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에 대한 변주곡

1 / 바다 앞에서

우주에 생명이 없다면 소리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리는 생명인가?  소리는 살아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주는 신호음인가? 파도 소리가 그렇게도 크고 우렁찬 이유는 그 안에 무진장한 생명체를 품고 있어서일까?

바다 앞에 설 때 마다 우리는 엄청난 생명들을 마주하게 된다. 수평선을 한 참 동안 바라보는 이유는 혹여 호주의 동부 해안을 따라 이동한다는 스펌 고래의 조가비들이 다닥다닥 붙은 등짝 일부라도 보고 싶어서일 게다. 수평선을 바라보다 지치면 따뜻하게 달아 오른 바위 위에 앉는다. 귀를 바위에 가까이 대본다. 바위 속에 살아 꿈틀거리며 움직거리는 수많은 마이크로 생명체들의 소리가 파도 소리에 섞여 사각사각 들려온다…

생명이 고귀하지 않다면 그렇게 이들의 소리를 그리워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2 / 사막에서

모든 움직이는 것은 징그럽다. 그것이 잘려나간 채 작은 토막들이 되어 은색 쟁반을 가로 질러 꿈틀대는 낙지가 되었든 아니면 날카로운 삽날에 반 토막으로 잘려나가 피를 흘리면서 검은 땅 속으로 들어가는 지렁이가 되었든 아니면 또는 자궁 벽에 착상한 후 두 눈을 감은 채 마치 우주인처럼 양수 속을 유영하는 태아가 되었든 이 모든 생명체들은 징그럽다.

뱀의 후손이어서인가?  징그러운 것은 그 꿈틀대는 모습 때문만은 아니다. 징그러운 것은 그것이 무에서 유로 전이되었다는 것 때문이다. 무가 순수하고 무죄하며 정숙하다면 유는 불순하고 죄로 가득하며 창녀와 같은 모습이다.

사막으로 나가 보라?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무의 세계를 사막은 말해주고 있다. 완만한 곡선으로 반복되는 능선과 수평선 또는 지평선 만이 존재하는, 작열하는 태양 밑에서 수만 년 인고의 세월을 보낸 모래 언덕은 지고 지순 지덕 그 자체이다.

그런데 한 순간 모래 언덕 한 능선 아래로  전갈 한 마리가 꼬리를 하늘 높이 들고서 모래를 떨치면서 나타났다고 상상해 보자. 생명은 징그러움 그 자체이고 징그러움은 생명을 특징짓는 확실한 표징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나는 힌디 문자가 싫다. 나무에 달린 요기가 자벌레처럼 몸을 비틀고 꿈틀대는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도가 싫다. 너무나도 많은 가난한 군상들이 그 대륙 전체를 덮은 채 냄새를 풍기며 힌디 문자처럼 꿈틀거리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카스트 제도를 유지하면서… 모든 움직이는 것이 징그럽다. 그러나 어쩌랴! 나 역시 그 군상 중 하나인 것을!

 

3 / 새들의 산란기

공중에서 급강하한 매그파이 한 마리가  황급하게 내 머리를 살짝 치고 날아간다. 안다. 나도 안다. 내가 나쁜 놈이라는 것을… 너희들까지 알아보는구나. 본능적으로 나는 허리를 굽혔고 다행이 새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 산란기가 온 모양이다.  새들이 알을 품고 있는 기간에는 행동이 매우 공격적으로 변한다고 한다. 걷고 있던 땅 바닥을 돌아보니 새 둥지가 비어진 채 뒹굴고 있다.

사람뿐이겠는가? 고양이와 포섬들이 새 둥지 속의 생명체를 뒤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포섬이나 고양이가 사람에 비하겠는가? 포유동물 중 사람이 가장 무섭다. 나도 사람이 무섭다. 그래서일까 나는 낮이라도 혼자서는 절대 동네 리저브를 산책하지 않는다. 동네 숲이라 하지만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깊은 산이 무색할 정도의 무인지경이 나온다. 이런 곳을 홀로 산책하다가 다른 산책객에게 어떤 봉변을 당할지 아무도 모른다.  정신병원이 우리 집에서 그닥 멀지도 않다. 숲은 생명과 생명체들의 무자비한 전쟁터이다. 죽은 새들의 잔해, 폭우로 인해 허리가 꺽여 나간 검추리, 하얀 배를 들어낸 채 죽어 물에 떠 있는 개구리, 그리고 그 사체를 공격하는 이름 모를 하이에나 생명들…

어디 숲뿐인가. 오늘 아침에는 부엌의 벤치 탑 위를 새카맣게 덮은 개미군단을을 살충제로 전멸시켰다… 오오… 일종의 가벼운 오개즘과 함께… 역사 책에 기록되지 않은 뿐 일종의 대량 학살을 자행한 셈이다. 우선 내가 살고 봐야 하니 어떤 한국의 유명한 땡중처럼 타 생명체에 대해 외경 운운할 여유가 없다… 우리는 상대방을 하루에도 몇 번이고 죽였다 살렸다 한다. 상대방이 그 자리에 없다고 그의 영이 듣지 못하겠는가? 듣는다. 다 듣는다. 생명이 더 이상 존중되지 않는 환경 속에서 하나의 생명체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힘겹고 고달프고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 그래서 모든 생명체는 징그럽다.  그 징그러움을 견디며 또하나의 징그러운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 오 이것은 도체 무엇인가?

 

4 / 환상 생명체

보고 싶다. 그녀가 보고 싶다. 이건 지순한 욕망이다. 이성과는 반대 쪽에 있는 욕망이지만… 그럼에도 그 욕망이 한 마리의 뱀처럼 내 안에 또아리를 틀고 앉아있으니… 어쩌랴… 간절하다. 왜 보고 싶은 것인가? 그녀의 이름, 그녀의 목소리, 미간을 찌푸리는 모습과 숨결과 영혼의 작은 떨림까지 기억 안에 포획되어 있다. 보면 뭣하고 만나면 무엇을 할 것인가? 사실 만나지도 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대상이다.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생명체 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녀는 내 안에 뱀처럼 살아 숨쉬고 있다. 그녀의 숨결이 내 코 끝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녀를 품 안에 안지 못했기에 더욱 그리운 것일까? 그건 아닐 게다. 아마도 내 안에 만들어진 나의 젊은 날의 강렬한 동경들이 만들어 낸 하나의 환상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그녀는 나의 작품이다. 내가 만들어낸 가상 생명체이다. 그러하기에 나는 더욱 그 생명체를 내 속으로 끌어 당겨 일체가 되고 싶은 것일 게다.  하나의 가상 생명체가 또 하나의 다른 가상 생명체에 대해 느끼는 이 강력한 피-일링… 하나의 난자에 대한 정자의 집요한 탐색… 이것이 없었다면 생명체들의 영구회귀는 없었을 것이다. 사랑은 종족을 영구히 종속시키려는 강력한 본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진대… 그럼에도 우리는 그 감정에 목숨을 건다.  가정이 파괴되고 나라가 무너진다.  나의 2세 나의 3세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최문한 공의 후손들은 27대, 28대 29대로 이어지고 있다.

생명이란 과연 이다지도 질긴 것인가? 징그러운 것인가? 아니면 고결한 것인가?

 

최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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