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 없는 박물관’ 강화도

한반도 역사의 흐름이 고스란히 박제돼 이 땅의 생로병사가 다시 읽혀지는 곳

올 4월에 이어 두 달 만에 다시 한국을 방문한 나는 화남 (華南) 고재형 (高在亨: 1846-1916) 선비의 발자취를 따라 강화도에서 하루를 보냈다. 그는 20세기 초 심도 (沁都)라고 불리던 강화도에 살았던 인물이다. 시절이 수상하여 자신의 때가 아닌 줄 알고 스스로 섬으로 물러났던 것이다. 자신을 넉넉하게 안아주었던 곳은 세상이 아닌 자연이었으리라.

 

01_전 세계 고인돌 반 이상이 한반도에… 강화도에 50여기

그에 보답하고자 1906년, 섬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각 마을을 다니면서 그 마을에 얽힌 유래, 풍광, 인물, 생활상 그리고 관습 등을 주제로 한시를 지었다고 한다. 총 256수의 한시가 남아있는 책자가 <심도기행>인데 오늘날의 여행기라고 할 수 있다.

강화도는 한반도에서 일어난 역사의 흐름들이 고스란히 박제되어 있다. 그 안에 응집되어 있는 유전자를 분석해보면 이 땅의 생로병사가 다시 읽혀진다. 섬 전체가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는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강화는 물줄기 하나로 김포와 이웃하고 있다. 강화에 둥지를 틀고 사는 함민복 시인의 표현대로 ‘아파트들이 잘 자라고 있는’ 김포의 아라대교를 지나자 곧이어 구 강화대교 바로 옆에 누워있는 신 강화대교가 나타난다. 예성강, 임진강 그리고 한강이 만나는 이 물줄기는 수많은 역사적 사건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잘 흐르고 있다.

먼저 강화역사박물관 옆에 있는 전형적인 북방식 고인돌무덤을 찾아갔다. 무게가 무려 수 십 톤이나 되는 덮개돌이 하늘을 상징한다면 그것을 바치고 있는 두 개의 굄돌은 땅을 상징하고 그 사이에 막음돌로 양 입구를 막아 죽은 자의 몸을 뉘인다.

그런데 막음돌이 없다. 날씨가 원화한 한반도 남쪽에서는 막음돌 사이에 땅을 파서 죽은 자를 안치했으나 강화도에서는 날씨에 순응한 독창적인 변화를 만들어냈다.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는 고인돌 중 반 이상이 한반도에 있고 강화도에는 50여기가 있다고 한다.

 

02_몽골군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강화산성을 한 바퀴…

고인돌의 자재가 된 돌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바닷가와 가까운 뻘을 메꿔 간척지를 만드는데 사용되었고 지금도 간척지 조성은 진행 중이다. 고려가 강화로 천도를 했을 때는 이주민들이 급증하면서 더 많은 식량이 필요해서 간척을 했다.

조선시대에는 잦은 전쟁으로 수도권 방어를 강화하는 일환으로 해안가 돌출부에 일정한 간격으로 성채 형태인 돈대를 설치했는데 자연스레 해안선을 따라 성벽이 생기면서 간척이 된 셈이다.

오늘날에는 간척이 상업적 목적으로 진행 중이다. 한국의 섬 크기를 논할 때 강화도가 순위다툼을 하는 이유는 이 간척사업이라는 성장호르몬을 투여하는 것이 그 이유다.

신발끈을 동여매고 동서남북에 4개의 문이 있는 강화산성을 일주한다. 강화를 일목요연하게 이해하는 데는 몽골군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산성을 한 바퀴 도는 것이 우선이다.

더불어 상당한 체력을 요한다. 동문을 찍고 곧바로 북문으로 갔다. 가파른 길을 오르다 보면 오른쪽으로 개교한지 120년이 된 강화초등학교가 있고 그 위로는 북문이 있는 병풍처럼 들러쳐진 강화산성의 바로 아래가 13세기에 조성된 고려궁궐의 터가 있다. 말 그대로 ‘고려궁지’다.

 

03_끝이 없는 논들의 경계… 논농사가 강화도의 주된 경제활동 증거

이곳은 1232년 원나라의 침공을 피해 개경에서 강화도로 피난 온 고려 왕실이 만든 궁궐이 있었던 곳이다. 고려가 원나라와 화친을 통해 강화도에서 근 40년의 타향살이를 끝내고 다시 개성으로 돌아가면서 파괴를 해 그 당시의 건축물은 아쉽게도 볼 수가 없다.

대신 조선시대에 조성된 관아 건물 몇 채가 있을 뿐이다. 그 중 하나에는 조선시대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 (儀軌: 일종의 매뉴얼)를 비롯한 많은 서적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 의궤가 1866년 병인양요 당시 침입한 프랑스 군에 의해 약탈되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다행히 1970년 대 중반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이 의궤가 발견되어 반환운동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가파른 오솔길을 계속 오르니 북문이 보인다. 쉬지 않고 서둘러 북문 오른쪽으로 더욱 경사진 산성에 올라서야 이곳 풍경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개간이 된 넓은 평야에 펼쳐진 논들에 안겨 고만고만한 키를 가진 벼 이삭들이 한껏 푸른 빛을 뽐내고 있다.

시선을 멀리 둘 만큼 논들의 경계가 끝이 없다. 논농사가 강화도의 주된 경제활동이라는 증거다. 마음까지 푸르게 물들면서 땀에 젖은 몸도 한결 가뿐해졌다. 다시 북문으로 내려와 다음 행선지인 서문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04_북쪽으로 시선을 던지니 고려궁지가 명당에 자리잡았음이…

마침 사찰음식을 한다는 보살님을 만나 소나무 숲으로 이어지는 길을 동행했다. 야트막한 산에 안겨 키 재기를 하는 소나무들이 내뿜는 솔향이 방금 전 북문 산성에서 맡아본 쑥향과 더불어 내가 호주가 아닌 한국에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서문까지 계속되던 산성은 바로 오른쪽 옆으로 난 도로로 인해 허리가 잠시 끊겼다가 저 멀리 위로 보이는 남장대까지 계속된다. 조선 시대에 감시초소 역할을 한 남장대는 오르기가 힘들지 일단 올라가면 예성강과 임진강이 어떻게 한강과 만나 역사적으로 경제의 황금루트인 ‘조강’이 되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북한땅도 보여 잠시 상념에 젖어본다. 이곳 남쪽에서 북쪽으로 시선을 던지니 고려궁지가 명당자리에 터를 잡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남장대에서 남문을 향해 내려가는 방향을 잃어 두어 시간 헤맨 끝에 성산청소년수련원으로 난 길을 통해 겨우 산을 빠져 나왔다.

13세기 고려도 원이라는 중원의 새로운 강자에게 발목이 잡혀 길을 잃고 방황을 한 적이 있지 않았던가! 당시 원은 세계 최강의 나라답게 유럽뿐 아니라 동부 아시아 나라들에 공포의 대상이었다. 당시 고려는 무신들이 왕을 대신해 정치를 하던 무신정권 시대였다. 오늘날로 치면 군사독재정권 시대였던 셈이다.

최씨 가문이 휘두른 극심한 공포정치에 (2012년 드라마 ‘무신’에 잘 나타남) 무력해진 왕실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를 살피고 이해할 여유나 능력이 없었다. 대책 없이 고려는 무작정 강화로 천도를 결정한다. 이것이 바로 산에서 길을 잃은 일반인들이 공포심에 휩싸여 무작정 빨리 걷고 뛰면서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것과 흡사하다.

 

05_땀도 흡수하고 온기도 보존하는 성질로는 강화도 왕골이 최고

등산 경험이 있는 사람은 대책 없이 움직이는 대신 그 자리에 머무르며 방향을 살피고 힘을 아낀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과 배낭에 있는 식량도 살피면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다.

애석하게 고려는 그런 경험이나 지혜가 없었다. 물을 접해 본 적이 없는 몽골족이어서 다행히 강화는 적의 침공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왕이 자리를 비운 나라 전체는 원나라 군사들의 차지가 되어 그 피해가 실로 컸다.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을 겸해서 화문석 (花紋席) 문화관으로 갔다. 꽃 (화) 문양 (문)을 입혀 만든 돗자리 (석)인 화문석은 왕골을 재료로 쓰는데 그 왕골에 물을 들여 꽃무늬를 수놓고 한 올 한 올 엮는 수작업을 한다.

자연스레 화문석은 귀한 물건이 되는 속성을 지녔다. 왕골의 재료가 되는 사초파라는 풀은 생김새가 벼와 흡사하다. 올라오는 줄기에서 나는 잎 하나만을 쓰는데 땀도 흡수하고 온기도 보존하는 성질로는 강화도산 왕골이 최고라고 한다.

돗자리가 중심인 전통적인 공예품에서 벗어나 이제 왕골의 쓰임새는 다과그릇, 가방, 바구니, 모자 등 생활소품으로까지 다양화되고 있다. 나비 넥타이에 어울리는 왕골 소품 하나를 구입하면서 화문석 공예에 관여하는 모든 장인들에 더 많은 지원이 있길 바래본다.

 

06_북녘 땅… 논에서 일하고 있는 동족들과 동네와 집들까지 보인다

북한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는 ‘강화평화전망대’는 적을 제압하라는 다소 호전적인 의미를 지닌 제적봉 (制赤峰)이라는 언덕 위에 있었다. 이곳에서 개성공단까지의 거리는 지척이며 물길마저 남북으로 갈라진 조강 건너편 북한 땅이 불과 2.3키로 밖에 되지 않는다.

잠시 망원경을 빌려 북녘 땅을 보니 논에서 일하고 있는 동족들과 그들이 매일 생활하는 동네와 집들까지 보인다. 잠시 호흡을 고르며 이 자리에 서서 생각에 잠겼을 실향민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상상해본다.

이곳에서 군복무를 했던 한 해병 소령은 ‘가까우면서도 멀고 먼 강 건너에 아름다운 무지개 다리 놓아 단숨에 가고 오며 통일의 찬가를 부르리라’고 통일에 대한 열망을 시로 남기고 있다.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백성들의 고혈을 요구한 집권세력이 고려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존재하는 역사의 무서운 대물림에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낀다.

개성 송악산까지 보이니 그 당시 개성을 떠나 서쪽으로 가서 예성강의 물길을 따라 내 눈 바로 앞의 조강을 통해 내려왔을 고려 왕과 신하들의 행렬이 눈에 선하다. 풀이 무성한 지금도 북쪽의 산이 듬성듬성 벌거숭이인데 겨울철에는 얼마나 더 황폐한 민둥산이 될까?

 

07_면 12겹에 총알이 뚫리지 않는 ‘면제배갑’은 세계 최초의 방탄조끼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은 1900년에 축성된 건물인데 영국 교회 본부에서 궁궐 도편수 (목수의 우두머리)로 하여금 건물을 짓게 하여 한국전통양식을 가지고 있다. 밖에서 보면 영락없이 전통 한옥 건물인데….

용마루 위에 있는 십자가가 말없이 이 건물의 용도를 알려준다. 성당 오른편에 심어진 보리수 나무와 종에 새겨진 문양들을 통해 불교 사찰의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한 점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건물 전체를 밖에서 바라보면 배 모양으로 당시 강화의 주산업인 어업을 고려하였고 사용된 목재는 백두산에서 옮겨온 소나무를 썼다고 하니 조선인들의 마음을 얻어 외래 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완화시키고 천주교의 보급을 위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었다.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의 정석을 본 듯 했다. 성당 내부는 협소했지만 서양식과 동양식이 혼재되어 있어 포근한 느낌을 준다.

강화도에서 프랑스 공격을 당한 조선은 서양 군대의 총탄을 막아내기 위해 면으로 된 방탄조끼를 개발하였다. 1871년 신미년에 미국의 군대가 쳐들어오자 이 ‘면제배갑’을 실전에 투입한다. 면 12겹에 총알이 뚫리지 않음을 확인하고 만들어진 이 방탄조끼는 세계 최초라고 한다.

 

08_심도직물… 종업원 수 천명, 지역경제발전, 외화벌이 한 몫 했던…

그 때 미군이 가져간 면제배갑이 스미스소니언 (Smithsonian)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미군과 전투가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곳이 광성대라는 요새인데 이곳에는 장수를 뜻하는 ‘帥’ (수)자가 적혀진 깃발 즉 ‘수자기 (帥字旗)’가 어재연 장군의 지휘 하에 있었는데 전투에서 승리한 미군이 이 깃발을 가지고 가서 그 동안 미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이 되고 있었다고 한다.

프랑스가 장기대여형식으로 의궤를 한국에 돌려주었듯이 미국도 이 수자기를 한국에 돌려주어서 지금은 용산전쟁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전쟁을 통해 약탈해간 물건들을 주인행세를 하면서 선심을 쓰는 양 빌려주는 것을 보면 적박하장도 유분수다.

현재 방영 중인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신미양요로 시작이 되는데 면제배갑을 입은 조선 병사들이 등장하고 수자기도 보인다. 실제 그 전투에 참가한 미군 종군기자에 의해 찍힌 전투의 참상과 조선군 포로들 사진들이 강화전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드라마는 이 사진들도 보여주고 있다.

강화에는 심도직물이라는 대표적인 향토기업이 있었다. 전성기에는 종업원이 수 천명에 달하여 지역 경제발전은 물론 외화벌이에도 한 몫을 하였다고 한다. 2005년까지 국내굴지의 직물회사로 명성을 떨치던 심도직물의 건물터는 이제 용흥궁 공원의 한 귀퉁이에 표석과 더불어 직물기계 그리고 굴뚝 하나가 그 당시 영광을 대변해주고 있다.

이 공원 이름은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살았던 집인 용흥궁 (龍興宮)에서 유래한다. 경내에는 철종이 어린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다는 글이 새겨진 비각이 있는데 ‘哲宗朝潛邸舊基’ (철종조잠저구기: 철종의 사저가 있던 옛 자리, 그리고 세자에 책봉되지 않은 왕자로서 궁궐에서 나가 살다가 뒤에 왕이 되어 입궐하면 그 동안 살았던 사저를 일컬어 잠저라고 한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강화는 역대 왕조들이 선호한 귀양지였다. 권세를 부리다 하루아침에 죄수의 몸이 된 양반들에게 강화 지역 주민들은 함부로 하대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화의 끝마디에 ‘겨’를 붙인 것이 고육지책으로 나온 발상이었다고 하니 재미있다.

 

09_어서오시겨… 어제는 멀고 오늘은 낯설며 내일은 두렵다

‘어서오시겨 강화’는 2018년을 강화군이 ‘올해의 관광도시 강화’의 일환으로 내세우고 있는 초청인사다. 이에 발맞추어 강화군은 군민들과 힘을 합쳐 야심 차게 여럿의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 중 강화직물공장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골목여행을 하는 소창길 체험은 이색적이다. 소창이란 면직물인데 우리 어릴 적 엄마들이 사용했던 기저귀가 소창원단이다.

1970년대에는 수 십 개의 크고 작은 직물공장들이 전성기를 누렸으나 이후 합성섬유 중심의 생산체계가 구축된 대구로 직물산업의 주도권이 넘어가면서 강화의 소창산업은 사양길을 걷게 되었다. 소창길 체험은 400년 전부터 강화 농가의 부녀자들이 부업으로 시작한 강화의 직물 전통을 몸소 느껴 볼 수 있는 기회인 셈이다.

‘어제는 멀고 오늘은 낯설며 내일은 두렵다’는 구한말 격변의 시대를 대변하는 이 말이 오늘날 한반도를 중심으로 중국, 일본, 러시아 그리고 미국이 보이는 속내를 보면 이해가 된다.

강화도를 방문하여 역사를 되돌아보니 지난날 일들도 모두 포근하고 가깝게 느껴졌다. 결국 현재의 상황 역시 역사를 통해 이루어진 것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앞으로 쓰게 될 미래의 역사를 우리는 두려움 없이 잘 준비할 수 있겠는가?

 

글 / 박석천 (글벗세움 회원·찰스스터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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