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인 정순임 어머니 장순애 여사

“죽을 각오가 돼 있으면 배우고 그렇지 않으면 일찌감치 포기하라” 가르친 강한 어머니

이 내용은 <코리아 타운> 김태선 발행인이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재직 당시 한국 정부와 함께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 역대 수상자 15명의 자식 사랑 이야기를 묶어 단행본으로 펴낸 것입니다.

자녀 예술가들이 어머니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는 1인칭 서술기법을 사용한 이 책은 단행본 사상 최초로 사진을 곁들인 잡지식 편집기법을 도입, 독자들로부터 높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제 7년여의 세월이 흘렀지만 본란에서는 당시의 내용을 가감 없이 그대로 수록, 성공한 예술가 자녀를 키워낸 장한 어머니의 사랑 이야기가 우리 교민사회에 타산지석의 효과를 가져오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큰아버지 손에 경주로 팔려간 어머니

내게 예인의 피가 흐르는 것도 따지고 보면 어머니의 피를 이어 받았기 때문일 터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여느 부모들이 그러하듯 당신의 딸자식이 당신처럼 평생을 이리 저리 떠도는 소리꾼의 팔자로 살아가는 걸 바리지 않으셨다.

하지만 ‘팔자는 독에 들어가서도 못 피한다’는 옛말처럼 나 또한 ‘어머니를 닮은 팔자’를 거부하지는 못했다.

어머니는 전라남도 곡성에서 세상과 첫 인연을 맺으셨다. 그러나 살아가는 동안 어머니는 당신의 고향에 대해서는 일절 입에 올리지 않으셨다.

물론 당신의 아버지가 빼어난 명창이셨음도 내게는 들려주지 않으셨다. 어머니의 아버지는 당시 드러내놓고 활동하시지는 않았지만, 이화중선을 제자로 둘 정도로 소리에 관한 한 꽤 실력 있는 분이셨다.

또 어머니의 큰아버지는 소리 하나로 고종 황제로부터 혜릉참봉직을 제수 받은 명창이셨다.

소리꾼 집안의 피를 물려 받은 탓인지 나의 어머니 장순애 여사는 어릴 때부터 소리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일곱 살 먹은 계집아이가 잘 하면 얼마나 잘했으랴만은 소리꾼이던 어머니의 큰아버지는 어린 조카가 당신 흉내를 내며 소리하는 모습을 벌써부터 예사롭지 않게 눈 여겨 보고 계셨다.

하지만 나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어머니의 흥얼거리는 노래소리 조차 못마땅하게 여기실 정도로 딸자식이 소리하는걸 탐탁지 않아 하셨다. 때문에 어머니는 늘 부모님 몰래 노래를 부르셨다.

그러던 중 어머니의 큰아버지가 일을 저지르시고 말았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조카를 부모 몰래 데리고 집을 나선 것이다. 어머니가 큰아버지 손에 이끌려 간 곳은 경주였다고 한다.

거기서 어머니의 큰아버지는 자식도 없이 늙어 가는 기생에게 얼마의 돈을 받고 어머니를 팔아버리셨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부모 몰래 뽑아내던 소리를 마음 놓고 부르셨고, 가야금이며 춤사위도 보는 대로 배우셨다.

 

열 여덟살 때 목포 ‘주먹’과 결혼

외할머니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딸자식을 찾아 헤매시느라 논도 팔고 밭도 팔아가며 10년이 넘는 세월을 보내셨고, 그렇게 몸 고생, 마음 고생을 한 뒤에야 어머니를 찾으실 수 있었다.

큰아버지의 고약한 행동은 용서 못할 큰 죄였지만 세월이 약인 듯 그때는 이미 외할머니도 큰아버지에 대한 노여움이 사그라진 뒤였다고 한다.

어찌보면 그 모든 게 평생을 소리꾼으로 살아야 했던 어머니의 팔자인가 싶기도 하다. 어디 당신 부모 밑에 있었으면 마음 놓고 소리 한 번 뽑아 볼 수 있었겠는가 싶으니 말이다.

외할머니께서 어머니를 다시 만났을 때는 이미 어머니의 재능을 썩히기에는 너무 늦어 있었다.

그저 더도 덜도 말고 곱게 시집가 남편 사랑 받고 자식 낳아 기르며 한 평생을 평범하게 살아가기를 바라시던 외할머니의 소박한 소망은 가슴 한 켠에 묻어 두셔야만 했다.

어머니는 열 일곱살 무렵부터 창극단에 나가 활동하기 시작하셨다. 창극단에서 어머니는 꽤 인기가 높았고 어머니의 소리가락에 눈물깨나 쏟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극단 단원들과 함께 일본이며, 중국, 이북에까지 발길 닿는 곳을 떠돌며 소리를 하셨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어머니는 무용가 최승희 선생님 하고 언니 동생하며 친하게 지내셨다.

어머니는 열 여덟살 되던 해 아버지를 만나 연애 결혼을 하셨다. 아버지는 그 당시 목포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주먹’이셨는데,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주먹 하나로 일본인 스무 명 정도는 거뜬히 때려 눕힐 정도로 힘이 세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당시 여성국극단을 따라 다니며 그들을 보호해 주셨는데, 그 유명한 김두한씨와는 형님 동생 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물론 외할머니께서는 어머니의 결혼을 탐탁지 않아 하셨다. 당시 나이든 어른들은 연애 결혼을 마치 흉이라도 되는 양 여기신데다 당신의 사위가 될 사람의 밥벌이가 주먹을 쓰는 일이었으니 흔쾌히 승낙할 이유가 없었다.

 

나도 커서 저런 옷 입고 어머니처럼…

하지만 자식 이길 부모는 없다고, 어머니는 이미 보란 듯이(?) 나를 뱃속에 담고 계셨으니 당신 어머니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으셨다.

어머니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소리를 하고 연주를 하느라 두 서너 달씩 집을 비우는 건 예삿일이었다. 그러니 어린 나는 어쩔 수 없이 외할머니의 손에 맡겨졌고, 여섯 살 때까지도 어머니의 모습 한 번 제대로 보지를 못했다.

그렇게 그리워하던 어머니를 만난 것은 내가 일곱 살 되던 해 어느 봄날이었다. 나는 어찌나 심장이 두근거리고 조바심이 났던지 손에 땀이 날 정도로 외할머니 손을 꼭 쥐고 어머니가 사는 목포로 내려갔다.

어머니는 단아한 체구에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 둥근 듯 위로 치켜 올려진 눈썹을 한 고운 분이셨다. 늘 머리 속으로 어머니 모습을 그렸다가 다시 지우고 또 그리곤 하던 그 상상 속의 모습보다 몇 배는 더 고운 분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외할머니 품을 떠나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어머니는 음식을 꽤 잘 만드셨는데 특히 젓갈이며 김치 담그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장날이면 아버지가 좋아하던 갈치를 사다가 볕이 잘 드는 장독대 위에 널어 잘 말려서 밥 반찬으로 내놓곤 하셨다.

어린 나는 그 갈치 위에 파리라도 앉을까봐 갈치에 대고 팔이 아프도록 부채질을 해댔고, 어머니는 그런 나를 기특하게 쳐다보곤 하셨다.

음식뿐만 아니라 어머니는 손재주가 많은 분이어서 창극단에서 공연 때 쓸 선녀관 등의 소품이며 옷들을 모두 직접 만들어 입으셨다.

하늘빛, 분홍빛의 하늘거리는 천들을 자르고 꿰매어 옷을 만들고 몸소 입어 보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어린 시절의 내 눈에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예뻐 보였다.

그런 어머니를 보며 “나도 커서 저런 옷을 입고 어머니처럼 돼야겠다”는 생각을 갖기도 했다.

 

“소리해서 먹고 살려거든 일찌감치 죽어버려라!”

그때 우리가 살던 목포 집은 오르막을 한참 올라가야 하는 곳이었다. 물이 퍽 귀했던 시절인지라 아랫마을에서 물을 길어다 먹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물 기르는 몫은 늘 맏이인 내 차지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욕심이 많았던지라 그 힘든 오르막 길을 열 두세 번씩 오르내리며 물을 길었다. 그런 나를 보고 어머니는 대견해하시면서도 “너무 무거운 짐 오래지면 키 안 큰다. 조금씩만 나르거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에게서 소리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내가 초등학교 다닐 무렵이었다. 어머니는 당신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맏딸인 내가 소리하는 것을 달가워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어깨너머로 늘 어머니 소리를 듣고 자란 터였기에 어느새 내 마음 속에는 소리에 대한 갈망이 또아리를 틀고 었었나 보다.

나는 어머니가 집이라도 비우는 날이면 가장 때깔 좋은 옷을 골라 입고 입술에는 도장밥으로 빨갛게 칠을 한 다음 동네 친구들을 죄다 불러놓고 그 앞에서 소리도 하고 춤도 추고 그랬다.

그런 모습이 어머니 눈에라도 띄는 날이면 어머니는 “쥐알만한 가시내가 공부는 않고 소리부터 배우고 지랄이냐? 소리해서 먹고 살려거든 일찌감치 죽어버려라!”고 매질을 하셨고, 어린 내 몸뚱아리를 땅바닥에 패대기치기도 하셨다.

또 한 번은 한겨울 눈밭에 발가 벗은 채로 내쫓겨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어머니에게 두들겨 맞고도 눈에 무엇이 씌였는지 나는 화장실에 들어가서도, 밥을 먹다가도 노래를 흥얼거리기 일쑤였고 그때마다 어머니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그 어린 시절 왜 그리 소리가 좋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어머니의 아버지가 그러하셨듯이, 그리고 어머니가 그러하셨듯이 소리꾼 집안의 피가 흐른 내 팔자 탓인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건 나는 소리가 하도 재미 있어 누가 깨우지도 않았는데 새벽 네시면 일어나 어머니 몰래 유달산에 올라가 목청을 돋우며 소리 연습을 했다.

 

“내가 졌다. 네게 소리를 가르쳐 주마”

그때 우리집 근처에는 기찻길이 나 있었는데, 요란한 증기 기관차의 기적 소리를 들으면서 “내 목소리가 기적 소리보다 더 컸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늘 가졌다.

그런 나를 본 어머니는 결국 “내가 졌다. 내게 소리를 가르쳐 주마”라고 하셨다. 당시 어머니는 동네 학생들을 모아놓고 소리를 가르치셨는데, 마침내 나도 그 아이들 틈에 끼어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다른 아이들은 틀리면 열 번이고 백 번이고 군소리 없이 반복해 가르쳐주시면서도 정작 당신 딸은 세 번만 틀려도 북채를 집어 던지며 야단을 치셨다.

성격이 어찌나 불 같으셨던지 나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어머니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이왕 시작한 것, 남보다 잘 하라는 뜻에서 그렇게 호되게 야단을 치셨던 것이었다.

내가 열 세 살 되던 해, 나는 친구 박계향과 자살 소동을 벌인 덕에 어머니의 승낙을 받아 임춘앵여성창극단에 들어갈 수 있었다.

당시 창극단은 전국을 순회하며 공연을 벌였으므로 그때부터 나는 어머니 곁을 떠나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창극단 생활은 막상 기대했던 것보다 재미도 없었고 고생도 너무 심해 모두 제 갈 길로 뿔뿔이 흩어져 떠났고 나도 어머니 곁으로 되돌아 왔다.

어머니는 나를 향해 “그까짓 고생도 못 이기는 주제에 소리를 하겠다고 까불었느냐?”며 면박을 주셨다.

나는 그 뒤 1년을 빈둥빈둥 놀았는데 또 소리가 하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어머니를 졸라 “소리를 배우고 싶으니 다시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때 어머니는 “내 기술로는 너를 도저히 못 가르치겠으니 다른 선생님한테 가서 배워라. 하지만 소리를 한다는 것은 정말 험하고 외로운 길이니 죽음을 각오할 생각이면 배우고, 그럴 자신이 없으면 일찌감치 그만두라”고 하셨다.

 

“용 대가리가 되거든 엄마라고 찾아오거라”

나는 보성에 계신 정응민 선생님에게 가서 소리를 배웠다. 그때 어머니는 나를 데려다 주면서 “나는 뱀 대가리도 싫고 용 꼬리도 싫다. 용 대가리가 되거든 엄마라고 찾아오거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어머니가 “그까짓 일로 울려거든 지금 당장 소리고 뭐고 다 때려 치우라”고 불호령을 내릴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1백일이 넘게 정 선생님 밑에게 소리를 배우고난 후 잠시 집으로 다니러 갔다. 어머니는 그간에 배운 소리나 한 번 들어보자고 하셨다.

나는 그동안 갈고 닦은 소리를 목청껏 뽑아냈는데, 어머니는 몇 분 듣지도 않으시더니 “여자가 남자 선생님한테 소리를 배우니 남자 소리가 난다”며 다시 당신이 가르치겠으니 집으로 돌아오라고 하셨다.

그렇게 해서 나는 다시 어머니에게서 소리를 배웠다. 그리고 나는 열 여덟살 무렵부터 가설극단 무대에 들어가 전국을 돌며 본격적인 소리꾼으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서른 아홉 되시던 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30대 초반의 고운 어머니와 자식을 두고 홀로 세상을 등지신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은 금실이 좋기로 유명했는데, 어머니는 아버지가 없는 삶을 퍽 버거워 하셨고 우리 가족은 생계를 이어가기도 힘든 상황이 됐다.

아버지의 3년상을 치르는 동안 날마다 산을 오르내리시던 어머니는 목포 유달산의 일등바위에서 술에 잔뜩 취하신 채 죽으려고 뛰어내리기까지 하실 정도였다.

다행히도 바위 아래에 있던 취객들이 어머니를 받아내 목숨을 건지셨다. 어머니는 그 뒤로도 여러 차례 목숨을 버리려 하셨다. 술에 취해 바다에 뛰어들기도 했고 약을 먹고 아버지의 산소에 쓰러져 있기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끝내 이승과 결별하지는 못하셨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다음 한동안 어머니는 당신 몸 하나도 제대로 추스리지 못하셨으니 집안의 가장 노릇은 당연히 맏딸인 내 몫이 되고 말았다.

나는 가설 단체에서 소리를 하고 받은 돈을 꼬박꼬박 모아 그 돈으로 쌀을 사고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다시 찾은 삶에 대한 애착

어머니는 대부분의 예인들이 그러하듯 술을 무척 좋아하셨다. 가슴에 품은 한과 서러움이 뭐 그리 많았던지 조금씩 조금씩 입에 술을 댄 것이 그렇게 술꾼이 돼버리신 것이었다.

세상에 둘도 없이 믿고 의지했던 아버지가 세상을 뜨면서 어머니는 예전보다 더 자주 술을 드셨다.

부엌 한 귀퉁이에 어김없이 빈 술병들이 나뒹굴고는 했는데 어머니는 씻으면서 한잔, 반찬 만들면서 한잔 하며 그렇게 한동안 술과 함께 세월을 보냈다.

위암으로 지아비를 잃고 열 아홉살까지 키운 셋째 딸까지 잃었던 터였으니 그 속인들 성할리 없었을 듯싶다. 모르긴 해도 숯덩이처럼 새까맣게 타들어 간 속을 술로 달래셨을 게다.

특히 아버지의 제삿날이면 어머니는 마치 무슨 날이라도 잡은 듯이 술에 만취하셨다.

제상을 차린다고 오후쯤 장보러 나간 어머니는 날이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늦은 밤이 다 돼서야 보따리는 아예 다른 이에게 들리고 거나하게 술에 취해 돌아오셨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우리 집 수챗구멍에서 검붉은 핏물이 흘러내려 오고 있었다. 어찌나 가슴이 쿵쾅거리던지 눈앞이 노래지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더 이상 한 발자욱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대문을 열고 들어섰더니 어머니는 얼굴이 백짓장처럼 새하얗게 질려 마당 한쪽 구석에 고꾸라져 계셨고, 그 옆에는 피로 물든 수건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 어머니는 술을 잠시 멀리 하셨다. 그리고 어머니의 오빠가 더 이상 어머니 사는 꼴을 못 보겠다며 우리 식구들을 고향으로 데리고 가셨다. 어머니의 태도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삶에 대한 애착이 생긴 것이었다.

어머니가 다시 경주와 인연을 맺은 것은 시조창으로 유명하던 유종구 선생님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차츰 기운을 찾아가던 어머니에게 유 선생님은 경주의 관광요원교육원에서 춤과 노래를 가르칠 것을 권하셨다.

 

93년 가야금 병창으로 인간문화재에

어머니가 나중에 하신 말씀이지만 국악의 고향이라는 경주는 막상 가서 보니 형편없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소리의 불모지와 다를 바 없던 경주에서 어머니는 자신의 전통 소리와 춤이 뿌리내리도록 하기 위해 남은 생을 바치셨고 나중에는 시립국악원을 세우셨다. 또 그러는 동안 지금의 아버지를 만나 다시 새 살림을 꾸려 또 한번의 인생을 시작하셨다.

어머니 성품은 한마디로 ‘대쪽 같다’고 하면 딱 들어맞을 성 싶다. 성품이 워낙 곧아서 도리에 어긋나는 일, 다른 사람 헐뜯는 일은 절대 금하셨다. 또 남이 불편한 것은 눈 뜨고 못 보는 성미여서 뭐든지 당신 자신이 나서서 해야 성에 차는 분이셨다.

어머니는 당신 자식은 밥을 굶든 말든 별 상관 안 하시는 분이었지만, 제자만큼은 끔찍이도 아끼셨다. 소리가 배우고 싶어도 돈이 없어 못 배우는 학생들을 데려다가 밥 먹이고 재우면서 그렇게 소리를 가르치셨다.

93년 어머니는 가야금 병창으로 인간문화재가 되셨지만, 기뻐하시기는 커녕 오히려 “인간문화재 같은 것은 안 한다”고 펄쩍 뛰며 화를 내셨다.

어머니의 주특기였던 판소리가 아닌, 고작 취미 정도로나 하던 하던 가야금 병창으로 인간문화재가 됐으니 어머니로서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던 셈이다. 그 뒤로 어머니는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셨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서편제의 대가 박동실 선생님에게 배운 어머니의 소리가 심청가 몇 대목으로 몇 개의 음반에 남아 있다는 점이다.

30년 전 한 레코드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녹음해놓은 것인데, 당시 “연습이나 해보자”고 시작한 작업이 실수 한 번 없이 진행돼 단번에 녹음됐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작업은 어머니가 세상에 남긴 드문 흔적이 되어 버렸다.

어머니는 오랜 세월 천식을 앓아오셨고, 결국 작년에 그토록 지긋지긋해하던 이승과 이별을 고하셨다.

어머니는 세상을 뜨기 바로 직전까지 내게 당신이 머물던 경주로 내려와 당신에게서 소리를 더 배우고 곁에 있으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예인은 희생을 감내할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나는 무엇 때문이었는지 서울과의 인연을 쉬 끊지 못하고 어머니 곁으로 가지 못했다. 결국 나는 어머니 임종도 못 보고야 말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30분이 지나서야 경주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사실 어머니가 위급하다는 소리를 듣고 서울서 경주로 내려오면서도 오랜 세월 그렇게 지병을 앓아오시던 분이니 설마 갑작스럽게 돌아가시지는 않으리라 여겼다.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은 “형제간에 화목하게 잘 살아라”와 “예술하는 사람은 희생을 감내할 줄 알아야 한다”였다.

어머니는 하얀 명주로 된 고운 한복을 입고 당신 몸 어느 한 부분이라도 이승의 케케묵은 인연의 때일랑은 조금도 닿지 못하게 꼭꼭 싸안고 그렇게 세상을 떠나셨다.

우리 가족은 어머니를 당신이 태어난 고향이 아니라 당신 소리의 고향인 경주국악원에 모셨다. 따지고 보면 경주는 어머니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은 아니었지만 고향보다 더 질긴 인연으로 얽힌 곳인 듯싶어서이다.

어머니가 소리를 배운 곳도 이곳이고 어머니의 소리를 뿌리내린 곳도 바로 이곳이었으니 말이다. 지금도 이곳 경주 어디선가 어머니 혼령이 당신 제자들이 뽑아 내는 소리 가락을 흐뭇해하며 듣고 계실 것만 같다.

나는 어머니가 그토록 경주에 내려와 살기를 바랬어도 살아 계실 때는 그 소원을 못 이뤄드리더니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야 이곳 경주국악원으로 내려와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내 동생 경옥은 국립국악원에서 가야금 명창으로, 경호는 아쟁을 배워 신라국악예술단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니 모두가 어머니 피를 이어받은 탓이리라.

우리는 어머니 기일에 맞춰 김일구, 박기향, 신영희씨 등 어머니 제자들과 힘을 합해 이곳 경주전수소에 어머니 동상을 세울 생각을 갖고 있다.

이승과의 인연을 그리 싫어하신 분의 동상을 이곳에 다시 세운다는 게 잘 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평생을 소리꾼으로서 숨가쁜 삶을 살아가신 분의 넋이라도 달래드리려는 생각에서다.

또 ‘소리꾼 장월중선’이라는 사람을 뭇 사람들이 잊지말고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자식 된 마음, 제자 된 이들의 마음이 한데 모아져서이다.

 

어머니가 주신 변함없는 가르침 일곱 가지

 

  1. 신의를 중요시 하라

어머니는 사람에게 신의가 없다면 짐승과 다를 바 없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리고 어머니 자신도 신의를 지키기 위해 올곧게 살아 오셨다.

 

  1. 남의 말을 나쁘게 하지 말라

어머니는 비록 누군가가 잘못을 했고 비난 받아 마땅하다 치더라도 그에 대해 나쁘게 말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셨다.

 

  1. 남을 위해 희생할 줄 알라

어머니는 “나보다는 남을 위해 희생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씀하시며 남을 위해 사실 줄 아시는 분이었다.

없는 형편에도 돈 없는 제자들을 받아들여 먹이고 재우며 생활하신 것은 제자들을 위한 스승의 사랑이자 희생이었다.

 

  1. 돈을 탐내지 말라

“예술가란 자신의 재능을 알아주는 사람과 그것을 마음껏 내뿜을 수 있는 장소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 어머니의 생각이었다. 때문에 돈보다는 창 그 자체를, 돈이 없더라도 창을 배우고 싶어하는 제자들을 거두어 들이며 생활하셨다.

 

  1. 길이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라

주변에서 “대쪽 같다”는 소리를 많이 들으신 어머니는 그만큼 올곧게 살아오신 분이었다. 세상 모든 일에는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이 있는데, 늘 사람들은 부질없는 욕심 때문에 그것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욕심을 버리고 제 갈 길을 가며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길”이라는 게 어머니의 신념이었다.

 

  1. 세상에 용서 못할 일은 없다

어릴 적 자신을 팔아 넘긴 당신의 큰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컸겠지만, 어머니는 그 분에 대한 원망을 거둬 들이셨다. “세상에 용서 못할 일은 없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 주신 것이다.

 

  1. 제자 양성에 힘써라

어머니는 당신의 딸자식이 굶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 제자들만큼은 아낌없이 챙기며 보살피셨다. 당신의 못다한 재능을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 우리나라 국악 발전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적지 않았을 터이다.

 

후배 예술가들에게 주는 조언 일곱 가지

 

  1. 예술인이기에 앞서 바른 인격수양을 해라

훌륭한 예술인이 되기에 앞서 먼저 인간이 돼야 한다. 인격 수양이 제대로 되지 못한 예술인이라면 제 아무리 능력이 빼어나다 할지라도 결코 훌륭한 예술인이라고 하기 어렵다.

 

  1. 끈기를 가지고 하라

‘소리’라는 것은 목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고된 연습과 꾸준한 노력이 없으면 힘든 일이다. 물론 천부적인 소리꾼이 있기야 하겠지만, 근본적으로 이 일은 끈기 없이는 해낼 수 없는 작업이다.

 

  1. 자기 마음부터 다스릴 줄 알라

‘소리’를 하기 위해서는 목소리를 다스리기에 앞서 자신의 마음부터 수양하고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1. 자신의 재능을 사랑하고 아껴라

요즘이야 정부에서도 국악에 대한 지원을 해주고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많아졌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특출한 사람을 빼고는 여전히 소리하는 사람들이 활동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누가 뭐래도 자신의 재능을 사랑하고 아껴라. 그리고 자부심을 가져라.

 

  1. 자신이 하는 일에 열정을 가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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