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위해 태어나고 예술 위해 살다 예술 향해 온몸 불사르고 떠나

한국의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서양화가 이중섭 (호: 대향, 1916-1956)은 박수근과 함께 한국 근대 서양화의 양대 거목으로 불리며 그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중섭의 ‘소’는 누구나 알 정도로 우리에게 친숙한 화가이다. 야수파 풍의 격렬하고 거친 붓놀림과 대상을 단순화한 간결한 선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조형세계를 이뤄낸 이중섭은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향토적인 그림, 피난시절의 생활상, 사랑하는 아내를 향한 이별의 아픔과 가족을 향한 그리움을 주제로 다양하고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01_가슴으로 끌어안은 시대의 아픔 특유의 화법으로

일본의 압제와 해방, 한국전쟁이라는 시대의 격랑 속에서 어려운 시절을 살아가야 했던 그는 그 속에서 피어나는 개인적인 삶의 기쁨과 고뇌뿐만 아니라 그가 가슴으로 끌어안은 시대의 아픔을 특유의 화법으로 생생하고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아직까지 산수화, 풍물화 등 한국화가 주류를 이루고 서양문물을 받아 들인지 얼마 안 되었던 그 시점에서 서양화, 그것도 새롭게 등장해 한국 미술계에 생소한 야수파의 기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이루어낸 그의 천재적인 예술성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02_오산학교에서 임용련에게 그림 배우며 본격적으로…

이중섭은 1916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부유한 부농의 유복자로 태어났는데 3남매 중 막내로 형, 누나와는 열 살 이상 터울이 져 어울리지 못하고 내성적인 성격이라 혼자 그림을 그리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림에 특히 뛰어난 자질을 보였던 그는 학교생활 중에도 광에 숨어 그림을 그릴 정도로 그림에 심취했고 보통학교에서 서양화가 김찬영의 아들인 김병기를 만나 친하게 되어 처음으로 유화도구와 물감, 서양화집들을 접하며 미지의 세계인 서양화의 세계로 입문하게 되었다.

보통학교 졸업 후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오산학교에 들어가 화가 임용련에게 그림을 배우며 본격적으로 서양화를 공부했는데 그의 스승 임용련은 후기 인상파 경향의 화가로 예일대에서 공부하고 파리에서 활동한 그 시대에 보기 드문 화가로 이중섭은 그에게서 색채의 사용, 조형의 기초, 구성 등 필요한 기법을 배우며 성장해갔다.

 

03_이남덕’과 ‘아고리’의 운명적 만남?!

1936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스승 임용련의 권유로 도쿄제국미술학교로 유학을 간 이중섭은 곧 도쿄문화학원으로 옮겼고 1941년 그곳에서 그의 평생의 사랑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나게 된다.

일본의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난 아름다운 마사코와 식민지의 부농에서 자라 예술을 하는 청년 이중섭의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이중섭은 그녀에게 남쪽에서 온 덕이 많은 여자라는 의미의 ‘이남덕’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마사코는 그가 턱이 길다고 ‘아고리’라는 별명을 지어주며 서로 사랑을 키워나갔다.

일본이 패전하고 한국인과 일본인의 처지가 바뀌고 서로가 적국의 국민이었지만 이들의 사랑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1945년 한국으로 건너와 결혼해 가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행복한 시간도 잠시뿐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들은 또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피난을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제주에서 보낸 1년간은 그들에게 천상의 낙원이었다.

먹을 것이 없어 게를 잡아먹고 한 평이 안 되는 골방에서 네 식구가 살 수밖에 없는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함께 있는 한 그들은 행복했다. 후에 생활고로 어쩔 수 없이 가족을 일본으로 떠나 보낸 후에도 중섭은 200통이 넘는 편지를 거의 매일 썼을 정도로 그들의 사랑은 세월과 국경을 뛰어넘는 절절한 부부애로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04_표호로 억눌린 감성 표출, 민족작가 반열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듯이 일본의 압제와 문화말살 정책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의 선각자들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급변하는 세계정세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예술의 꽃을 피워냈다.

그것은 전쟁의 막바지에서 발악하는 일제의 횡포 속에서 말살되는 인간의 존엄성과 개성을 표현하고 나라 없는 서러움 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가족 간의 사랑과 그리움을 그리고 황소의 옹골찬 근육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노의 표호로 억눌린 감성을 표출했다. 이러한 민족의 정기를 담은 작업은 그를 진정한 민족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하였다.

어린이, 소, 가족, 물고기, 달, 새 등 전통적이고 향토적인 소재들을 다양한 기법과 매체를 사용하여 그려낸 그의 작품 중 가장 대표적인 소재는 ‘소’라 할 수 있겠다.

가족과 헤어져 통영에 머무르던 시절, 10호 가량의 작은 싸이즈로 그려진 ‘소’ 연작은 그의 예술에 정점을 이룬 위대한 작품으로 강렬한 선으로 이루어진 형태의 표현과 거친 붓 터치로 앞발에 힘을 모으고 앞으로 튀어나갈 듯 한 소의 모습을 보면 작가의 내면 속에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분노와 폭발하는 열정을 느낄 수 있다.

“작가의 격렬함과 집념, 우직함과 자연스러움, 야만성, 고뇌와 연민, 환상과 방랑성, 갈망, 광기 그 모든 것을 다 담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김인화/ 공간)는 말처럼 그림에서 뿜어 나오는 에너지와 생동감, 포화된 감정의 분출이 그대로 가슴에 꽂히는 듯하다.

 

05_가족과 헤어져 그리워하는 아버지 마음 고스란히

그는 또한 아이들을 주제로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큰 게와 어린이’와 ‘바닷가의 아이들’ 그리고 ‘물고기와 아이들’ 등 서귀포 바닷가에서 벌거벗고 천진난만하게 뛰노는 아이들을 주제로 그 속에서 느껴지는 행복과 평화로운 모습을 표현한 것 같다.

세상은 전쟁으로 죽음과 절망이 휩쓸었지만 그 속에서도 제주에 피난 온 이중섭은 그나마 그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을 시기를 보내게 되었고 사랑하는 가족과의 한때를 끊임없이 그림으로 남겼다.

‘해와 아이들’은 생활고로 일본으로 떠난 아내와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1952년과 1953년 사이에 그려졌다. 종이에 연필과 유채로 그려진 이 작품은 대담하고 선명한 연필선으로 자유롭고 다양한 포즈의 인물들을 단순화시키고 그 위에 유화물감을 엷게 입혀 이중섭 특유의 기법을 사용했다.

주황색 태양의 미소를 둘러싸고 여러 아이들이 즐겁게 놀고 있는 모습이 마치 커다란 태양이 아이들을 보듬어 안고 있는 듯 따뜻한 색감과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포근하게 느껴진다.

먼저 세상을 떠난 큰아들 태성이 천국에서 아이들과 행복하게 뛰어 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렸다는 이 그림에서 우리는 가족과 헤어져 자식들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06_담배나 초콜릿 쌌던 은박지에 그려낸 은지화는…

Image result for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 이중섭또한 그는 은박지, 화판, 편지지, 책의 속지 등 그릴 수 있는 모든 것에 유화물감, 연필, 크레파스, 철필, 못, 송곳 등 다양한 도구를 사용하여 실험적인 작업을 추구하였는데 한국전쟁으로 인한 물자부족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그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창작의 열정을 불태운 그의 예술혼과 열린 의식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담배 곽 속 포장지인 은지에 그림을 그린다는 발상은 당시의 화단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획기적인 시도였다. 서양화는 캔버스에 유화로 그리거나 스케치북에 수채화로 그려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부수고 손에 잡히는 무엇에나 그림을 그려나간 그의 열린 마음과 실험정신은 오늘날 현대작가의 예술적 관념을 형성하는데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제주를 떠나 부산에 살던 1952년부터 담배나 초콜릿을 쌌던 은박지에 못이나 송곳으로 눌러 그린 후 담뱃진이나 단색 물감을 발라 천으로 닦아낸 은지화는 스케치의 과감함, 자유자재로 선을 사용하는 능란함, 단순화시킨 형상에서 드러내는 본질의 극대화로 그 독창성과 예술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고, ‘낙원’ (1954년)과 ‘신문을 보는 사람들’ (1954년)은 뉴욕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있다.

 

07_한가위 달을 혼자 쳐다보며 당신들을 가슴 하나 가득 품고 있소”

1954년 종이에 유채로 그린 ‘달과 까마귀’를 보면 노란 보름달과 3개의 선으로 이루어진 전기 줄 위에 검은색의 거친 붓놀림으로 그려진 5마리의 까마귀가 노닐고 있다.

단순하면서도 거리낄 것 없이 명쾌한 선으로 이루어진 까마귀 가족은 서로를 향해 다정하게 지저귀고 있는 듯 생동감 있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둥근달 아래 마주보고 우짖으며 온몸으로 어울리는 까마귀들을 보며 가족을 그리는 이중섭의 그리움은 더욱 깊어졌으리라.

“나의 상냥한 사람이여, 한가위 달을 혼자 쳐다보며 당신들을 가슴 하나 가득 품고 있소.” 1954년 9월 한가위 날 사랑하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여지는 그리움이 그림 속에 녹아있어 그 외로움이 더욱 우리의 가슴을 저미는 것 같다.

또한 이중섭의 절친인 시인 구상은 이 작품을 시로 지어 “-중략- 영원처럼 펼쳐진 하늘에 해바라기 얼굴을 한 달이 나지막이 떠있고 통금시간도 지난 거리 한복판 빗줄 같이 가로지른 고압선 위에 남산과 북한산에서 내려온 이중섭의 까마귀들이 마주앉아 세상살이를 지저귀고 있다” (까마귀 12)라고 표현해 시와 회화의 절묘한 만남을 보여준다.

 

08_대부분의 작품, 아내와 아이들 그리는 그리움과 외로움 표현

이중섭은 1950년대 짧은 몇 년간 거의 모든 대표작을 그렸는데 대부분이 아내와 아이들을 그리는 그리움과 외로움을 표현하고 있다. 이중섭이 죽기 한해 전인 1955년에 그린 ‘환희’ 역시 아내 남덕을 향한 애틋한 사랑을 그림으로 나타낸 작품이다.

부부처럼 마주보고 있는 수탉과 암탉이 붉은 해를 향해 날개짓 하는 모습으로 사랑의 기쁨과 환희를 그린 이 작품은 종이에 유채와 에나멜로 그려 고구려 고분벽화를 연상시키는 화면에, 첫날밤을 보낸 남녀의 수줍음과 기쁨을 춤추는 닭의 모습으로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어떠한 부부가 서로 사랑한다고 해도, 어떠한 젊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현재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열렬한 애정만한 애정이 또 없을 것이요. 일찍이 역사상에 나타나 있는 애정 전부를 합치더라도 나 대향과 남덕이 서로 열렬하게 사랑하는 참된 애정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게요… (중략)”라고 아내에게 쓴 편지처럼 그에게 남덕은 인생이자 예술이며 삶의 모든 것이었다.

미도파화랑에서 개인전만 마치면 곧바로 일본으로 달려가 아내와 재회하리라는 희망과 기대에 차 힘찬 필치로 사랑을 노래했지만 아내와 함께 태양을 향해 사랑의 날개짓을 하려던 그의 바램은 무위로 돌아갔다. 개인전의 수입이 생각보다 적어 가족과 만나려는 꿈은 사라지고 이후 건강도 악화되어 홀로 쓸쓸히 생을 마감하고 말았던 것이다. 함께하고픈 그의 염원은 이 작품 속에 살아남아 훗날 7년간의 사랑을 70년간 간직하고 살아온 아내 남덕의 가슴을 울리고 만다.

 

09_단순한 구도와 몇 개 안 되는 선 속에 그리움과 고독이

‘돌아오지 않는 강’은 1955년 말 그려진 이중섭 생애 마지막 그림이다.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그는 붓을 놓고 시름시름 앓다 세상을 떠난다. 종이에 연필과 유채로 그려진 이 그림은 그 당시 상영되었던 마리린 몬로가 나오는 ‘돌아오지 않는 강’을 제목으로 삼아, 열린 창가에서 창문에 팔을 기대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소년의 모습과 머리에 무언가를 이고 있는 여인이 있는 4개의 연작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작품에는 소년과 여인과 함께 창 밖 담 위에 앉아있는 새가 그려져 그리운 대상을 향해 날아가고 싶은 염원을 담고 있는 듯한데 두 번째 작품부터 새는 등장하지 않는다. 오로지 쓸쓸한 기다림만이 남아 있고 마지막 네 번째 작품에서 소년은 얼굴을 창가에 떨군 채 눈마저 감고 있다.

마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듯 기다림에 지쳐 체념한 그의 마음이 하늘에서 주는 위로 속에서 차라리 안식을 얻은 것처럼…. 보일 듯 말듯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에 더욱 가슴이 짠하게 울린다. 단순한 구도와 몇 개 안 되는 선 속에 이중섭 삶 속에 깊이 드리운 그리움과 고독이 처절하게 묻어 나와 그 애처로움에 저절로 눈물을 머금게 된다.

 

10_만신창이 몸 이끌고 마지막 순간까지 붓 놓지 않은 화가

가족과 떨어져 홀로 방황하며 거식증과 정신질환, 간염들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그리움에 섧게 울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은 화가 이중섭. 그의 비극적인 화가의 삶은 어둡고 질척거리는 현실의 진창에서 피어난 한 송이 연꽃 같은 예술혼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1955년 미도파화랑에서 열린 이중섭 개인전의 안내장에서 김환기 화백이 “중섭 형의 그림을 보면 예술이라는 것은 타고난 것이 없이는 하기 힘들다는 것이 절실히 느껴진다. 어떻게 그러한 것을 생각해내고 또 그렇게 용한 표현을 하는지… (중략)” 라고 말한 것처럼 그는 오직 예술을 위해 태어나고 예술을 위해 살다 예술을 향해 온몸을 불사르고 떠났다. 한 여인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과 가족을 그리는 가슴 아픈 그리움을 모두 그림에 녹여내 자신만의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예술세계로 승화시킨 것이다.

후에 그의 작품 ‘소’는 47억원에, ‘황소’는 35억 6천만원에 팔릴 정도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지만 생전에 화구와 물감을 살 돈도, 그 한 몸 누일 방 한 칸도 없이 빈곤한 삶 속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난 그의 생애는 물론이고 가족들조차도 아무 혜택도 받지 못한 채 그림을 소장했던 호사가들만이 부를 누렸다는 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까?

40년이란 짧은 생애를 살며 혼신을 다하여 꽃피운 그의 예술혼을 기념하기 위해 그가 1년간 행복한 시절을 보냈던 제주 서귀포에 이중섭거리와 이중섭미술관이 생겨났고 2016년 이중섭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를 기리는 전시회 등 많은 행사가 이어졌다. 뒤늦은 사람들의 이해와 사랑이 하늘에서 지켜볼 그의 영혼에 작은 위안이라도 되었기를 바랄 뿐이다.

 

* 다음 호에서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김환기 편으로 만나겠습니다.

 

글 / 미셀 유 (글벗세움 회원·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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