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하다? 춥다?

춥다. 언제부터인가 모르게 제 입에서 종종 튀어나오는 단어입니다. ‘쌀쌀하다’는 말은 ‘춥다’보다 훨씬 더 자주 등장합니다. 한국에서는 살을 에는 듯한 강추위에도 내복은커녕 청바지에 셔츠 하나만 걸치고 온 사방을 뛰어다니던 시절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나이가 든 탓인지, 아니면 시드니에 살면서 제 몸이 이곳 날씨에 적응(?)이 된 탓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 정도 날씨에 ‘쌀쌀하다’ 혹은 ‘춥다’라니…. 한동안 비가 오락가락하더니 날씨가 슬그머니 변했고 그에 따라 반팔 티, 반 바지 대신에 ‘긴 옷’들이 자연스레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창고에 내려놨던 가스히터도 거실로 올라왔습니다.

활짝 열어젖혀뒀던 창문들은 조금만 열어두거나 아예 닫아버리기도 합니다. 아직 계절상으로는 가을의 중반에 불과하고 여전히 날씨가 오락가락 변덕스럽기는 하지만 이제 곧 ‘쌀쌀하다’를 넘어 ‘춥다’를 입에 달고(?)사는 계절이 올 겁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면 두툼한 ‘수면잠옷’까지 껴입을 태세입니다.

처음 시드니에 왔을 때는 ‘이게 겨울이야?’ 싶었습니다. 한국에서 그랬듯이 그때는 사시사철 반팔 티에 반바지를 입고 지낸 건 물론이었고 겨울이라고, 춥다고 두터운 외투에 롱 부츠까지 신고 다니는 이곳 사람들을 보면 도저히 이해가 안됐습니다. 하지만 사계절이라고는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여름만 있는 것 같았던 시드니 날씨에 알고 보니 추운(?) 겨울도 들어있었던 겁니다.

이곳도 가을은 수확의 계절인지 우리 집 텃밭에는 어른 손가락보다 훨씬 길고 굵은 고추들이 치열한 자리다툼을 하고 있고, 한동안 잡초에 눌려 기를 못 펴던 한국부추들이 다시 푸릇푸릇 그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토실토실한(?) 가지도 풍년을 이뤄 가지무침도 몇 번 해먹었고 삼겹살 구울 때 여러 번 구워먹기도 했습니다. 어른 얼굴보다 훨씬 큰 깻잎은 그 동안 넘쳐날 정도로 우리의 식탁을 풍성하게 해줬습니다. 며칠 전에는 제 손바닥 두 배만한 호박 잎들을 삶아 ‘아내표 강된장’을 더해 쌈밥의 풍미에 푹 빠지기도 했습니다.

올해 무엇보다도 반가운 건 감입니다. 몇 해 전 캠시의 한 중국농원에서 사다가 심은 감나무가 올해 처음으로 꽃을 피우더니 어른 주먹만한 감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습니다. 그 동안 여러 차례 비파며 무화과를 포썸이나 새들에게 뺏겨본 경험이 있어 감나무에 그물망을 촘촘히 씌워놨더니 아직은 무사합니다.

지난 주말에는 첫 수확으로 따낸 말캉말캉한 감 한 개를 아이들에게 줬습니다. 에이든은 한번 맛을 보더니 별다른 흥미를 안 보였지만 에밀리는 감으로도 모자라서 지 할머니가 떠먹여주는 티스푼까지 삼킬 기세였습니다. 곁에서 슬쩍 맛본 홍시… 정말 달고 맛 있었습니다.

앞마당에 심은 오렌지나무에도 올해 처음으로 오렌지가 세 개 달렸고 그 옆 레몬나무 두 그루에는 30개도 넘는 레몬이 풍년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제 곧 시작될 본격적인 추위 혹은 쌀쌀함 한 켠에 우리의 입과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풍작이 함께 하고 있는 겁니다.

지난주 토요일에는 산행을 마친 후 선배 지인부부와 모처럼 연어낚시를 갔습니다. 항상(?) 낚싯대를 부러뜨릴 정도로 휘게 만들며 우리를 흥분시키곤 했던 녀석들과의 짜릿한 승부가 기대되던 시기였지만 그날은 어쩐 일인지 한 놈도 얼굴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드넓은 바다와 마주하고 있었던 그 몇 시간이 우리에게는 행복과 힐링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가 가끔 찾는 그곳에는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기는 바다가 취한다’는 이생진 시인의 시구를 떠올리게 하는 ‘성산포’를 닮은 바위섬(?)이 왼쪽에 자리하고 있고 오른쪽 저 멀리 등대 옆 빨간 기와집은 동화 속 그림을 연상케 합니다. 이제 써머타임도 끝났고 날씨가 점점 차가워지면서 그곳에서도 곧 짜릿한 손맛을 더한 또 다른 우리의 풍작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계절의 도도한 변화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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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선 tonyau777@gmail.com

<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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