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그림과 함께 호흡해왔고 이를 뒷받침해준 건 사랑과 모정이었다”

꽃과 여인의 화가라 불리는 천경자 (본명: 천옥자 1924-2015)는 전통적 동양화 기법의 틀을 부수고, 환상적인 색감의 채색화로 자신만의 화풍을 확립한 화가이다. 채색화를 왜색풍이라 폄하하던 해방 이후 1960년대까지의 시대적 상황과 수묵화가 주류를 이루는 동양화단의 배척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채색화를 고집해온 까닭이다.

 

01_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선정

그녀의 독자적인 작품세계는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가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으로 선정할 만큼 한국화의 채색화를 발전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동양화 기법을 사용했으나 이국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의 그녀의 그림은 서양화의 야수파에서 보여지는 생생한 칼라와 고갱의 타이티 여인을 연상시키는 단순한 선으로 이루어진 ‘천경자 화풍’이라는 독자적인 하나의 장르를 탄생시켰다.

대표작으로 ‘생태’, ‘길례언니’,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등 많은 작품들이 있고, 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한>, <유성이 가는 곳>등 10권이 넘는 저서를 내 수필가로서도 대중적 인기를 모았다.

꽃과 여인, 뱀 등의 소재를 통해 보편적인 여인의 한과 정서를 담아내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과 꿈, 환상을 작품 속에 투영시켜 자전적인 그림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는데, 그녀는 꽃과 여인이라는 중심적 이미지 속에 내면의 의식의 흐름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자신의 삶 속에 맺힌 한과 미지의 세계를 향한 이루어질 수 없는 꿈과 동경을 녹여내고 있다.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곧 그녀의 분신이다. 그것들은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인 여인의 한을, 또 허망한 고독감을 온몸으로 표출하고 있다. 천경자를 ‘한국의 프리다 칼로’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깊은 한은 폐쇄된 유교사상이 지배적인 동양의 한구석 조그만 나라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두 번의 결혼과 동생의 죽음, 경제적인 어려움 등 다난한 현실 속에서도, 온 몸으로 부딪쳐가며 강인한 의지로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며 살아가는 중에 사리처럼 몸에 쌓인 그녀만의 보석이리라.

 

02_1942년 외할아버지 모델로 한 조부로 선전에 입선

전라남도 고흥의 부유한 농가에서 1남 2녀중 큰 딸로 태어난 천경자는 외가에서 자라며 외조부의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외할아버지는 그녀를 귀애하여 ‘옥자’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항상 끼고 다닐 정도였다. 아마도 이때 받은 큰 사랑이 평생 보답 받지 못할 사랑이라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그녀의 본질을 만든 것 같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 아이는 고흥보통학교와 전남여고를 다니며 화가의 꿈을 키웠다. 여고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시키려는 아버지에 맞서 미친 척을 하며 버티다 결국엔 허락을 받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1941년 도쿄 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해 뎃생과 채색법을 배웠는데, 이때 만난 선생이 조선 사람이니 조선인을 그리는 것이 정서를 더 잘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조언을 해주며 작품의 방향을 잡아주었다.

이에 따라 그녀는 1942년 외할아버지를 모델로 한 ‘조부’로 선전에 입선하고, 1943년 외할머니를 그린 졸업작품 ‘노부’로 마지막 선전에 입선하였다. 이 시기의 화풍은 사실적인 인물묘사에 충실한 고전적 동양화의 모습으로 아직 그녀만의 독특한 화법은 개화하기 전인 것 같다.

 

03_‘생태’는 자신의 고통, 고뇌, 슬픔 뱀 무더기에 담아낸 작품

1944년 불안한 정세 속에 귀국길에 오른 천경자는 배표를 못 구해 안달하다 이철식을 만나게 되었는데, 표를 구해준 그와 인연이 되어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첫 딸과 둘째 아들을 얻었지만 이 결혼은 얼마 못 가 파경에 이르렀고, 625전쟁 때 남편의 실종으로 그나마 인연이 끝나버렸다. 해방과 전쟁 등 혼란한 사회환경에서 홀로 두 아이를 키워야 했을 뿐만 아니라 여동생을 폐결핵으로 먼저 떠나 보내는 충격과 아픔 속에서 그녀가 느꼈을 절박함과 막막함이 어떠했을까?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고통과 고뇌, 슬픔, 이 모든 것을 꿈틀거리는 뱀 무더기에 담아낸 작품이 바로 1950년 그려진 ‘생태’이다. 실제로 며칠이고 뱀 집 앞에 서서 유리상자에 담긴 뱀을 관찰하며 스케치를 해 완성한 이 작품은, 뱀 한 마리, 한 마리를 그릴 때마다 삶의 고단함에서 오는 화가의 한을 끄집어내어 뱀으로 변화시켜 던져놓은 것만 같다.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그것을 잊기 위해 징그러운 뱀을 그려야만 했던 처절한 여인의 한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작품이다.

33마리의 뱀이 품고 있는 한과 고독. 그러나 위에 그려진 두 마리의 엉켜있는 뱀은 자신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두 번째 인연을 향한 사랑의 메시지이다. 고통 속에서도 피어나는 금지된 사랑이 애처롭고, 무심한 남자를 향한 보답 받지 못하는 사랑이 엉켜있는 뱀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작품은 1952년 피란지인 부산에서 연 개인전에 내어 화단의 주목을 받고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04_평화로운 한때 보내는 단란한 가족 모습 담긴 목화밭에서

여인으로서 천경자의 삶은 참으로 기구하다고 할 수 있겠다. 첫 결혼의 실패 후 자식들과 어렵게 살던 그녀는 개인전을 열 때 두 번째 남편이 된 신문기자 김남중을 만나게 된다.

팍팍한 삶에서 훤칠하고 인기 많은 김남중 과의 만남은 새로운 삶의 활력소가 되었고, 걷잡을 수 없이 그에게로 빠져들었지만 그는 이미 가정이 있는 사람이었고 주위에 여자들도 많아 가슴조린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무심한 그를 향한 해바라기에도 불구하고 김남중 역시 그녀가 준 사랑에 가시가 되어 보답한 인간이었다.

1954년 제작된 작품 ‘목화밭에서’는 목화꽃이 만발한 목화밭에서 한가로이 누워있는 남자가 있고, 아기를 안은 여인이 사랑스런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고 있다.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단란한 가족의 모습이 담긴 이 그림은 화가 자신이 그리던 가족의 모습이었다. 화면의 색상조차 전체적으로 밝고 화사해 행복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화가의 정의를 보여주는 것 같다.

 

05_꼭 안고 있는 검은 고양이는 마지막 희망, 예술 향한 삶의 의지

그러나 그녀의 바람과 달리 김남중 과의 관계는 평탄치 못했다. 9월에 딸을 낳았으나 김남중은 본가에서 득남을 하자 발길조차 끊었다. 개인전 후 그림을 판 돈 25만환과 김남중이 보태준 5만환으로 광주에 집을 샀었는데, 팔려고 내려가니 집문서를 맡겼던 김남중이 이미 팔아버려 아무것도 손에 쥘 수 없게 되었다. 살고 있던 청파동 셋집마저 집을 비우라 하자 사면초가에 앞길이 막막해졌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는 좌절하지 않고 울면서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울면서 그려진 ‘정’은 시든 해바라기 밑에서 검은 고양이를 안고 혼자 앉아있는 소녀를 그린 작품이다. 위에서 그녀를 둘러싸고 내려다보는 시든 해바라기의 벽은 그녀를 향해 이를 드러낸 현실의 무게처럼 그녀를 옥죄고 있는 것 같다.

불안하게 뒤를 돌아보는 소녀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화가의 내면이 애처로운데, 구원처럼 꼭 안고 있는 검은 고양이는 그녀를 지탱해주는 마지막 희망, 예술을 향한 삶의 의지로 보여진다.

이 작품은 1955년 대한 미협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고, 이로 인해 그녀는 젊은 나이에 교수와 화가로 확고한 위치에 올랐다. 절망의 밑바닥에서 한줄기 빛처럼 주어진 작품의 인정은 혹독한 현실 속에서 항상 치열하게 삶과 부딪쳐간 그녀에게 주어진 아름다운 선물이라 하겠다.

 

06_‘길례언니는 세파에 휘둘리지 않은 밝고 청순한 분위기를

그녀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길례언니’는 1973년에 그려진 세로 33.4cm, 가로 29cm의 종이바탕에 그녀만의 독특한 색감으로 채색된 작품이다. 어린 시절 교정에서 열린 박람회장에서 본 길례언니는 그녀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학교 졸업 후 소록도 나병원 간호사로 일하던 그녀가 노란 원피스에 흰 챙이 달린 모자를 쓰고 온 것을 본 작가가 자신의 상상력을 더해 영원한 청춘의 모습으로 이미지화 시켰다.

모자 위에 색색의 장미를 얹고 있는 화사하고 아름다운 여인은 꿈과 사랑을 담뿍 담은 채 붉은 입술로 청춘을 노래하는 것 같다. 노란색 배경 속에 피어난 꽃들의 화려한 색과 나비의 푸른색이 대조를 이루어 꽃들 하나하나가 살아있어 그녀 앞에 놓인 인생의 찬란함을 찬양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직은 세파에 휘둘리지 않은 밝고 청순한 분위기가 작품전체에 떠돌고 있고, 우리 모두에게 주어졌던 시간들이 청춘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그 안에 있다. 아마도 이 그림을 그릴 당시 화가는 이미 잃어버린 청춘의 시간을 화면 속에 재현함으로 빛나던 그 시절을 추억했던 건 아닐까?

 

07_‘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큰 애착 가지고 자화상이라 명시

1977년 그려진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역시 자신의 젊은 날 22세의 모습을 그린 자전적인 그림이다. 머리에 뱀을 이고 있는 여인은 천경자 자신이다.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한 여인의 인생에서 커다란 변화를 겪는 시점에서의 자신의 모습이다.

인생의 한 고비를 넘어가는 순간의 불안과 설렘, 다가오는 현실의 무게를 견뎌내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강인한 의지가 담겨 있다. 이 작품은 화가의 22세의 과거와 50대에 이르러 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현재가 혼재되어 있는 것 같다.

네 마리의 뱀은 그녀가 낳은 네 명의 자식들, 그녀가 이고 가야만 했던 가혹한 현실로 보여 진다. 혼자 몸으로 네 명의 자식을 부양하며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던 그녀의 처지가 그 속에 녹아있는 것만 같다. 힘들고 고단한 삶은 머리 위에 인 뱀처럼 그녀를 옭아매고 있지만 현실에 굳건히 뿌리박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의연하기만 하다.

다른 여인상과는 달리 어둡고 차분한 색감의 화면은 그녀의 환경을 나타내는 것 같다. 자칫 무겁고 우울할 수 있는 화면 앞 정면에 보이는 장미 한 송이는 그녀의 숨통을 트이게 하는 하나의 희망, 예술이리라.

천경자는 이 작품에 큰 애착을 가지고 직접 자신의 자화상이라 명시했을 뿐만 아니라, 1978년 9월 현대화랑에서 개최한 개인전의 홍보용 표지로 채택하고, 후에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였다.

 

08_코끼리 위에 엎드린 나부는 현실에서 벗어나고픈 자신의 모습

이제까지의 그림이 자신의 삶과 체험 속에 녹아있는 내면의 갈등을 표현해 자전적인 요소가 많았다면, 40대 중반인 1969년 이후에는 유럽과 남태평양을 시작으로 30여 년간 이어진 해외여행을 통해, 이국적 정취를 표현하고 자신의 꿈과 낭만을 실현시킨 여행 풍물화라는 당시로선 이색적인 장르를 개발하였다.

여행을 하다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몇 개월씩 머무르며 그 곳의 정취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마치 보헤미안처럼 또다시 다른 나라를 향해 떠나 새로운 문물을 화폭에 담았다. 그녀의 방랑벽과 자유를 향한 끝없는 도전은 그녀의 예술혼을 일깨워 수많은 여행 스케치와 여행집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다.

1978년 제작된 ‘초원 2’는 세로 105.5cm, 가로 130cm의 대작으로 넓고 광활한 아프리카 사막에 펼쳐진 오아시스와 그곳에서 한가로이 노니는 코끼리, 사자, 얼룩말 등을 그린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화이다.

코끼리 잔등에 엎드린 나부의 모습은 자연과 동화되어 한낮, 아프리카의 정취에 흠뻑 빠진 작가 자신의 모습인 것 같다. “나는 그대로 나의 슬픈 눈망울만 내놓은 채 사막을 달리고 싶었다. 지구에서 하염없이 짓밟혀온 콩알만한 존재의식 때문에 스스로 내가 가엾어진 것이다. 그렇다. 사막의 여왕이 되자. 오직 모래와 태양과 바람, 그리고 죽음의 세계뿐인 곳에서 아무도 탐내지 않을 고독한 사막의 여왕이 되자.”

그녀가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 중에서 말한 것처럼 코끼리 위에 엎드린 나부의 모습은 자신을 짓누르는 현실에서 벗어나고픈 작가의 모습이었으리라

그녀는 아프리카 초원과 그 속에서 무심히 자연을 살아내고 있는 이 동물들과 한 몸이 되어있는 것 같다. 이 작품 안에서 그녀는 이미 사막의 주인이고 여왕인 것이다.

 

09_1991미인도위작 사건으로 큰 충격, 스스로 붓 꺾고…

왕성한 작품활동을 펼치던 천경자는 1991년 일어난 ‘미인도’ 위작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아서 스스로 붓을 꺾고 미국으로 요양을 떠났다.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화가의 주장을 못 믿고 진품판정을 내린 한국의 미술계에 환멸을 느낀 것이다.

후에 프랑스 판정단이 ‘미인도’는 위작이 확실하다는 판정을 내린 걸 보면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녀는 1995년 귀국해 호암갤러리에서 첫 번째 회고전을 열었는데, 한 달 동안 8만명이 다녀갈 정도로 큰 사랑을 받았다.

1998년 건강악화로 다시 뉴욕 큰딸에게로 갔던 그녀는 11월에 다시 돌아와 본인이 소장했던 채색화와 드로잉 93점을 서울 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2003년 뇌일혈을 일으켜 거동을 못하게 되자 작품활동도 중단되었지만, 2006년 갤러리 ‘현대’에서 장녀 이혜선의 협조로 각지에 흩어졌던 작품들을 모은 대규모 개인전이 열렸고, 2007년에는 <천경자-그 생애 아름다운 찬가>라는 화집이 발간되었다.

천경자는 말한다. “중략… 나의 과거를 열심히 살게 해준 원동력은 ‘꿈’과 ‘사랑’과 ‘모정’이라는 세 가지 요소였다고 생각된다. 꿈은 그림과 함께 호흡해왔고, 꿈이 아닌 현실로서는 늘 내 마음 속에 서식을 해왔다. 그리고 이것을 뒷받침해준 것이 사랑과 모정이었다. ‘영원히 미완성이 될지 모를 꿈을 향해’ 쓰라린 고배와 불운을 감수해야 하기도 했었다.” -<꿈과 바람의 세계>중에서-

화려한 색채 속에 숨어있는 한 여인의 고독과 한, 고단한 삶의 역사는 우리의 가슴 깊은 곳에 공명을 울린다.

 

※ 다음은 영원한 동심의 작가 장욱진 편으로 만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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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미셀 유 (글벗세움 회원·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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