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은 작고 수많은 편차 보이는 색들의 집합체’라 믿은 인상파의 아버지

빛을 그리는 화가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1840-1926)는 수련, 인상 해돋이, 건초더미, 루앙 대성당, 생 라자르역 등 수많은 작품으로 빛과 색이 이루는 조화가 얼마나 아름답고 다양하며 신비로운지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크나큰 감동을 보여주는 화가이다.

 

01_쉴새 없이 움직이는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 빛 그려내

19세기까지 내려오던 기존의 사실화가 가지고 있던 고정된 이미지를 과감히 벗어버리고 오로지 빛의 움직임에 따라 붓으로 달린 모네….

그는 사물이나 자연이 빛과 만나는 순간, 서로의 상호작용에 의해 그들이 품고 있는 생명력은 한 순간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매 순간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빛의 매직을 발견하고 순간순간 빛이 주는 다채로운 모습들을 화폭에 옮겼다.

쉴새 없이 움직이는 시간 속에서 그에 따라 변화하는 빛을 그린다는 것이 그 시대에 얼마나 신선한 발상인지, 주위의 비웃음에도 굴하지 않고 평생 자신의 철학을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작품들을 그려 마침내 인상파의 아버지로 우뚝 선 그의 열정은 작품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02_빛이 주는 사물의 변화 그린다는 발상으로 인상파 창시

화가 모네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먼저 인상파란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아야 하겠다. 인상파란 1874년 파리의 한 화랑에서 젊은 화가들이 모여 한 전시회에서 당시 비평가들이 모네의 ‘해돋이’를 보고 조롱하며 붙여진 이름에서 유래한다.

‘인상, 해돋이’는 모네가 프랑스 북부 르아브르항에서 해가 돋는 바로 그 순간의 인상을 캔버스에 옮긴 작품으로 원근감이나 형태의 윤곽을 무시하고 해가 돋는 찰나의 분위기만을 집중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순간적으로 대상의 형태와 색채를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형태는 뭉개지고 원근감이 사라진 화면은 몽환적인 신비함으로 가득 차 있다. 마치 현대의 표현주의 추상화를 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가히 반추상의 새로운 시도라고도 보여지는 시대를 앞서 간 작품이라고 느껴진다.

그러나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던 그 시대의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기초도 안 되어 있는 젊은 화가들의 치기 어린 졸작으로 매도하고 태아에 해롭다며 임산부의 입장을 막을 정도로 심한 비판을 하였다.

기성세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모네는 형식의 혁신이 곧 인식의 변화를 가져온다고 믿고 서양화에 새로운 개념 즉, 빛이 주는 사물의 변화를 그린다는 발상으로 마네, 드가, 피사로, 세잔 등과 함께 인상파를 창시했다.

그 동안 내려오던 경험과 관습에 의한 감각을 바꾸어 사물의 묘사에서 빛의 흐름에 대한 직관적 관찰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추구한 것이다. 인상주의는 자신이 바라보는 풍경이나 장면을 느낀 인상 그대로 그린다는 말인데 인상파 화가들은 어두운 화실에서 벗어나 무대를 야외로 옮기고 빛의 변화에 따라 다채로운 얼굴을 드러내는 자연의 모습을 묘사했다.

결국 인상파는 배척 받았던 기존의 화단에서 승리하였고 오늘날까지 상업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화풍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추상화의 가능성과 기본 개념의 초석을 다진 가장 큰 혁명을 일으킨 사조로 평가 받고 있다. 모네가 바로 그 첫 발을 내디딘 화가였다.

 

03_마네의 밝은 화풍에 매료, 밝은 야외광선 묘사에 주력

1840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르아브로에서 자랐던 모네는 어렸을 때부터 화가가 되기로 마음먹고 식료품 잡화상을 하던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술을 배워 초상화를 그려 팔았다.

부댕의 문하생이 되어 정식 미술교육을 받은 모네는 1859년 파리로 나가 피사로, 시슬레, 르노와르, 바지유등과 교류하며 화가의 길을 걸었는데 특히 마네의 밝은 화풍에 매료되어 밝은 야외의 광선을 묘사하는데 주력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되는데 그의 평생의 뮤즈이자 모델이었던 카미유와의 만남이었다. 가난한 모델이었던 18세의 카미유와 아직 화단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 25세의 화가 모네… 1865년 화가와 모델로 만난 그들은 현실에 대한 슬픔과 동질감으로 결속되었고 모네는 차분하고 온화한 카미유의 성품과 애수에 젖은 눈빛에 매료되어 사랑에 빠지게 된다.

주위의 우려와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한 그들은 붓이나 물감을 사기도 한끼 식사를 해결하기도 힘든 가난한 생활이었지만 서로를 향한 뜨거운 사랑에 그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행복한 생활을 했다.

 

04_빌 다브레 정원에 있는 여인들의 네 명은 모두 카미유?!

두 사람의 사랑이 무르익던 시기에 그려진 ‘빌 다브레 정원에 있는 여인들’ (1867)은 카미유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모네의 예술적 신념이 잘 녹아있는 작품이다.

정원의 무성한 나무 아래서 꽃을 따고 있는 네 명의 여인들의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은 오솔길과 여인들의 치마폭 위로 화사한 햇살이 쏟아지고 옅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평화롭고 상큼한 오후의 한때를 나타내고 있다.

재미있는 건 이 네 명의 여자들이 모두 카미유 한 사람을 그린 것이라는 것이다. 카미유는 각각 다른 옷을 입고 다른 포즈를 취하며 모델을 섰는데 다양한 모습과 얼굴 표정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잡아내어 아름답게 표현해 낸 모네의 사랑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또한 아들 쟝과 카미유가 산책을 나온 모습을 그린 ‘산책’ (1875)에서도 그녀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솔솔 부는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구름, 풀잎과 들꽃들 위에서 반짝이는 빛의 움직임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고 풀밭 위로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는 햇볕아래 빛나는 풀잎들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위아래 푸른색과 녹색을 사이에 두고 흰색의 구름이 소용돌이치는 빛의 물결을 만들어내고 넓게 그려진 하늘아래 양산을 쓴 카미유의 드레스가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에 온통 화면은 봄과 바람과 빛으로 가득 차 있는 것만 같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의 평화로운 모습을 그린 이때가 그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아닐까?

 

05_모네, 카미유는 동화 같은 사랑으로 56점의 그림 속에서 영원히

운명적인 만남에서 1879년 32세에 자궁암으로 갑자기 생을 마감하는 임종의 순간까지 모네의 영원한 뮤즈이자 모델이었던 카미유…. 그녀는 둘째 아들 출산 후 병세가 깊어져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그녀의 죽음에 많은 상심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네는 붓을 들어 그녀의 마지막을 그렸다.

“내게는 너무도 소중했던 여인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고 이제 죽음이 찾아왔네. 그 순간 나는 너무 놀라고 말았지. 시시각각 짙어지는 색채의 변화를 본능적으로 추적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던 거야”라고 지인에게 편지로 말한 모네는 그 순간 조차도 빛의 흐름을 느끼고 그것에 대한 인상을 화폭에 담았다. 그녀의 마지막을 남기고 싶은 사랑의 애틋함과 그것을 작품으로 승화시킨 그의 열정을 엿볼 수 있는 부분 같다.

모네는 아내를 56점이나 그리며 평생의 모델로 삼았는데 그가 그린 카미유의 그림은 모두 색이 밝고 따스하여 색채가 주는 생기발랄함과 생명력이 강조된 모네의 사랑이 느껴진다.

반면 ‘임종을 맞은 카미유’ (1879)는 전체적으로 색을 배제해 모노톤으로 모호하고 형체가 뚜렷하지 않게 그려져 있다. 죽음을 맞은 여인을 둘러싼 거의 흰색에 가까운 베일은 마치 죽음의 늪에 드리워진 안개와도 같이 그녀를 감싸고 있다. 형체를 지우며 연기처럼 사라질 것 같은 마지막 순간의 죽음의 그림자를 색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여진다.

카미유의 사후 모네는 그녀를 간병했던 여인과 재혼을 했지만 그는 평생 카미유의 그림자 속에 살았다. 가난 때문에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그녀에 대한 죄책감과 충격으로 초상화를 그리지 못하고 남아있는 몇몇의 초상화는 모델의 얼굴이 뭉개진 채 잘 알아볼 수 없게 그려져 있다. 카미유의 얼굴이 떠올라 인물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모네, 카미유는 한편의 동화와도 같은 사랑으로 남겨진 56점의 그림 속에서 영원히 숨쉬고 있어 이 전설적인 화가의 아름다웠던 젊은 시절, 빛나는 순수함과 열정에 가슴이 설렌다.

 

06_그가 이뤄낸 빛과 색의 향연은 환상의 나라 마주하고 있는 듯

1877년, 그의 인상주의 표현이 한창 무르익었을 때 그린 작품 ‘생 라자르 역’은 기차역 부근에 집을 얻고 아침, 점심, 저녁 기차의 도착과 출발을 관찰하며 그린 연작이다.

19세기의 기차역은 20세기의 에어포트 같이 산업혁명으로 발전한 서구 사회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었고, 화가들은 그 위대하고 경이로운 산업의 산물을 경외하고 탐색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 나타난 것이다.

모네 역시 파리의 생 라자르 역을 주제로 12점의 연작을 그렸는데 그는 이 산업화의 열매가 갖는 상징적인 의미보다는 기차가 내뿜는 증기와 빛이 만나는 경이로운 순간을 색으로 표현하는데 중점을 둔 것 같다. 증기가 하늘로 뿜어져 대기 속으로 흩어져 갈 때 보라, 노랑, 푸른색들은 점차 옅어져 하늘색과 혼합된다.

어렴풋하게 보이는 파리의 시가지나 여행객들이 당시의 시대상을 나타내고 화면은 전체적으로 안개와 증기로 뒤덮여 있어 마치 꿈속처럼 흐릿하게 표현되어 있다. 산업화의 복잡하고 활기찬 일상보다는 빛과 색채가 지배하는 또 다른 몽환적인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고나 할까? 그가 이루어낸 빛과 색의 향연은 현실을 그렸음에도 환상의 나라를 마주하고 있는 것만 같다.

 

07_오묘한 모노톤의 루앙 대성당더욱 몽환적, 추상적으로

그의 완숙기라 할 수 있는 1984년 그려진 ‘루앙 대성당’을 살펴보자. 역시 30여점의 연작으로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햇빛의 양과 각도가 달라짐에 따라 변화하는 성당의 모습을 시간대 별로 화폭에 담았다.

수백 년에 걸쳐 많은 수난을 당한 루앙 대성당은 초기 고딕양식 위에 후기 프랑부아양 양식이 첨가되어 다양성과 예술성이 뛰어난 건물이다. 모네는 암석으로 된 대성당의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 거친 터치를 사용해 물감을 펴 바르고 그 위로 비추는 빛의 음영과 어른거리는 햇살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형태가 빛에 용해된 듯 레이스처럼 표현하고 있다.

본래 어두운 회색의 석조 건축물은 모네에 의해 음영 속에 빛나는 색채의 향연을 펼치고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 고고하게 서있다. 이 연작은 ‘생 라자르’ 연작보다 형태는 더욱 뭉개져 있고 색감은 날씨와 계절과 빛의 양에 따라 화면마다 황금빛, 보라빛, 푸른빛 등 오묘한 모노톤으로 이루어져 각각이 완전히 다른 그림으로 탄생해 더욱 몽환적이고 추상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 같다.

 

08_“끝이 없는 모든 것, 수평선이나 기슭이 없는 물결의 환영”

1880년대부터 1926년 사망할 때까지 모네는 같은 장소, 같은 대상에 대한 빛의 효과를 많은 연작을 통해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연구했다. 빛과 날씨의 변화를 묘사하며 ‘건초더미’ 연작, ‘루앙 대성당’ 연작, ‘포플러’ 연작, 생 라자르 역’ 연작, ‘수련’ 연작 등 근 300여점의 다양한 연작을 제작했는데 그 중 그의 집 지베르니 정원에 핀 수련을 주제로 한 ‘수련’ 연작은 그의 모든 예술적 영감을 집대성한 대표작으로 250여점에 달한다.

1918년 모네는 ‘수련’ 연작을 정부에 기증하기로 해 프랑스 정부는 오랑주리 미술관에 초대형 ‘수련’ 연작 8점을 전시했고 이 작품들은 모네가 세상을 떠난 1927년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빛이 가득한 거대한 전시실에 둘레가 100여미터에 달하는 벽을 따라 수련이 가득한 호수와 그 위로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 호수에 비친 나무와 구름의 풍경 속에 모네가 “끝이 없는 모든 것, 수평선이나 기슭이 없는 물결의 환영”이라 말한 신세계가 펼쳐진다.

거친 터치로 이루어진 색색의 안개 속에 피어나는 수련들이 흐르는 물결 위로 비추는 빛과 색채의 조화 속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우리는 그 앞에서 고요하고 평안한 안식처를 발견하게 된다.

 

09_아무도 보려 하지도 표현하려 하지도 않은 빛의 흐름을 화폭에

모네는 사물의 본질보다 사물이 빛과 만날 때 나타나는 현상과 그것의 직관적 관찰을 중요시 여겼다. 그는 예리한 심안으로 사물은 본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이며 빛은 작고 수많은 편차를 보이는 색들의 집합체라 믿었는데 이것은 후에 과학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다.

투명한 빛이 모든 색으로 분광될 수 있으며 물체는 고유한 색을 지닌 것이 아니라 빛이 물체에 닿아 투과하거나 반사하면서 파장이 다른 스펙트럼에 의해 색이 결정된다는 과학적 분석을 모네가 알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반짝이는 햇살아래 시시각각 변화하는 색채의 향연을 붓을 들어 표현했을 뿐이리라. 존재하지만 아무도 보려 하지 않고 표현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빛의 흐름을 화폭에 옮긴 화가였다.

많은 이들이 인상파를 떠날 때에도 단 하나의 화두 ‘빛의 표현’이라는 명제를 붙들고 평생에 걸쳐 수많은 걸작들을 남기고 말년에는 백내장으로 시야가 흐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붓을 놓지 않은 그의 예술을 향한 열정과 업적에 찬사를 보낼 뿐이다.

 

* 다음 호에서는 입체파의 거장 피카소와 만나겠습니다.

 

글 / 미셀 유 (글벗세움 회원·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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