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용이 엄마

장승처럼 버텨온 우리 큰 형님의 자식에 대한 믿음때문에…

여러분 제 이야기 좀 들어보실래요? 나의 시댁 큰조카 대용이 이야기 인데요, 아니 내 큰동서 ‘대용이 엄마’ 이야기라고 해야 옳을 것 같네요. 내가 여러분에게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이유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삼십 년 전 당시 우리 아래 동서들끼리 흉을 보았던 이야기가 내 골치 아픈 두 딸들로 속을 앓고 나서야 ‘어머니’라는 그 위대한 임무를 완수해낸 형님이 보였고 다른 한 가지는 평범한 것도 위대한 희생의 바탕 위에서 탄생되는 것이라는 것을요.

 

01_공부하라고 일 시키지 않았다?!

뜬금없는 시작 같지만 우리 남편은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다고 하네요. 남해의 끝자락 어촌에서 가난하게 사셨던 시부모님은 첫째도 말째도 아닌 여섯째로 태어나 공부만은 잘했던 남편에게 일을 시키지 않았대요.

시어른들의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듣다 보니 ‘공부하라고 일을 시키지 않았다’ 보다는 공부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아들에게 일을 시키는 것이 더 힘이 드셨겠구나 하는 점을 알게 되었어요.

그 고통은 삼십이 년째 살고 있는 내가 고스란히 안고 있죠. 어쨌든 큰 형님은 이런 집에 맏이로 시집와 장손 ‘대용이’를 낳았고 자기 아들을 향한 바램은 착하고 공부 잘한다고 소문 난 내 남편을 닮는 것이었어요.

이해해요. 그러나 세상이, 자식이 우리가 마음먹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대용이는 명석함보다 먹성이 얼마나 탁월한지를 이야기할 때 형님의 욕심을 접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 욕심은 상장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지더군요.

어느 명절, 시댁에 내려가니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한글을 띄엄띄엄 읽었던 대용이의 육년 개근상이 액자에 넣어져 안방 벽의 어른들 사진 옆에 걸리더니 곧 이어 대용이의 태권도 품새 수료증이 벽을 메우기 시작했어요.

큰 형님의 표현 ‘동서년들’인 우리는 “이런 수료증들은 벽에 다는 것이 아니다” 조심스레 목소리를 냈어요. 당시 다른 동서들보다 내 목소리가 약간 더 컸던 것은 남편이 학교에서 받았던 무수한 상장들이 가난한 시집의 통시 (뒷간)에서 지푸라기 대신 사용되었다는 전설을 들었던 터라 동네사람에게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나 봐요.

 

02_데이트 폭력 행사하던 남자 한 방에 제압

형님도 만만찮았어요. “아이고, 내 집 벼름 방이니 걱정들 마시게” 하며 우기니 명절 때마다 벽에 메워지는 수료증으로 신경전이 일어나고 삼촌들도 덩달아 큰 형님과 우리들 사이에서 맞장구를 치더니 다음엔 어떤 수료증이 올라올 것인지에 대한 예측으로 명절 준비는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 같아요.

그렇게 벽에 걸리는 대용이의 수료증이 점차 단증으로 바뀌더니 급기야 태권도 도복에 4단 검은 띠를 졸라맨 청년의 사진이 떡 하니 걸리자 우리는 모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어요.

사실 시댁의 장손 대용이를 큰 형님이 태권도를 배우게 한데는 이유가 있었지요. 이 아이가 누구를 때린다든지 싸운다든지 하는 아이가 아니라는 것은 온 동네사람이 아는 사실인데 중학교 들어가서 학교 화장실에서 이웃마을 아이들에게 자주 두들겨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된 형님이 몇 날을 울고 다닌 끝에 내린 결정이었어요.

그때도 동서년들과 아재들은 “남자 아이들은 싸우면서 커간다”며 너무 별나게 대응 마시라고 조언은 했지만 형님이 대용이를 태권도 도장에 보낸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는 것을 증명해준 어떤 사건이 일어났어요.

대용이가 어느 날 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오던 중 데이트 폭력을 행사하던 남자를 한 방에 제압한 사건이 있었고 대용이의 무용담은 우리 시댁마을에 두고두고 회자되었지요.

 

03_어린 나이에 땔감 걱정을… 이런 효자 다시 없다!

우리는 큰 형님의 허물어졌던 바램이 이 사건으로 충분히 보상받았음을 여러분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 일은 우리 동서년들의 삶에도 영향이 미쳤어요.

큰 형님이 순한 자기 아들 대용이가 풍전등화와 같은 처지에 놓인 상황에서 어떻게 슈퍼맨이 되어 나타났는지를, 그리고 대용이의 순발력을 단번에 알아낸 그 경찰관의 예리함을 끄집어낼 즈음이면 우리 동서년들은 누가 시키기나 한 듯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어요.

형님이 그 이야기를 시작하면 곧 흥분상태에 진입한다는 것을 다들 귀신같이 알아채고 형님이 빠뜨린 내용을 기억해낼 수 있는 단어를 추임새처럼 넣어 주고 수시로 맞장구까지 쳐주는 일들이 생겨났답니다.

그리고 그럴 때면 함부로 끼어들거나 말을 끊어서도 안 된다는 것도요. 그것은 말이죠, 형님이 얼마나 큰 힘을 가졌는가를 경험했으니까요. 경험이 중요한지는 다들 아시죠?

장손 ‘대용이’가 초등학교 5학년쯤이었어요. 하교 길에 동네 어귀에서 자기 키보다 큰 나뭇가지를 때감으로 쓸 요량으로 집까지 끌고 오는 것을 본 형님은 “어린 나이에 땔감을 걱정하다니, 이런 효자가 다시 없다” 는 논리였는데 형님은 대용이를 칭찬하기 위해서는 어떤 작은 모티브라도 놓치는 법이 없지요.

 

04_유치한 방법이긴 했지만 효과가 즉시 나타나

이런 부분에서 겨자씨와 겨자나무에 대한 성경내용을 약간 다른 각도로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사실 그때 우리 동서년들은 형님의 자식 자랑을 들어 주기에 조금 미성숙했었나 봐요.

저녁상을 물리고 형님이 이야기보따리를 풀라 치면 이 동서년들은 피곤해서 자야 한다, 애기 젖 물려야 한다는 둥, 이리저리 형님을 피해 쑥덕거렸는데 아마 그 이유였을 거예요.

우리가 집에 갈 즈음에야 형님은 자신이 싸놓은 보따리 중 주둥이가 터지도록 채워진 것이 누구의 집으로 배정되는가를 똑똑히 보여주었고 그것은 유치한 방법이긴 했지만 효과가 즉시 나타났어요.

그랬어요. 달달한 고구마, 늙은 호박덩어리들, 유명한 남해마늘과 새로 찧은 쌀푸대들 이런 것을 포기하고 알량한 자존심을 지킨다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을 동서년들은 퍼뜩 알아차렸던 거죠.

그렇게 형님이 애지중지 키워낸 아들, 동서년들의 조카 대용이… 그가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시죠? 세월이 흘러흘러 이제 45살이 되었어요. 우리도 본 지가 꽤 되었네요.

 

05_효자? 별 아들 딸 있냐? 부모 입이 효자고 불효자지

중학교를 졸업한 이 조카를 남편이 큰 형님을 설득해 기술고등학교에서 금형을 배우게 했고 졸업 후 공장에 취직했어요. 작은 삼촌의 중매로 예쁜 각시를 만나 딸 둘에 아들 하나를 낳았고 자기가 배운 기술로 지금은 조그만 가내공업을 하고 있어요.

형님은 대용이가 돈을 벌어 차렸다고 하지만 형님의 돈이라는 것을 가족들 중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한국경제가 어려우니 대용이의 공장도 조금 어려움은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제 여러분들도 눈치 채셨죠? 맞아요. 나는 대용이가 훌륭한 한 어머니의 아들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옛말이 그르지 않더라구요. “효자? 별 아들 딸 있냐? 부모 입이 효자고 불효자지.”

대용이가 사업에 크게 성공하지 않았어도 공부를 잘하지 않았어도 그래서 형님이 바라던 공무원이 되지 못했어도 대용이가 대한민국의 평범한 가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주변의 빈정거림에도 아랑곳없이 장승처럼 버텨온 우리 큰 형님의 자식에 대한 ‘믿음’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글 / 정혜경 (글벗세움 회원·낚시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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