다시 한번 고백합니다. 돌이켜 보면 아내는 물론, 우리 아이들에게도 매우 소중했던 1990년대의 거의 전부를 저는 그렇게 찌질하기 짝이 없게 보냈습니다.

“일도 중요하고 회사도 중요하지만 우리 가족부터 먼저 생각해달라”는 아내의 완곡한 부탁을 저는 그때마다 “알았어”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갔습니다. 그때 제가 올바로 아내를 사랑하고 가족을 챙겼더라면 저의, 우리 가족의 삶의 모습은 지금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제가 시드니에 와서 신문 잡지 일을 하면서, 특히 코리아타운을 인수 발행하게 되면서부터 가장 많이 강조하고 있는 게 ‘아내 사랑’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가족 사랑’입니다. 가슴 따뜻한 이야기들 중에서도 가족의 행복과 관련된 내용들을 많이 다루려 하는 것도 그 같은 맥락에서입니다.

지금도 코리아타운의 주 독자층을 20대부터 60대까지의 여성으로 정해놓고 나름 여성지 흉내(?)를 내고는 있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여성지’임을 자부하기에는 이런 상황과 저런 여건들 때문에 녹록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저와 코리아타운을 만드는 좋은 사람들은 한 주 한 주 아내 사랑, 가족 사랑이 담긴 코리아타운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테레사는 토니씨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주니 얼마나 좋겠어?” 주변 분들로부터 종종 듣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분들은 제가 아내를 여왕처럼 받들고 산다며 “당신도 토니씨의 반 만이라도 좀 닮아보라”는 닦달을 당하기도 한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저는 가슴이 뜨끔뜨끔 합니다. 옛날에 지었던 죄들이 워낙 많기 때문입니다. 일일이 미주알고주알 늘어놓기도 그렇고 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 다른 분들이 모르고 있는 고생들을 아내는 참 많이 했습니다.

한국에서야 무심을 무기로 아는 듯 모르는 듯 넘어가곤 했지만 시드니에 와서 세븐 데이로 울워스 청소를 하며 손이 망가져가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는 그 동안의 번뇌들이 한꺼번에 몰려왔습니다. 21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자신을 그토록 힘들게 했던 시어머니의 대소변을 한 달 반 동안 시도 때도 없이 받아내면서도 볼멘소리 한번 안 하던 아내를 보며 ‘지금부터라도…’라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라 그리고 가족을 사랑하라… 이 두 명제는 우리의 삶에 있어 더 없이 소중한 것들입니다. 잔소리(?) 같은 건 일절 하지 않는 아내와 제가 딸아이 부부에게 잊어버리지 않도록 주입(?)하는 유일한 이야기도 다름아닌 이것입니다. 저처럼 좋은 시기를 놓치고 때늦은 후회와 함께 뒤늦은 시작을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부터 챙기는 게 스스로를 위해, 배우자를 위해, 그리고 가족을 위해 좋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돌아오는 월요일이 우리의 결혼기념일입니다. 지금도 자기자신보다는 찌질한 남편을 더 먼저 생각하고 챙겨주는 바보 같은 친구…. 비록 꽃다운 시절은 다 놓쳐버렸지만 지금부터라도 서로를 살뜰히 챙기며 건강하게 오래오래 함께 하는 것이 그 바보 같은 아내를 위한 가장 큰 선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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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선 tonyau777@gmail.com

<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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