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이로운 에너지로 그림에만 집중, 나머지는 그림 위해 모두 포기

살아생전 이미 신화가 된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o, 1881-1973)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입체파 화가이자 역사상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화가이다. 전위의 선봉에서 20세기 미술의 혁신을 이룬 화가이다. 긴 세월에 걸쳐 경이로운 에너지로 끊임없이 새로운 기법을 실험하고 남들이 생각지 못하는 곳에서 가능성을 발견해 예술로 승화시킨 화가이다.

 

01_강한 자의식으로 생 다할 때까지 새로운 미술 추구

“모든 사람은 잠재적으로 같은 양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 에너지를 여러 가지 사소한 일로 낭비한다. 나는 내 에너지를 단 한 가지, 그림에만 집중한다. 그림을 위해 나머지 모든 것은 포기한다”라고 말하며 강한 자의식을 가지고 생이 다할 때까지 왕성한 정력으로 새로운 미술을 추구했다.

1881년 스페인에서 태어난 피카소는 미술교사인 아버지에게서 그림을 배웠는데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재능으로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이 이루려 했던 모든 것을 피카소에게 쏟아 부어 13세에 개인전을 열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미술을 공부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 했다.

가족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바르셀로나 미술학교, 마드리드의 산페르난도 왕립미술학교에 다니며 공부했으나 답답한 교수법에 싫증을 느낀 피카소는 더 이상 미술학교의 정규교육에 얽매이지 않고 카탈루냐 미술가, 작가들과 교류하며 바르셀로냐에서 친구들의 초상화를 그려 전시회를 연 후 파리로 떠났다.

 

02_청색 주조로 거지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그린 청색시대

1901년 파리 몽마르트를 중심으로 활동을 하던 젊은 화가들과 합류한 피카소는 프랑스어도 구사하지 못한 채 거대한 도시 파리에 던져져 화려함의 이면에 감추어진 빈곤과 질병 등 하류생활의 비참함을 목격하게 된다.

파리의 구석진 다락방에서 폐부로 다가오는 추위와 가난을 견디며 작품을 만들어간 이 시기의 작품들은 피카소의 우울한 마음이 그림에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난다. 청색을 주조로 해 거지나 길거리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그린 이 시기를 우리는 피카소의 ‘청색시대’라고 부른다.

절친한 친구 카를로스 카사게마스의 비극적인 자살로 힘든 나날을 보내던 피카소가 1903년 그린 ‘인생’은 당시의 비참함과 인생에 대한 회의를 잘 나타내고 있다.

친구 카사게마스와 그의 연인,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극도로 색깔을 자제한 채 푸른색의 모노톤으로 그려져 있고 인물들은 모두 우울한 표정으로 인생 자체에 대한 고통과 고뇌에 가득 차 있다.

육체적인 사랑의 허무함을 애인과 이루어지지 못한 슬픔으로 자살한 친구의 모습을 통해 표현하고 그들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지난 세월 그녀에게 주어졌던 그러나 지금 그녀에게 남아있지 않은 인생의 어떤 한 시점을 반추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여진다. 아마도 사랑의 결과물인 아기를 향한 이 여인의 모성애는 지나간 사랑의 덧없음과 함께 공존하고 있지 않을까?

 

03_첫 연인 페르낭드 올리비에 만나며 장미빛 시대

피카소의 작품세계는 23세에 그의 공식적인 첫 연인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면서 점점 변화하게 되었다. 1904년부터 그림의 색조가 청색에서 조금씩 색깔이 가미되어 보다 따뜻하고 밝은 화면을 이루는데 이때가 피카소의 ‘장미빛 시대’로 불린다.

광대, 곡예사 가족, 공 위에서 묘기를 부리는 소녀 등 주로 어릿광대와 서커스 단원들의 생활의 이면을 파헤치고 그들이 느끼는 고독과 감성을 표현했다.

1905년 그려진 ‘곡예사 가족’은 타고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과는 오로지 서커스 안에서만 교류할 뿐 실제로는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삶을 살아가는 소외된 인간 계층의 모습을 그렸다.

황량한 사막에 던져진 6명 서커스 단원들의 고독하고 쓸쓸한 표정과 각기 다른 곳을 향한 무심한 시선들에서 부평초처럼 떠다니는 삶의 고단함을 느낄 수 있다.

피카소는 부유하는 곡예사의 삶이 재능이 있지만 사회에서 소외되고 고통 받는 예술가의 삶과 비슷하다고 느껴 일체감을 가지고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 같다.

후에 시인 릴케가 이 그림에서 크게 영감을 받고 ‘두이노의 비가’ 제5가를 지었는데 그가 가진 예술성과 피카소의 예술성이 만나 또 다른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남긴 점에서 그 가치가 더욱 우리에게 다가온다.

 

04_과거의 회화와 결별한 새로운 변화로 사람들의 사고방식 바꿔

이후 파리에서 인정받는 화가가 된 피카소는 기욤 아폴리네르, 마티스와 교류하며 세잔느의 영향도 받아 작품에서 단순화된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피카소가 조르주 브라크와 만나 1907년부터 시작된 입체파 운동은 미술계 전체를 흔들었고 과거의 회화와 결별하고 새로운 변화를 이룩해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바꾸어놓았다.

입체주의는 말 그대로 평면에서 입체의 여러 면을 동시에 나타낸다는 개념이다. 이 천재적인 예술가는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개념을 구축하고 그것을 화면에 정착시켜 미술계에 혁명을 이룬 것이다.

우리가 기존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기준에서 보면 미와는 거리가 먼, 기괴하기까지 한 그의 입체파 그림은 새로운 개념과 장르를 개척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보는 이가 사물의 앞과 뒤, 위와 아래 등 모든 면을 한꺼번에 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는 데서 현대 회화의 기초를 이루는 개념이라 생각된다.

 

05_인생무상의 세기말적 정신적 풍토에서 비롯된 아비뇽의 처녀들

1907년 제작된 ‘아비뇽의 처녀들’은 아프리카 흑인 조각의 영향과 입체주의적 형태분석이 구체화된 작품이다. 입체파의 첫 시작을 알리고 현대 미술의 시발점이 된 이 작품을 보면 선과 형태는 단순화되었고 원근법도 무시되었다.

명암도 없이 평면적으로 처리된 색, 인체는 왜곡되었고 얼굴은 아프리카 부족의 가면처럼 묘사되어 다양한 시점으로 표현되어 있다. 바르셀로나 아비뇨 홍등가에서 5명의 창녀들이 나체로 손님을 유혹하고 있는 모습은 그가 즐겨 다룬 보헤미안, 거지, 곡예사 등 소외된 모습을 그리던 인생무상의 세기말적 정신적 풍토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적 주제보다 새로운 조형적 실험이 빛나 보이는 이 작품으로 미술계는 커다란 변화를 이루게 되고 피카소의 인생과 미술계는 이 작품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될 만큼 독보적인 존재가치를 지니게 된다.

 

06_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 순위에 오른

1909년은 분석적 입체주의, 19012년에서 1923년까지는 종합적 입체파 시대로 끊임없이 자기발전을 해온 피카소는 이때 이미 20세기 회화의 최대 거장이 되었다.

1927년 45세의 나이로 당시 17세 소녀인 마리 테레즈를 만난 피카소는 거부할 수 없는 사랑에 빠지면서 그녀와 함께 하는 동안 28점이나 그녀의 모습을 그렸다.

당시 중년의 피카소가 화가로서의 명성 속에서도 아내 올가와의 불화, 세간의 관심 등 권태로운 일상에 지쳐 가던 중 만난 그녀는 구원의 여신으로 다가왔으리라.

‘꿈’ 속에서 마리 테레즈는 둥근 곡선으로 이루어진 순종적이고 부드러운 여인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피카소는 잠이 많은 그녀의 잠자는 모습을 여러 점 그렸는데 그 중 ‘꿈’은 의자에 앉아 잠든 여인의 모습을 정면으로 클로즈업 하여 몸매의 부드러운 곡선과 꿈나라를 헤매는 몽환적인 표정을 아름답게 표현했다.

이 작품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 순위에 오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07_게르니카 전쟁의 폭력성이라는 주제에 집중하기 위해 흑백으로

스페인 내전 이듬해인 1937년, 히틀러가 프랑스 독재정부를 돕기 위해 바스코 지방의 한 작은 마을 게르니카에 엄청난 양의 폭탄으로 무차별 폭격을 해 이틀 내내 마을이 불타오르고 마을 인구의 3분의 2인 1500명 이상이 사망했거나 부상당했다.

피카소는 이 뉴스를 접하자마자 분노에 차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스페인 공화국 정부의 요청으로 파리 만국 박람회 스페인관을 위한 세로 349cm, 가로 775cm의 거대한 벽화를 제작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게르니카’이다.

이 작품은 역사와 전설, 은유와 암시 등 복잡한 여러 가지 요소들을 한 화면에 담고 전쟁의 폭력성이라는 주제와 메시지에 더욱 강렬하게 집중하기 위해 흑백으로 그려졌다.

파괴된 도시와 죽은 아이를 품에 안고 비통에 가득 차 울부짖는 여인, 불타는 건물, 폭탄이 쏟아지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절규하는 사람, 인간이기를 포기한 잔인성을 나타내는 황소와 말은 쓰러진 사람들을 향해 난폭하게 표호한다.

전쟁과 폭력에 짓밟혀도 끝까지 부러진 칼을 손에 쥔 채 쓰러진 사람, 죽음과 절망 속에서도 살 길을 찾아 탈출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놓칠 수 없는 마지막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08_잦은 여성 편력… 여인들의 개성과 감성들 작품 속으로 투영

같은 해인 1937년 그려진 ‘우는 여인’ 역시 전쟁의 비극 속에서 여인들의 슬픔을 상징화한 작품이다.

슬픔에 복받쳐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넘쳐 나오는 울음이 가득한 표정을 그렸는데 입체주의의 대표적인 기법으로 얼굴의 정면과 옆면을 동시에 그려 여인의 고통과 슬픔은 그 기괴한 모습 안에 더욱 극대화되고 있다.

이것은 에스파냐 내전의 한가운데서 고통 속에 절규하는 여인의 슬픔이기도 하지만, 그림 속의 모델이자 피카소의 다섯 5번째 연인인 도라 마르가 피카소와의 관계에서 느끼는 슬픔이기도 하다.

사진작가인 도라 마르는 지적이고 활동적이며 자기주장이 강한 현대 여성이었다. 그녀는 ‘게르니카’ 작업에도 함께 하고 그 제작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기도 하면서 피카소의 뮤즈로 한동안 함께 생활했지만 피카소의 사랑을 그의 부인뿐만 아니라 이미 헤어졌지만 아직도 계속 교류하고 있는 마리 테레즈와 공유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분노했고 그것은 그녀의 내면을 갉아먹어 불평과 눈물로 점철된 생활을 하게 된다.

이에 싫증이 난 피카소는 또 다시 다른 연인을 찾아 가버리고 만다. 이미 젊은 나이에 부와 명성을 거머쥐고 많은 여인들과 함께했던 피카소의 행태는 자칫 비난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의 잦은 여성 편력의 감정은 진심이었고 만난 여인들의 개성과 사랑의 감성들은 고스란히 작품 속으로 투영, 표현되었다.

 

09_“진정한 화가는 영원하고 고통스러운 화가의 삶을 살 뿐…

피카소의 천재성을 나타내는 유명한 작품 ‘황소 머리’는 피카소가 1942년 파리의 길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버려진 낡은 자전거에서 시작된다.

자전거의 안장과 핸들만 떼어 붙여 황소의 머리를 형상화했는데 갸름한 안장으로 황소의 얼굴을, 길고 구부러진 핸들로 황소의 뿔을 나타냈다. 여기에 청동을 입혀 멋진 질감의 청동 황소 머리를 만들었다.

버려진 자전거가 피카소의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손에 의해 300억원의 고가의 미술품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낡은 자전거의 부품이 예술작품으로 승화된 기적을 이룬 것은 피카소의 뛰어난 관찰력과 상상력, 그리고 사물을 향한 열린 시각에서 비롯되었으리라.

현대작가의 입체 오브제 (object: 예술과 무관한 물건을 본래의 용도에서 분리하여 작품에 사용함으로써 새로운 느낌을 일으키는 상징적 기능의 물체) 작품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획기적인 이 작품을 그 시대에 만들어낸 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의 천재성의 발현이라 할 수 있겠다. 그는 이 작품에 대해 “나는 찾지 않는다. 있는 것 중에서 발견할 뿐이다”라고 새로운 가치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창조의 본질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진정한 화가는 결코 첫 성공에 만족할 수 없다. 오직 영원하고 고통스러운 화가의 삶을 살 뿐”이라는 말로 그의 예술관을 표현한 피카소는 강한 자의식을 가지고 생이 다 할 때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예술을 추구했다.

회화, 조각, 도자기, 시 등 거의 모든 분야의 시각예술을 섭렵하고 수많은 위대한 작품들을 남긴 20세기의 거장 피카소. 91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다 간 피카소는 일생 동안 무려 4만 4000여 점의 그림과 조각을 남겼는데 전 생애 중 80여년을 그림을 그리며 살았다. 그의 인생은 곧 회화 그 자체였다.

* 다음 호에서는 한국을 빛낸 서양화가 시리즈 첫 번째로 화가 이중섭을 만나겠습니다.

 

글 / 미셀 유 (글벗세움 회원·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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