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한다는 것

불을 끄고 눈을 감으면 까마득한 옛일들이 활동사진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절로 편안한 웃음을 짓게 하고 훈훈하고 자랑스럽고 움켜잡고 싶은 고운 일들도 있지만 가슴 아프게도, 그보다 더 많이, 더 자주 기억되는 것들은 너무나 부끄럽고 한숨 나오고 눈물 어리는 것들이다. 그럴 때마다 어차피 지나간 일들이다, 좋은 것들만 기억하자고 자신을 달래면서 아픈 기억은 기억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기억하지 못하는 것, 그것은 지나간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다’지만 기억하지 못한다면 지나간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은 당연히 기쁨보다 아픔이 더 많을 터. 하지만 기쁨이든, 슬픔이든, 부끄러움이든, 즐거움이든, 지나온 날들을 잊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두 다리로 걷는 호모사피엔스라는 동물이 네발로 걷는 동물을 다스리고 거느릴 수 있는 것도 지나간 것을 잊지 않은 기억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기억한다는 것은 정의롭게 옳게 높게 크게 넓게 바르게 따뜻하게 살아가겠다는 앞날에 대한 다짐일 수 있다. 인간세상의 역사는 기억하기 때문에 존재했고, 기억하기 때문에 발전했고, 기억하기 때문에 정의가 불의를 잠재웠고, 기억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들이 끊어지지 않았고, 기억하기 때문에 바른 세상이, 곧은 생명이 이어져온 거다. 그래서 사람들은 치매를 두려워하는 거다. 기억을 잃어버리는 것은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고, 내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달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5주기였다. 시민단체를 비롯해 유가족들이 아픈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추모행사를 거행했다. 그런데 추모행사를 못마땅하게 여긴 전직 국회의원이라는 인물이 소셜미디어에 “세간의 동병상련을 회 쳐먹고, 찜 쪄 먹고, 그것도 모자라 뼈까지 발라 먹고 진짜 징 하게 해 처먹는다”라는 막말을 올렸다.

그는 현재 모 정당의 경기도당 부천소사 당협위원장이다. 같은 당 현역 국회의원도 “세월호 그만 좀 우려 먹으라 하는 거죠. 이제 징글징글 해요” 라고 맞장구를 쳤다. 그들은 기억을 잃어버린 공포스러운 변이동물처럼 기억한다는 것이 ‘징글징글’한가 보다. 아무리 정략적이라지만 이런 수준의 인물들이 지도층이라는 것이 기가 막힌다.

지난주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39주년5.18추모제가 열렸다. 5.18당시 거리방송을 한 박영순씨는 추모식에서 “학생 시민을 살려주십시오. 우리 형제자매를 잊지 말아주십시오”라며, 당시 부르짖었던 내용을 다시 마이크를 잡고 호소했다. 문 대통령은 “독재자의 후예가 아니라면 5.18을 다르게 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일부 보수단체들은 5.18추모 항의반대집회를 열고 진실을 부정했다. 그들은 기억하기를 거부했다.

할아버지는 90세다. 할머니는 81세다. 어느 날 할머니가 느닷없이 엉뚱한 트집을 잡으며 심통을 부렸다. 할아버지는 집히는 것이 있어 할머니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다. 할머니는 치매 초기증상으로 드러났다. 가슴이 내려앉은 남편할아버지는 수소문을 해 아내할머니를 돌보기 위해 ‘요양보호사’자격증을 땄다. 역대 전국 최고령 자격시험 합격자다.

요양보호사는 치매와 중풍 같은 노인성 질환을 앓는 노인에게 신체, 가사서비스를 지원하는 인력으로 자격시험은 성별, 나이, 학력 등의 제한이 없다. 남편할아버지는 말했다. “기억을 잃어버리면 절대 안되지요. 나를 알아보지 못하면 어떡해. 생각만해도 끔찍해요. 내가 옆에서 돌봐야지요,”

90세된 할아버지는 81세된 할머니가 기억을 잃을 것이 두려워 그 많은 나이에 공부를 해 아내가 기억을 잃지 않도록 돌보기 위해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딴 것이다. 아내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당신 누구냐?’고 물어볼까 봐 두려웠던 거다. 이것이 사랑이다. 기억을 잃어버리는 것은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기억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잊지 못하고 세월을 먹어가는 거다.

걸핏하면 국민을 사랑한다고 입으로만 떠벌리는 지도층이라는 인간들이 가장 먼저 화인처럼 새겨둬야 할 단어는 기억이다. 기억해두라!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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