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세비야와 바르셀로나의 건축미학

거리낌 없는 분위기가 모방이나 재현 불허하는 독창적인 건축미로 승화됐을 터

스페인에서는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이동할 때 여행자의 형편에 따라 버스나 기차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남쪽에 있는 그라나다 (Granada)와 코르도바 (Cordoba)를 섭렵한 후 이번에는 그 동안 이용했던 국내선 비행기나 버스 대신에 기차를 타고 120킬로미터 떨어진 세비야 (Sevilla)로 향했다.

 

01_볼거리 많고 큰 도시 세비야는…

사실 세비야는 볼거리가 많고 큰 도시라 대부분 여행객들은 세비야를 중심으로 코르도바를 하루 정도 다녀오는 여정으로 한다. 그런데 나는 거꾸로 코르도바에서 콜롬버스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세비야로 간 셈이다.

또한 그 동안의 숙소와는 다르게 세비야에서는 에어비엔비로 찾은 가정집에서 보냈다. 이 숙소는 예상과는 다르게 맘에 들었다. 숙소는 은퇴한 부부가 함께 운영하는데 아담한 마당이 딸린 아래층 침실은 호텔 못지 않았다.

특히 아침식사는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맛볼 수 있는 온갖 종류의 빵, 과일, 치즈 그리고 하몽 (돼지 뒷다리를 염장하여 건조시킨 햄)까지 상 가득 준비되어 있었다. 남편은 여행객들의 온갖 질문에 전혀 싫어하는 기색 없이 친절하게 대답해주었고 부인은 4개 언어를 구사하면서 세계 곳곳에서 온 여행객들의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해주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스페인은 근대화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들은 16세기 대항해 시절 지구 곳곳을 침략하여 만든 식민지로부터 벌어들인 부를 기반으로 발전되고 축적된 기술과 문화를 전세계에 과시하고 싶어했다.

식민 지배를 받은 남미 여러 나라를 중심으로 총 23개국을 초청하여 1929년에 성대한 박람회를 세비야에서 열었다. 물론 참가한 나라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한 이유도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선전에 불과했다.

 

02_아니발 곤잘래스와 스페인 광장

참가한 각 나라들은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이 돋보이는 건축물들을 지었고 스페인 또한 주최국으로 그 당시 세비야가 낳은 최고의 건축가인 아니발 곤잘래스 (Anibal Gonzalez)를 초빙하여 많은 돈을 들여 만든 것이 ‘스페인 광장 (Spain Square)’이다.

곤잘래스는 세비야에 많은 건축물을 남겨 ‘세비야를 만든 장본인 (The man who built Seville)’이라는 호칭까지 받고 있다. 반원 형태의 이 광활한 광장을 둘러싼 것은 붉은색의 벽돌로 지어진 르네상스와 이슬람 양식이 섞인 고풍스런 건축물인데 남쪽과 북쪽 끝에는 높은 탑이 있다.

빌딩 앞으로는 반원형의 곡선을 따라 만들어진 500미터 정도의 운하 위로 4개의 다리가 걸려 있다. 작은 배를 빌려 호젓하게 운하를 따라 노를 저어가는 관광객들을 보노라면 세비야에 작은 베니스가 있는 느낌이다. 전체적으로 스페인 내음이 물씬 나는 광장은 한 가운데 있는 분수대와 더불어 관광객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한 마력을 지녔다.

광장을 둘러싼 건물 아래 벽에는 스페인 각 지역들 지도와 상징들이 세라믹 타일을 이용한 모자이크 기법의 벽화로 그려져 있어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피는 재미가 쏠쏠하다. 물론 이슬람 사원에서 보이는 모자이크 문양의 타일에 비하면 그 격이 떨어지지만 이 너른 광장에서는 묘하게 고급스런 격조를 느낄 수 있었다.

 

03_독창성 마음껏 펼친 건축가의 이단아 안토니 가우디

곤잘래스와 거의 비슷한 동시대에 살았던 다른 건축가는 안토니 가우디 (Antoni Gaudi)이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Andalucia)의 중심도시 세비야를 곤잘래스가 대표하듯이 가우디는 스페인 북동쪽 즉 지중해와 인접해 있으며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기를 원하는 반골지질이 강한 카탈루냐 (Catalonia) 지역 중심 도시인 바르셀로나 (Barcelona)에서 자신의 독창성을 마음껏 펼친 건축가의 이단아로 불린다.

그는 일반 건축가들이 보지 못한 특이한 방식으로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었던 사람이다. 오로지 경험과 직관을 통해 수학의 눈으로 건축물을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물은 당연히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Sagrada Familia)’이다.

숙소에서 가까워 걸어서 도착한 성당은 명성대로 입장하려고 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한참을 기다려 들어가서 둘러본 성당 내부는 가우디의 혼이 담긴 거대한 작품이었다. 그는 자연이 지닌 율동성, 역동성 그리고 다채로움이 건축물에 최대한 드러나게 하려고 했는데 그 방식에는 수학을 숫자가 아닌 구조와 공간으로 본 가우디만의 시각이 있었다.

작업실 너머로 보이는 나무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지만 가우디는 어쩌면 자연미와 인공미 사이에 분명 존재하는 괴리를 인정하고 메우려는 자세를 취했을 것이다. 20대 젊은 시절 등산클럽에 가입해 카탈루냐 지역과 가까운 프랑스 남부를 여행하면서 흠뻑 즐긴 자연이 자신의 작품 속에 융복합되어 나타난 셈이다.

그리하여 여러 각의 모양을 띤 한 줄기의 기둥이 올라갈수록 여러 가닥으로 나뉘면서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형상화했다. 거기에는 꼭지점이 많을수록 원에 가까이 되는 수학의 기본이 깔려 있었다. 그가 후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한 절제되고 예민하고 강렬하고 세련된 이미지는 천장에서 한껏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이 증명하고 있었다. 그가 또 평범한 사람들을 사랑했다는 사실은 성당 입구에 조각된 수많은 그 당시 일반인들의 얼굴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04_세비야 대성당 입구에서 보이는 어마어마한 관광객 행렬에…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라는 그의 철학은 카사 밀라 (Case Mila)나 카사 바트요 (Casa Batllo)에서도 나타나 있다. 창문 틀뿐 아니라 발코니까지 파도의 곡선 형태로 만들었다. 건물 외부에서 시작된 굽이치는 굴곡들은 내부와 옥상에까지 이어져 건물이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또 다른 작품은 ‘구엘 공원 (Park Guell)’에서 만날 수 있었다. 스페인에 불어 닥친 산업혁명 시기에 큰 돈을 거머쥔 구엘은 가우디에게 바르셀로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공원을 조성하게 했는데 가우디는 그 안에 온갖 상상력이 동원된 자신의 작품들로 가득 채웠다.

기울어진 기둥을 보면서 남과 닮지 않으려는 가우디의 성품을 엿볼 수 있었다. 모든 기둥은 반드시 수직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과감하게 탈피하여 기울어진 기둥의 혁신을 공원 내 여러 도보를 떠받치는 기둥에 적용했다. 마주하는 힘이 서로 다를 경우에도 균형을 잡게 할 수 있는 ‘균형의 기적’을 이룬 작품들이다. 여기에도 공간과 변화의 변수를 활용한 수학의 개념이 여지없이 적용된 셈이다.

불과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스페인광장이 이 정도의 매력을 지녔는데 16세기 초에 완성이 되었고 전 세계 교회건물 중에서 크기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콜롬버스의 관이 있는 고딕 양식의 ‘세비야 대성당 (Seville Cathedral)’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입구에서 보이는 어마어마한 크기와 너무도 긴 관광객 행렬에 가위 눌려 나는 바로 ‘황금의 탑 (Tower of Gold)’으로 갔다. 코르도바에서 본 과달퀴비르 (Guadalquivir)강이 이곳 세비야까지 흘러 드는데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던 무슬림 왕조는 13세기 초 이 강변에 12각형의 독특한 형태의 탑을 세워 기독교 외부침입자를 감시했다.

 

05_깎아지른 절벽 아찔한 협곡 지나는 거대한 누에보 다리는…

그러나 애석하게도 얼마 못 가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슬림 왕조는 무너지게 된다. 모타르 (mortar)와 라임 (lime) 그리고 건초를 섞어 만들어진 탑은 햇빛을 받으면 강물 위에 황금색으로 투영이 되는 바람에 이름이 이렇게 불린다.

 

다음 날 세비야를 벗어나 버스로 두 시간 걸리는 론다 (Ronda)로 교외 나들이를 했다. 이 도시는 헤밍웨이가 자신의 작품 속에 넣은 곳이기도 하고 미국의 영화감독인 올슨 웰스 (Orson Welles)가 죽어 묵힌 곳이기도 하다.

론다에 가진 애착이 이 두 사람에게는 유난히 컸으리라. ‘모름지기 남자에게 고향이란 태어난 곳이 아니라 죽어 묻히고 싶은 곳’이라고까지 웰스는 말하지 않았는가. 스페인 투우의 발상지인 론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투우까지 열렬하게 사랑한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의 주특기인 소설과 영화에 론다를 반영했다.

1980년 5월 18일부터 열흘간 광주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상황을 가지고 작가 한강이 ‘소년이 온다’라는 소설을 만들었듯이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스페인 내란 당시 실제 론다에서 일어난 다리 폭파사건에 상상력을 입혀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 두 사람의 동상을 보면서 론다가 이들을 관광 산업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활용하는지 알 수 있었다.

또한 론다는 1700년도 중반에 만들어진 아찔한 협곡을 지나는 거대한 ‘누에보 (Nuevo) 다리’를 가지고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깎아지른 절벽 위로 덕지덕지 지어진 하얀 색깔의 집들을 바라보면 꼭 새끼 원숭이가 엄마에 품에 달라붙어 있는 모양이 연상된다.

 

06_몬주익 언덕에서 황영조 선수를 만나다?!

이 다리로 인해 이슬람 마을인 구도시와 기독교 마을인 신도시가 연결 되었는데 협곡 아래로 내려가면 강물의 흐름을 조절하여 만들어진 대중 목욕탕의 유적지가 있다.

이 목욕탕은 로마시대에 만들어져 이슬람 왕조 시대에 전성기를 이룬 것인데 물이 각 방으로 흘러 들게 하면서 열기를 보존하게 한 방식은 그 당시 기준으로는 신기술이었음에 틀림없다. 절벽 위에 자리잡은 식당에서 악사들이 연주하는 명곡들을 안주 삼아 소꼬리찜을 점심으로 먹는 것도 추천할 만하다.

1992년 황영조 선수는 안간힘을 다해 바르셀로나 ‘몬주익 (Montjuic) 언덕’을 올라 마라톤 우승을 차지했지만 나는 편하게 버스로 올랐고 내려올 때는 전철을 탔다. 미안한 마음에 황 선수의 달리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 기념비 앞에서 달리는 모습으로 사진을 찍어본다.

사실 몬주익 언덕에 올라가는 방법은 또 있다. 일단 바르셀로나 해변에 가서 스페인 사람들이 어떻게 바다를 즐기는지 눈요기를 한 다음 그곳에서부터 케이블카를 타고 언덕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시내에서 가까운 바닷가에서 거리낌없이 상의를 드러내는 여성들을 보노라면 자유분방한 유럽 여성들의 성향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거리낌 없는 분위기가 모방이나 재현을 불허하는 독창적인 건축미로 승화되지 않았을까?

 

글 / 박석천 (글벗세움 회원·찰스스터트대 교수)

Previous article호주의 와일드 라이프
Next article‘~밖에 없다’ 의미하는 ‘~しか~ない’ 표현 배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