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남쪽에서 15세기와 마주하다

그라나다와 코르도바에서의 시간여행 그리고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

 수년 전 원주 치악산 정상인 비로봉을 코앞에 두고 점심을 먹은 적이 있었다. 겨울 끝자락의 칼바람을 피한다고 자리잡은 곳이 경사진 곳에 있는 바위 밑. 정신 없이 배를 채우고 나니 그제서야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고 바위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석이버섯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석이버섯을 펼치면 영락없이 유럽의 변방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품고 있는 이베리아 반도 (Iberian Peninsula)의 생김새와 비슷하다.

 

01_휴가철… 스페인 사람들은 북쪽으로, 여행객들은 남쪽으로

휴가철이면 스페인 사람들은 대부분 북쪽으로 가지만 여행객들은 남쪽으로 몰린다고 한다. 발렌시아 (Valencia)에서 3일간의 학회가 끝난 후 나도 곧장 남쪽으로 향했다.

일단 북으로 네 시간 거리에 있는 바르셀로나 (Barcelona)까지 버스로 가서 국내선 비행기를 이용했다. 그라나다 (Granada)에 도착하고 보니 아직도 6월의 작열하는 태양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오후였다.

시골 내음이 물씬 나는 공항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버스로 시내 중심가에 있는 숙소에 들어가 여장을 풀고 저녁이 되기를 기다렸다. 대부분 여행객이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Andalusia) 지방의 중심지인 그라나다에 오는 이유는 이슬람 궁전인 ‘알람브라 (Alhambra)’를 보기 위함이다.

비운의 이슬람 왕국 역사를 몸에 휘감고 있는 궁전은 마침 저녁 하늘에서 기울고 있는 달이 애잔한 여운 속에 토해내는 붉은 빛과 더불어 그 운치가 극에 달했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던 프란시스코 타레가 (Francisco Tarrega)도 필시 궁전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 언덕에 올라와 달과 더불어 환상적인 색채를 뿜어내던 궁전의 매혹적인 자태에 감동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불후의 명곡인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 (Memories of Alhambra)’이 만들어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02_곳곳의 이슬람 사원들은 철저히 파괴되고 그 자리에는 성당이

아랍어로 ‘붉은 성’ 이라는 뜻을 지닌 알람브라 궁전은 그 넓은 면적에 세 개의 정원을 기본 축으로 설계된 건축물이다. 이슬람 신자들인 무슬림은 8세기부터 (참고로 이슬람은 7세기에 시작됐다) 이베리아 반도에 둥지를 틀기 시작하면서 찬란한 이슬람 문화를 꽃피운다.

‘흥망성쇠가 씨줄과 날줄로 엮인 인류 역사에서 천년 이상을 버틴 왕조가 있었던가?’ 사실 이 말은 13세기 세계에서 가장 강한 왕조인 원나라를 만든 쿠빌라이 칸 (징기스 칸의 손자)의 현명한 아내가 남편을 내조하면서 한 말이다. 급기야 이슬람 왕조도 15세기 말에 기독교 세력에 패해 약 800년 동안 지배를 한 이베리아 반도라는 무대에서 퇴장한다.

패자는 저항을 못한다. 반도 곳곳에 세워진 이슬람 사원들은 철저하게 파괴되고 그 자리에는 성당이 들어섰다. 지배당한 세력은 육신과 정신 모두를 빼앗긴다. 망한 이슬람 국가는 자신의 혼이 깃든 사원을 온전히 지켜낼 수 없었다.

새롭게 반도를 차지한 기독교 세력은 지배자로서 이슬람의 정신을 철저히 유린했다. 원래 이슬람 사원이었던 자리에서 행해지는 기독교 종교 의식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니 관광객들 눈에는 이슬람 문화가 보이질 않는다.

15세기부터 시작된 대항해시대로부터 세계의 패권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넘어와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실크로드 (Silk Road)로 대변된 14세기까지의 아시아 번성기가 지금 세상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듯이 말이다.

 

03_이사벨 여왕은 남편을 설득, 알람브라 궁전의 파괴를 막는다

천만다행으로 이슬람 문화의 진수가 집대성된 알람브라 궁전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새로운 지배자인 이사벨 (Isabel) 여왕은 정치적 이해관계로 맞은 남편 페르난도 (Fernand) 왕을 설득하여 이 왕궁의 파괴를 막는다.

그녀의 덕을 우리 같은 관광객이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다.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다 새로운 세력에 굴복하여 왕궁을 버리고 달아나던 보압딜 (Boabdil) 왕은 왕궁이 내려다보이는 시에라 네바다 (Sierra Nevada)의 산맥 언저리에서 차마 더 나아가지를 못했다고 한다.

왕은 말에서 내려 1월의 녹음 속에 아름다운 자태를 보이는 왕궁을 내려다보며 긴 한숨과 더불어 회한의 눈물을 훔친다. 이를 본 왕의 어미는 못난 아들을 탓하면서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채근한다.

이미 함락된 왕궁에서 떠나온 1000여명의 일행은 결국 지중해를 건너 모로코로 망명을 하게 된다. 가슴 아픈 그 장면을 이사벨 여왕이 보고 받고 왕궁을 그대로 존속시키기로 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본다.

그리고 만약 뒤를 돌아본 왕이 돌 비석으로 변했다는 전설이 만들어졌다면 관광객들에게 더 흥미롭지 않았을까를 혼자 속으로 궁상 떨면서 나는 가이드를 따라 왕궁의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04_벽과 천장에 장식된 기하학적 무늬들은 육체의 피곤함도 가시게

궁전의 관광은 상당한 체력을 요한다. 그러나 왕의 집무실, 외국 대사를 접견하는 대사의 방 그리고 왕비가 기거한 방의 벽과 천장에 장식된 기하학적 무늬들은 보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마력을 지녀 육체의 피곤함도 가시게 했다.

궁전의 안뜰에 있는 온갖 나무 (사이프러스, 아카시아, 오렌지 등)와 분수는 무더운 지중해의 날씨를 극복한 이슬람 문화의 우수성을 웅변해주고 있었다.

우리네 볶음밥과 흡사하고 각종 콩과 닭고기 그리고 토끼고기가 들어있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음식인 파에야 (Paella)로 허기를 채우고 늦은 저녁 버스에 몸을 실었다.

다음 행선지는 800년동안 이슬람 왕국의 수도였던 코르도바 (Cordoba)였다. 약 200킬로미터 거리를 세 시간 만에 도착했지만 몸은 파김치가 됐다. 터미널에서 택시로 도착한 숙소는 이슬람 왕조 전성기 시대에 수만 명의 신자들이 예배를 본 ‘마스키타 (Mezquita)’ 사원 바로 옆에 있었다.

 

05_기독교 세력은 모스크의 파괴 대신 기독교 색채를 덤으로

중세시대에 만들어진 미로의 연속인 골목길의 한 켠에 자리한 중세 냄새가 풀풀 나는 호텔이었다. 실제로 저녁을 먹고 호텔 주변의 골목길을 걷다가 방향을 잃어 버렸다.

마침 나와 처지가 비슷한 중년 부부를 만나 다같이 머리를 맞대고 미로를 벗어나자 꼭 감옥에서 풀려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늦은 저녁이었지만 덤으로 얻는 이 자유를 만끽한다면서 숙소에서 가까운 과달키비르 강 (Guadalquivir river) 위에 있는 ‘로마 다리 (Roman Bridge)’를 걸었다. 무더운 한낮보다 시원한 밤에 이렇게나 오래된 다리를 걸으니 고대시대로 시간여행을 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서둘러 마스키타 사원 안으로 들어갔다. 이 역사적 건물이 다들 특이하다고 하는 이유는 분명 건물 자체는 이슬람 사원 (마스키타가 스페인 말로 사원이다)인데 막상 안에 들어가보면 16세기에 지어진 기독교 성전이 있기 때문이다.

알람브라 궁전처럼 기독교 세력은 이 아름다운 모스크 (mosque)를 파괴하는 대신에 기독교 색채를 덤으로 입히는 방법을 택했다. 예를 들어 원래의 미나레트 (minaret 첨탑)를 개조하여 기독교식의 첨탑 (Belltower)으로 만들었는데 이 사원에 들어가는 입구가 첨탑 바로 옆에 있다.

또한 기도를 하는 사원 내부 한 켠에 기독교 예배당을 만들기도 했다. 따라서 내부는 그대로 보존이 되어 유명한 이중 아치 (double arch) 형태의 기둥 (아래 아치는 말 발굽 모양 그리고 위 아치는 반원형 모양이다)이 일렬로 쭉 뻗어있어 기도하는 전체 면적이 훨씬 넓어 보였다.

 

06_이슬람 사원 내에서 카톨릭 미사 보는 세계에서 유일한 곳?!

이곳이 아마 이슬람 사원 내에서 카톨릭 미사를 보는 세계에서 유일한 곳이지 않을까? 이 사원 이름이 가끔 Mezquita-Cathedral이라고 불리는 이유인 것이 당연했다. 마침 그날이 일요일이어서 실제로 미사가 집전되고 있어 사진을 찍으려 했지만 보안 요원이 제지하는 바람에 할 수가 없었다.

마스키타 사원을 나와 불과 몇 분만 걸어가면 과달키비르 강 옆에 지어진 성채 (알카사르 Alcazar)가 있다. 이 성채는 무더운 오후만 되면 문을 일찍 닫기 때문에 서둘러야 안을 볼 수 있다.

이곳은 스페인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다. 신대륙을 찾아가는 항해를 하기 위한 허가와 재정 지원을 얻기 위해 포르투갈에서 고군분투하던 콜롬버스 (Columbus)의 출현이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항해에 관심을 보인 페르난도 왕과 이사벨 왕비를 이 성채에서 1486년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사벨은 콜롬버스의 제안에 시큰둥했고 이에 실망한 콜롬버스는 성곽을 나와 당나귀를 타고 코르도바의 거리를 가고 있는데 페르난도 왕이 급히 친위대를 보내 콜롬버스를 성곽으로 다시 불러들인다.

그리고 항해에 대한 재정지원을 약속한다. 하지만 콜롬버스는 그라나다의 이슬람 왕조가 무너진 1492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 해 8월이 되어서야 대장정의 항해를 시작하게 된다.

 

07_성곽의 너른 정원에는 이끼가 덕지덕지 낀 세 사람의 석조상이

대신 콜롬버스는 이슬람 왕조가 무너지는 역사의 한 장면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첫 부인을 지병으로 잃은 후 두 번째 부인을 이곳 코르도바에서 얻고 또한 새로운 세력인 기독교 왕실로부터도 항해 지원을 받게 되니 콜롬버스에게 코르도바는 인생의 황금기를 열어준 인연이 깊은 도시인 셈이다.

이 성곽의 너른 정원에는 이끼가 덕지덕지 낀 세 사람이 서 있는 석조상이 있다. 그러나 아쉽게 주위에는 이 석조상에 대해 설명을 해놓은 표지판이 전혀 없다. 이 역사적 사실을 사전에 알지 못한 이상 일반 관광객들이 이 석조상을 이해하기는 힘들 것 같다.

석조상은 콜롬버스가 반대편에 서 있는 페르난도 왕과 이사벨 왕비를 알현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렇게 나에게 그라나다와 코르도바 여행은 15세기로의 시간 여행이었으며 특히 비극적인 이야기가 얽힌 알람브라 궁전을 마음에 담을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08_알람브라 궁전의 추억

흥망의 역사를 품 안에 고스란히 간직한 채

온화함을 머금고 서 있는

나의 소중한 알람브라여.

 

네 안에선 많은 사랑이 피어나고

창가에 스미는 달빛만이 어루만져 주고 있는

가여운 알람브라여.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 속에 너의 꿈은 빛나고

달빛만이 너를 위해 노래하고 있구나, 말없는 알람브라여.

 

망국민을 위해 설움의 눈물을 흘리며 사랑과 죽음 속에

어느덧 평화의 싹을 틔우고 있구나,

나의 사랑스런 알람브라여.

 

오래 전 보았던 달빛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언덕 위에 태양처럼 빛나고 있구나, 알람브라여.

나는 알람브라를 꿈꾸노라, 나의 사랑스런 알람브라여.

 

글 / 박석천 (글벗세움 회원·찰스스터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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