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벨라를 통해서만 사랑을 느끼고 행동하고 그림을 그려왔다

샤갈의 작품 속에서 가장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벨라는 그의 영원한 영감의 원천이었다. 한 여인을 향한 깊고도 숭고한 사랑으로 그녀가 죽음으로 그의 곁을 떠날 때까지 일생을 함께 하고 그녀와의 사랑을 주제로 수많은 아름다운 작품을 남긴 샤갈. 많은 예술가들이 자유와 혁신, 아방가르드의 물결 속에서 사랑조차도 기존 틀을 부숴버리고 자유로운 연애를 지향하며 여러 명의 연인들을 거쳐 갈 때도 오로지 벨라에게로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과 고결한 정신이 빛나는 샤갈은 진정한 이 시대의 로맨티스트가 아닐까?

 

01_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불려

색채의 마술사로 잘 알려진 샤갈 (Marc Chagall 1887-1985)은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불린다. 러시아 제국에서 태어나 30대에 프랑스로 귀화한 그는 예술가치고는 드물게 장수해 98세의 나이까지 살았다.

유화, 판화, 스테인드 글라스, 삽화 등 그는 많은 작품들을 남겼는데 제1차, 제2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 유태인 학살 등 몰아치는 전쟁의 거센 풍랑 속에서도 놀라운 직관으로 위험을 피해 삶과 예술을 이어나간 그의 가치는 미술계의 보물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의 대부분의 작품에는 사랑과 평화, 고향을 향한 향수가 주제를 이루고 이를 환상적이고도 초현실적인 색채를 사용해 아름답게 표현했다.

작품 속에 끊임없이 나타나는 아내 벨라와의 사랑, 고향 비테브스크를 향한 그리움은 “우리의 인생에서 삶과 예술에 진정한 의미를 주는 단 하나의 색깔은 바로 사랑의 색이다”라고 말한 그의 철학을 잘 드러내고 있다.

(에펠탑의 신랑신부 1938, 유화 )

 

02_가난한 유태계 가정에서 태어나 유년시절 보내

샤갈은 비테브스크의 가난한 유태계 가정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교회당과 유태교회, 오밀조밀한 목조건물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이 마을에서 화가의 꿈을 키우며 성장한 샤갈에게 고향이라는 존재는 그의 영혼 속 깊이 각인되어 어디에 있든 그리움과 향수의 대상이 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가 비데브스크를 그리워하며 그린 작품 ‘나와 마을’에는 농부의 옆얼굴과 마주보고 있는 소의 얼굴이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 전면에 크게 자리잡고 있다.

배경에는 알록달록 예쁜 집들과 농부의 일상이 평화롭게 그려져 있어 전체적으로 가슴이 따스해지는 느낌을 주는데 순수했던 어린 시절 지붕 위에 올라가 마을의 평화로운 정경을 내려다보던 추억 속의 따스한 감성이 그대로 작품 속에 녹아 든 것만 같다.

또한 작품 ‘농부의 삶’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이 시골 생활에 대한 찬가, 전원의 평온함이 소박한 행복을 나타내고, 삶의 풍요로움과 살아있음의 기쁨을 느끼게 된다.

(나와 마을 1911, 유화)

 

(농부의 삶 1925, 유화)

 

03_벨라 처음 본 순간 하늘을 나는 기분, 사랑에 빠져

고향에서 만난 벨라 로젠펠트 (Bella Rosenfeld 1895-1944)는 그의 인생에 있어 크나큰 전환점이 되었는데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샤갈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분을 느꼈고 진정으로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자신의 운명이자 전부였던 여인, 그녀를 향한 찬란하고도 지고지순한 사랑의 시작이었을 뿐 아니라 그의 작품 세계는 그녀와의 만남을 계기로 자신의 내면에서 끓어 오르는 그녀를 향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한껏 개화한 것 같다.

그의 자서전 <샤갈, 꿈꾸는 마을의 화가>에서 “그녀의 침묵은 나의 것, 그녀의 눈은 나의 눈. 마치 그녀가 오랫동안 나를 알아왔고 나의 어린 시절과 나의 현재와 미래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고 샤갈은 말한다.

한편, 벨라는 후에 “서로의 가슴이 고동치고 있음을 느낄 뿐이었다. 이 남자의 얼굴은 나의 또 다른 자아로 내 안에 함께 자리 잡게 되었다”라고 첫 만남을 회상하였다고 하니 그들의 사랑은 운명이었음이 분명하다.

벨라는 역사, 철학, 문학을 공부한 수재였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미모와 부유한 집안까지 갖추었음에 비해 가난한 집안의 보잘것없는 화가 지망생인 샤갈의 만남은 시작부터 벨라 부모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지만 그들의 사랑은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마침내 1915년, 결혼에 성공하게 된다.

 

04_아방가르드 운동 이끄는 예술가들과 교류, 파리 미술계로 진출

1910년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빛과 자유의 도시 파리로 유학한 샤갈은 아폴리네르, 들로네, 페르낭 레제같은 아방가르드 운동을 이끄는 예술가들과 교류를 가지며 파리의 미술계로 진출해 활발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파리의 미술계는 기존의 원근법과 명암, 사실적 색채에서 벗어나 대상을 여러 각도로 분석하고 그 구조를 기하학적 형상으로 재구성해 새로운 미를 추구하던 입체파가 지배적인 예술형태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색채에 대한 뛰어난 감각과 신선한 감성을 지닌 샤갈은 입체파가 지향하는 물질주의적 외관의 표현에서 벗어나 자신 안에 존재하는 내면의 감성을 대담하게 표현함으로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향해 나아가려고 노력했다.

본인 스스로를 상징하는 수탉과 연인의 사랑과 욕망을 표현한 작품 ‘수탉’에는 상상의 세계에서 재현되는 상징물들이 등장하는데 닭이나 소등 동물들이 의인화되어 어린 시절 자신의 고향에서 보았던 삶의 풍경을 재현하고 상징적인 의미를 더해 암소를 어머니, 연인, 고국을 상징하는 것과 같이 가장 그리워하는 고향의 모습을 투영한 것으로 보여진다.

 

(수탉 20세기경, 유화)

 

05_기욤 아폴리네르, 볼레즈 상드라르 같은 시인들에게서 영감 받아

차라리 그의 작품세계는 본질적으로 기존의 개념을 넘어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같은 화가들보다는 아방가르드와 초현실주의의 선구자인 기욤 아폴리네르나 볼레즈 상드라르와 같은 시인들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알려졌다.

초기 그림에서 보여지는 피카소와 흡사한 큐비즘적인 요소는 시간이 갈수록 샤갈만의 독특한 색채와 감각으로 변형되어 오롯이 찬란한 색채 속에 사랑과 아름다움이 빛나는 독창적인 작품으로 태어나게 되었다.

스스로도 색채 화가임을 자부한 샤갈은 자연 그대로의 색채보다 무의식적인 환상의 색채를 사용했는데, 이러한 인상주의 회화에서 보여지는 보색과 색채의 이론을 발전시켜 스펙트럼의 모든 색채를 화면에 녹여낸 다채로운 화면의 구성을 인상 깊게 본 아폴리네르는 그를 입체파에서 분리해 오르픽 큐비즘이라 명명했다.

후에는 초현실주의 화가로 분류되었지만 그의 색채에 대한 시적 음악적 감성 표현은 다른 초현실주의 화가들과는 또 다른 샤갈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추구했다고 본다.

앙드레 브르통은 그의 작품을 ‘은유가 성공적으로 드러나는 그림’이라 격찬하였고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그에게 ‘소년 속의 노인, 노인 속의 소년’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우리가 가장 순수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며 사랑의 힘으로 이성의 편견을 뛰어넘어 아름다운 환상의 세계를 펼쳐 보여준다. 자신만의 상상으로 현실과 비현실의 공간을 넘나들며 사랑이 주는 감미로운 감정, 그리움과 향수, 꿈의 세계를 그린 그의 작품에서 우리는 이 환상적이고도 초현실적인 아름다운 색채의 빠져들어 그의 감성과 하나가 되고, 그가 주는 따스함의 위안을 느끼게 된다.

 

06_베를린에서도 작품 발표 큰 호평, 화가로서의 입지 굳혀

1913년, 1914년 베를린에서도 작품을 발표하여 큰 호평을 받아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되었지만 비데브스크에 남아있던 약혼녀 벨라를 그리워하던 샤갈은 1914년 러시아로 떠나 그녀의 곁에 머무르게 되는데 몇 주 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곧 러시아의 국경은 봉쇄되고 말았다.

1915년 벨라와 결혼한 샤갈은 전쟁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벨라에 대한 사랑과 새로운 가정을 이룬 행복에 젖어 더욱 고양된 예술적 감성으로 몽환적인 젊은 연인들을 주제로 한 밝고 화려한 작품들을 그렸는데 그가 벨라와 결혼한 직후에 그려진 ‘도시 위에서’는 사랑하는 연인에서 그의 아내가 된 벨라와의 행복한 모습이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새처럼 하늘을 날고 있는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흰 구름이 넓게 퍼져있는 하늘에는 다가올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한 두 사람이 떠있고 아래에는 고향 마을 비데브스크가 정겹게 펼쳐져 있는데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이라는 격변의 한가운데에서도 고난과 역경을 견디게 해주는 밝고 따스한 사랑의 힘을 느끼게 해준다.

또한 1918년에 제작된 ‘와인 잔을 든 이중 자화상’에서는 흰옷을 입은 벨라와 그 위에 떠있는 샤갈 그리고 자신의 딸 이다를 상징하는 천사가 수직적 형태로 그려져 있는데 보편적으로 수평으로 이루어져야 할 인물들의 구도가 수직으로 그려져 있어 사랑의 기쁨으로 고양된 그의 감성이 더욱 강하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만 같다.

 

(도시 위에서 1914-1918, 유화)

 

(와인 잔을 든 이중 자화상 1917-1918, 유화)

 

07_소련 세워지자 벨라와 함께 파리로 돌아와 왕성한 미술활동

1917년 러시아 시월 혁명이 일어나고 1922년 마침내 소련이 세워지자 위험을 느낀 샤갈은 마침내 사랑하는 고향을 등지고 벨라와 함께 파리로 돌아와 왕성한 미술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의 작품의 주를 이루는 두 가지 특징 즉, 색상의 대비로 이루어진 다채로운 색채와 비물리적인 요소의 배치, 즉 중력을 거스르고 날아다니는 인물과 허공에 붕 뜬 사물과 동물의 배치는 음악적 리듬감에서 오는 경쾌함과 환상적인 분위기가 더욱 발전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1939년에는 카네기상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나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나찌의 유태인 탄압으로 유태인이었던 샤갈은 벨라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린 그림 ‘전쟁’은 그가 사랑하던 고향 비테브스크가 나치에 점령당했다는 비보에 슬퍼하며 그린 작품으로 전체적인 화면이 참담한 현실을 표현하듯 어둡고 침울한 색채로 덮여있고 피난 가는 마차 밑의 핏빛 같은 붉은 색은 전쟁의 참상을 표현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려고 하는 말,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의 모습에서 평화를 갈구하는 샤갈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전쟁 1943, 유화)

 

08_벨라가 없는 그의 세상은…

1944년 벨라는 감염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벨라가 없는 세상을 그는 어떻게 살아갔을까? 20세 젊은 나이부터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무르익은 그의 사랑이 예고도 없이 닥쳐온 바이러스의 습격으로 순식간에 사라졌을 때 그의 상실감과 고독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우주였고 예술의 근원이자 원동력이었던, 영원한 그의 뮤즈… 더 이상 그녀가 그의 곁에 없음은 그의 삶의 의지를 통째로 무너뜨렸고 마치 말라 죽은 지 오랜 황량한 나뭇가지가 속절없이 바람에 흔들리듯 아무 희망도 없이 무의미한 날들을 보내고 있을 때 그를 다시 일으켜 준 것도 역시 벨라였다.

그녀를 다시 그리고, 그녀와 사랑했던 순간들을 화폭에 옮기며 샤갈은 점점 회복되어갔다. 오랜 세월 후, 죽음에 이르러서도 평생 사랑은 그녀 하나였다고 말한 그는 30여년 간 자신의 곁에서 예술적 영감을 주었던 벨라를 회상하며 “오직 벨라를 통해서만 사랑을 느끼고 행동하고 그림을 그려왔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환상적이고도 찬란한 그의 작품 속에서 벨라를 향한 무한한 사랑과 그리움을 느끼고 그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위대하고 고결한 사랑에 위안과 행복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할 뿐이다.

 

* 다음에는 비엔나의 카사노바 ‘클림트’의 황금빛 판타지를 그려봅니다.

 

글 / 미셀 유 (글벗세움 회원·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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