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인 김성녀 어머니 박옥진 여사

내 어머니는 국악계의 ‘열녀 춘향’ 천상 여자

이 내용은 <코리아 타운> 김태선 발행인이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재직 당시 한국 정부와 함께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 역대 수상자 15명의 자식 사랑 이야기를 묶어 단행본으로 펴낸 것입니다.

자녀 예술가들이 어머니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는 1인칭 서술기법을 사용한 이 책은 단행본 사상 최초로 사진을 곁들인 잡지식 편집기법을 도입, 독자들로부터 높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제 7년여의 세월이 흘렀지만 본란에서는 당시의 내용을 가감 없이 그대로 수록, 성공한 예술가 자녀를 키워낸 장한 어머니의 사랑 이야기가 우리 교민사회에 타산지석의 효과를 가져오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인내와 희생으로 한 평생

고운 음률 위에 힘겹게 걸터 앉은 한 맺힌 어머니의 가슴 저민 숨소리가 이젠 한 가닥 노래자락으로 꿈틀거린다. 그 옛날 돌이키기도 힘든 기억 속에 아물거리며 숨어 있던 쉼 없는 고통의 세월들, 어머니는 그렇게 한 평생을 보내셨다.

인내와 희생으로 평생을 걸어오신 나의 어머니는 외유내강의 전형적인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 그대로이다. 자식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주는 어머니, 욕심과는 거리가 멀었던 아주 검소하고 단정한 어머니는 늘 남에게 어긋남이 없는 행동으로 그렇게 곧은 길을 걸어 오셨다.

배우이면서도 그 흔한 매니큐어 한번 손톱에 발라본 적이 없는 어머니, “여자는 일부종사해야 한다”는 굳은 신념으로 평생 고통만 안겨줬던 아버지를 끝까지 믿고 따르셨던 어머니. ‘국악계의 열녀 춘향’이라 불려졌던 천상 여자인 그가 바로 나의 어머니 박옥진이다.

어머니를 떠올릴 때면 여자로서, 아내로서, 여성 국극인로서 살아온 모든 생활들은 아물거리기만 하다. 어머니가 살아온 날들을 생각하면 그저 우리 6남매의 학비를 벌기 위해 악착같이 구셨던 것 말고는 전혀 기억할 수가 없다.

어머니의 그 기구했던 운명은 당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전남 진도가 고향인 어머니가 뱃속에 있을 때, 임신 중에는 온 가족이 행실을 조심하던 우리의 전통 풍습을 깨고 외할아버지가 개고기를 드셨다.

그 때문인지 난산으로 산모와 아기가 함께 고생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갓 태어난 아기는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며 괴로워했다.

보다 못한 할아버지가 아기의 팔에다 아편을 놓았고, 그 뒤에야 아기는 젖을 먹고 정신을 차렸다. 그 아기가 바로 나의 어머니였다.

 

계모의 학대, 굶기를 밥 먹듯

그렇게 세상 빛을 보게 된 어머니의 고생은 그게 끝이었으면 좋았으련만 진짜 어려움은 그 뒤부터였다. 어머니가 서너 살쯤 되었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할아버지는 재취를 맞게 되었다.

우리네 전래동화 내용처럼 막내였던 어머니는 계모로부터 거의 날마다 얻어 맞으며 어린 삶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열 세 살 차이가 나던 큰언니가 와서 그 광경을 보고는 동생인 어머니를 데리고 나가 동기간만 따로 살았다. 이 동기간이 나중에 여성국극단 ‘삼성’을 만든 주축들이다.

당시 어머니의 오빠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큰언니는 여성창극 단원으로 북한까지 전국 순회를 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큰언니가 이따금 들러 생활비를 주고 가곤 했지만, 늘 돈이 부족해 어머니는 굶기를 밥 먹듯 했다. 그렇게 어린 시절을 매맞고 굶으며 보내서인지 어머니는 어떤 일을 하든지 참는 데는 크게 이력이 나 있었다.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노래를 잘했다. 하도 배가 고파 처음에는 먹는 것 때문에 판소리 명창 인간문화재 김연수 선생님이 창단한 유랑극단의 아역으로 들어가 그들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후 그곳에서 김연수 선생님으로부터 정식으로 판소리를 사사 받았다.

하지만 고생은 마찬가지였다. 한번은 공연이 끝났는데도 극단이 돈을 못 벌어 여관비와 밥값을 치를 길이 없었다. 그러자 극단은 다른 데로 장소를 옮겨가면서 밥값 대신 어머니와 신 숙이라는 여배우를 맡겼다.

신 숙이라는 배우는 집에서 돈을 주고 데려갔지만 어머니는 아무도 찾는 이가 없어 그곳에 혼자 남아 몇 달동안 고생을 했다. 여관 주인은 밥도 안주고 잡일을 시키며 어머니를 구박했다.

다행히도 나중에 이모가 소식을 듣고 어머니를 데리고 가셨다. 그러나 어머니의 팔자인지 후에 그 극단에서는 연극 ‘단종애사’에 아역이 필요하다며 어머니를 다시 데리고 갔다.

 

여성국극단 ‘삼성’ 시절의 짧았던 행복

‘단종애사’는 북에서 왔던 윤인자씨, 장동휘씨, 황 해씨 같은 신극 배우 몇 명을 영입해서 함께 한 연극으로 큰 히트를 쳤다. 그리고 그때 어머니는 평생 고생의 길을 걷게 되는 또 다른 인연을 맺게 된다. 바로 그 배우들 중에 나의 아버지가 계셨던 것이다.

어머니와 열 세 살 차이가 나는 아버지는 당시 윤인자씨와 함께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이 어린 어머니를 매우 귀여워했는데 그렇게 2, 3년을 같이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윤인자씨와 크게 싸우고 헤어져 극단을 떠났고, 이후 가끔씩 극단에 들르시다가 어머니가 열 여섯 살 되던 해 마침내 두 사람은 함께 살기 시작했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어머니는 위험 속에서 아버지를 따라다닐 수 없어 목포에서 살았고, 아버지는 계속 군대와 피난민 위문공연을 다녔다. 얼마 후 아버지가 부산 공연을 오면서 어머니를 부산으로 부르셨고, 어머니는 임신한 몸으로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아버지를 만난 어머니는 산꼭대기에 오두막집을 얻어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살다가 얼마 후 그들과 합동결혼식을 올렸다. 나는 9.28 수복 뒤에 낳으셨다.

그후로는 줄곧 두 분이 함께 사시며 어머니도 아버지가 계시던 극단에서 함께 일을 했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주연 배우의 대역으로 일했지만, 나중에는 본격적인 주연 배우가 되어 박옥진이라는 이름이 사람들 입에 크게 회자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배고픔을 면하게 됐고 돈도 조금씩 모았다. 얼마 후 아버지는 어머니, 이모, 노래를 하던 외삼촌의 부인 조양금씨를 주축으로 여성국극단 ‘삼성’을 창단하셨다.

아버지가 연출을 하고 외삼촌이 사업을 하고 어머니와 이모, 외숙모가 주연하는 최초의 가족 극단이 탄생됐던 것이다. ‘가족 극단 삼성’의 인기는 하늘을 치솟았다.

그때 ‘삼성’이 벌어들인 돈은 가마니로 끌어 담았을 만큼 많았다고 한다. 어머니의 일생 중 아마 그때가 가장 배부르고 편한 시절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나와 바로 밑의 동생 성애을 낳았을 그때가 어머니의 황금시절이었던 것이다

 

비극 연기, 눈물의 여왕 박옥진

하지만 운명은 어머니의 그 편한 삶을 원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머니의 운명적인 고생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때에는 예술인들이면 문인들까지 거의 멋으로 아편을 했던 때라 그 바람을 타고 아버지도 아편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나라 최초의 총천연색 영화 ‘춘향전’을 제작하면서 아버지는 아편 때문에 제대로 된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흥청망청 돈만 뿌리고 다녔다. 아버지는 그 시절에 침대까지 있는 차를 몰고 다니며 그야말로 돈을 물처럼 썼다.

하지만 ‘춘향전’은 막상 개봉을 하자 실패로 돌아갔고, 우리집은 그로 인해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 많던 돈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고 빚까지 지게 됐던 것. 여성국극단 ‘삼성’은 완전히 망해버리고 아버지는 폐인이 되다시피 했다.

때문에 어머니는 그때부터 당신 몸은 보살피지 않고 다시 일을 찾아 무대에 서야 했다.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 극단을 옮겨 다니면서 일을 계속했다.

하지만 자식을 둘이나 둔 아버지는 가장의 책임을 등한시 했다. “극단 단장과 대표로 있던 내가 어떻게 남의 밑으로 들어갈 수 있겠느냐?”는 알량한 자존심 하나로 아버지는 그저 무위도식만을 계속했다.

그런 아버지 때문에 더더욱 어머니가 일을 해야만 우리 식구들은 먹고 살 수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머니의 인기는 계속 치솟아 여기저기서 스카웃 손길이 뻗쳐오기도 했다. 한창 인기가 절정일 때 어머니는 일본까지 공연을 가기도 했다.

당시 비극 연기, 눈물의 여왕이라면 신극에서는 강효실, 국극에서는 박옥진을 꼽을 만큼 어머니는 연기를 잘 하셨다.

 

죽기 전엔 결코 쓰러질 수 없었던 어머니

하지만 그렇게 인기가 있고 돈을 많이 벌어도 빚을 갚느라고 어머니는 늘 허덕여야 했다. 잠시라도 자신의 인기에 만족하거나 쉴 틈이 없었다. 어머니에게 있어 인기란 단순히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하나의 조건밖에 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렇게 번 돈으로는 빚을 갚고 우리의 학비와 생활비는 야참비라고 나오는 식비를 모아서 겨우겨우 충당했다. 때문에 어머니는 굶기를 밥 먹듯 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힘든 상황 속에서도 긴 칼을 휘저으며 추는 어머니의 쌍칼춤은 장안에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아마도 예인으로서의 프로정신이 어머니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 극단에서는 어머니가 유일한 쌍칼춤 예능 보유자였고, 관객들은 그 춤을 보려고 모여 들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몸이 아파도 무리하게 계속 춤을 출 수밖에 없었고, 결국 무대에서 쓰러지셨다.

의사로부터 “이런 사람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았느냐?”는 얘기를 들을 만큼 어머니의 등에는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어머니는 늑막염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당신이 누워버리면 고생할 자식들이 눈에 선해 아픔과 고통을 참고 무대활동을 계속하셨던 것이다. 죽기 전까지는 결코 쓰러질 수 없었던 어머니, 그게 나의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늑막염으로 쓰러지시자 어머니가 일하던 극단에서는 어머니를 폐물 취급을 했다. 어머니는 더 이상 무대에 설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생활을 위해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하고 또 다른 극단으로 옮겨가 일을 계속해야 했다. 차라리 재주나 인기가 없어 좀 쉬기라도 했더라면 몸이라도 회복할 수 있었을 텐데 결국 어머니는 늑막염에 폐병까지, 어렵다는 병은 모두 다 앓아 보셨다.

그런 와중에서도 어머니는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하지만 따로 나가 살고 있던 아버지와 재결합을 하면서 다시 그 돈은 날아가고 말았다. 아버지가 ‘별’이라는 극단을 창단해 공연을 올렸는데 그 극단이 그만 창단 공연과 함께 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자식들 앞에선 절대 눈물 보이지 않고…

어머니가 죽을 고생을 해서 조금 벌어놓으면 아버지가 한 순간에 날려버리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던 셈이다. 그때 어머니가 아버지와 다시 합치지만 않았다면 어머니의 고생은 거기서 끝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로 인해 평생 고생 보따리를 메고 다녀야 했던 어머니의 삶을 생각하면 마치 내가 죄인이 된 기분이다. 아버지와 별거 중이었을 때 주위에서는 재혼 얘기가 많이 있었다. 하지만 나와 동생 성애가 아버지를 찾아 다시 어머니와 결합시켰다.

그때 우리가 나서지 않고 그냥 있었다면, 어머니가 재혼을 하셨다면 과연 그 같은 고생을 하셨을까? 지금보다 나은 생활을 영위하고 계시지는 않았을까?

먹고 살기조차도 힘든 상황이었지만 어머니는 맏딸인 나를 무리해서라도 공부를 시키려 하셨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이 있던 날 어머니는 공연 때문에 지방으로 내려가셨고 나 혼자서 시험장으로 향했다. 그런 나를 보며 어머니는 무척이나 미안해 하셨다.

다른 부모들처럼 딸에게 최선을 다해주지 못한다는 생각에 당신 스스로 마치 죄인이 된 것처럼 나에게 미안해하셨다. 그런 어머니의 마음 때문인지 나는 당시 일류였던 진명여고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것이 내게 어머니에게 해봤다 할 첫 효도였고, 어머니는 그 후 나로 인해 희망을 갖게 되었다. 고등학교는 그렇게 다녔지만 대학은 결국 포기해야 했다. 그때 어머니의 심정은 어땠을까? 아마도 남모르게 많은 눈물을 흘리셨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어머니는 우리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다. 그때뿐만 아니라 어머니는 한평생 자식들 앞에서는 절대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다.

그러한 어머니가 딱 한번 눈물을 보이신 적이 있었다. 훗날 내가 돈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대학을 뒤늦게 졸업하고 어머니에게 학사모를 씌워 드리는 순간, 나는 어머니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볼 수 있었다.

 

너무 일찍 무대에서 사라진 ‘아까운 예인’

늑막염으로 쓰러지셨던 어머니는 일본공연 도중 다시 쓰러지셨다. 한국에 돌아와서 어머니는 그 동안 얻은 온갖 병을 싸 안고 결국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다. 그때 같이 활동하던 오정숙씨나 성창순씨 같은 친구 분들은 지금도 국악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 후부터는 내가 연년생인 동생과 함께 ‘비둘기시스터즈’를 구성해 노래를 부르며 우리 식구의 생활을 이끌어가야 했다. 어머니가 그렇게 모진 고생을 하며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동안에도 가장인 아버지는 끊임없는 여성 편력으로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돌이켜보면 어머니는 평생 자식들 믿고 사는 것 말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삶을 사셨던 것 같다. 그러한 어머니가 이제는 혼자 계신다. 그렇게 고생만 시키던 아버지가 얼마 전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이제부터의 삶이 어쩌면 진정 어머니 당신을 위한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하지만 이미 백발이 돼버린 어머니를 볼 때면 괜시리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평생 고생만 하신 어머니, 여성국극단의 히로인이셨음에도 이제는 평범한 할머니로 남아 손자의 재롱에 웃음짓고 계시는 어머니가 무척이나 안쓰럽다. 젊은 시절 함께 무대에 오르던 이들은 아직도 건강한 모습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어머니를 아시는 모든 분들은 “아까운 예인이 일찍 무대에서 사라졌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어머니의 고향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지금도 어머니의 고향인 진도에 내려가면 ‘배우 김성녀’를 반기기 보다는 ‘박옥진의 딸 김성녀’가 왔다고 반기신다.

그 분들은 아직도 어머니를 못 잊어 하신다. 나는 어머니를 존경하지만 어머니가 여인으로서의 삶은 참 잘못 걸어오셨다고 생각한다. 나는 늘 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결코 어머니 당신 같은 그런 삶은 살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여인으로서의 모든 삶을 포기한 채 남편의 사랑도 없이 평생 동안 그저 자식들만 바라보고 당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어머니의 모습은 여인으로서, 한 개인으로서는 정말 서글픈 삶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 못지 않은 감각의 소유자

어머니는 언제나 맏딸인 나를 남편처럼 친구처럼 여기며 모든 것을 의지하셨다. 그래서 나에게 섭섭한 것도 많으셨을 텐데도 표현은 절대로 하지 않으셨다.

그런 어머니가 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있다. 철저한 시간 개념이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시간 약속의 중요성을 늘 강조하신다. 특히 나에게는 더욱 그러하시다. 철저한 시간 약속이야말로 연예계, 예술계의 기본이라며 지금도 어머니와 함께 자는 날에는 어머니가 직접 시간을 체크해 주신다.

어머니는 여행을 무척 좋아하신다. 그리고 영화도 좋아하시고 연극도 좋아하신다. 감각 또한 젊은 세대 못지 않으시다. 또 영화나 연극 평을 잘하신다. 내가 공연하는 연극은 물론 어렵다는 영화, 연극 등을 매우 잘 이해하신다. 어떤 때는 내가 몰랐던 점들을 어머니께 듣는 경우도 많다.

가끔은 어머니가 자식들 때문에 자신의 무대를, 예인의 삶을 일찍 포기한 것이 안타깝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모두들 어머니를 놓고 ‘타고난 목소리, 국악계에서 활동했다면 누구보다도 잘할 수 있었을 재원’이라고들 했다.

하지만 자식들 때문에 중간에 날개를 접고 그런 재능을 포기했을 때 어머니는 속으로 얼마나 많은 눈물을 삼켜야 했을까! 지금이라도 나는 어머니의 건강만 허락 된다면 어머니와 함께 무대에 오르고 싶다.

어머니는 나를 예인으로 키울 생각은 전혀 없으셨다. 하지만 연출자인 아버지와 배우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나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무대에 오르곤 했다. 아역 배우가 필요하면 어머니는 나를 무대에 세우셨고 나도 그것을 무척이나 즐거워 했다.

하지만 내가 본격적인 예인의 길을 걷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처음에 몹시 반대하셨다. 그 길이 얼마나 어려운 길인가를 어머니 당신이 너무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칭찬이라곤 없었던 선배 겸 조력자

하지만 고교 졸업 후 어머니는 “정 네가 그 길을 걷겠다면 제대로 한 번 해봐라. 한 순간의 인기에 집착하지 말고 끝까지 갈 수 있는 그런 실력을 길러라”고 격려와 조언을 해주셨다.

나에게 늘 신랄한 비판을 거침없이 해주던 어머니, 칭찬이라곤 없었던 어머니. 선배이자 조력자인 나의 어머니는 그런 분이셨다.

어린 마음에 어머니를 원망한 적도 있었지만 그런 어머니가 계셨기에 지금의 내가 있고, 또 이만큼의 위치에서 어머니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이리라. 실제로 나는 그런 어머니가 계셨기에 늘 든든했다. 어머니는 나를 가장 잘 아는 스승이셨다.

자식은 왜 늦게 철이 드는지, 이모가 늘 어머니에게 “이 불쌍한 것, 이 불쌍한 것” 하셔도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마흔이 넘어 어머니에게서 당신의 삶을 처음 들었을 때에야 이모의 그 말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젠 나는 많은 시간들을 어머니와 함께 하고 싶다. 늙어서 가녀려진 어깨의 어머니와 함께 여행도 가고 매 순간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리고 싶다. 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마음먹은 생각과는 달리 그렇게 해드리지 못해 늘 죄스러운 마음이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 언제 개일지 모르던 그 하늘. 그 하늘이 어머니의 일생이셨다. 하지만 흐린 날 뒤에는 찬란한 서광이 있듯 이제 어머니의 남은 일생에는 늘 찬란한 햇빛이 비칠 것이다.

구슬픈 아리랑 가락에 힘겹게 넘어가던 아리랑고개, 그 고개를 이제 어머니는 다 넘으신 것이다. 앞으로는 신명 나는 가락에 맞춰 흥겨운 춤사위를 보여줄 수 있도록 맏딸인 내가, 아니 우리 자식들이 춤판을 어머니에게 만들어 드리는 일만이 남아 있다.

“어머니, 저희와 함께 멋진 춤판을 만들어 나가요. 그리고 구성지고 신명 나는 가락을 같이 이끌어 나가자구요!

 

어머니가 주신 변함없는 가르침 일곱 가지

 

  1. 욕심을 버려라

재물이나 일상생활 모든 면에서 어머니는 욕심을 버리라고 늘 말씀하셨다. 때문에 어머니는 배우생활을 하면서도 그 흔한 매니큐어 한번 손톱에 발라본 적이 없으셨고 아주 검소한 삶을 살아오셨다.

 

  1. 어긋남 없는 행동을 하라

어머니는 우리에게 “모든 일에 항상 반듯하게 행동하라”고 일러 주셨다. 어머니는 늘 남에게 싫은 소리, 이치에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으셨고 그런 일면들을 몸소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1. 여자의 정도를 걸어라

그렇게 고생만 안겨주셨던 아버지를 끝내 버리지 않으신 것은 “여자는 모름지기 일부종사해야 한다”는 여자의 길을 따르신 것이었다.

또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아내로서의 역할은 물론 어머니로서의 역할도 충실히 수행하셨다. 때문에 어머니는 ‘국악계의 열녀 춘향’이라 불리셨고, 말 많은 연예계 생활을 하는 나에게도 늘 이 같은 말씀을 강조하셨다.

 

  1. 프로정신을 가져라

예인이셨던 어머니는 아무리 몸이 아프고 힘이 들더라도 당신을 원하는 무대가 있으면 그 곳에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무대에 섰다.

특히 대중들에게 이름이 많이 알려진 나에게는 “모든 일에 있어 프로정신을 갖고 임하라”고 늘 말씀하신다.

 

  1. 자식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말라

어머니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라도 우리에게 눈물을 보이신 적이 없다. 항상 강인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 주시려고 애쓰셨다.

당신의 눈물이 자식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어머니라는 존재가 자식들에게 희망을 주는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1. 시간을 철저히 지켜라

우리에게 늘 말씀하시는 시간 개념. 즉, 어머니는 시간약속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하신다. “시간 약속이야말로 연예게, 예술계의 기본”이라며 지금도 직접 내 시간을 체크해주신다.

 

  1. 참된 실력을 쌓아라

프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참된 실력. 어머니는 나에게 늘 “어떤 일이든 하려거든 제대로 해봐라. 한 순간의 인기에 집착하지 말고 끝까지 갈 수 있는 그런 실력을 기르라”고 조언하신다.

 

후배 예술가들에게 주는 조언 일곱 가지

 

  1. 다방면으로 노력하라

유능한 연극인, 예술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전공 뿐만 아니라 춤, 노래, 소리 등 다른 분야의 것들도 다양하게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말 그대로 ‘탤런트’가 되어야 한다.

 

  1. 우리의 소리를 사랑하라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 ‘우리의 소리’를 알아야 한다. 우리 것, 우리의 정서가 없으면 다른 그 무엇도 있을 수 없다.

 

  1. 프로 의식을 가져라

보여주는 예술인, 관객들이 원하는 예술인이 돼야 한다. 배우로서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관객과 약속한 무대, 나를 필요로 하는 무대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

 

  1. 즐겁게 생활하라

모든 일은 즐겁게 생각하고 즐겁게 행동해야 한다. 일상 생활의 내가 곧 무대에서 보여지는 모습이다.

짜증내고 힘들어 하고 지쳐 있으면 무대에 올라도 신명 나는 판이 되기가 힘들다. 그것은 나를 보러 온 관객들을 배신하는 행위이다. 나를 보면서 즐거움을 찾는 관객들을 위해서라도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생활하라.

 

  1. 항상 노력하라

배움의 길은 끝이 없다. “내가 이제 이만큼의 위치에 있으니 어느 정도는 되겠지”라는 자만심보다는 항상 노력하는 자세,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1. 자기 일에 책임을 져라

자기가 맡은 일, 맡은 배역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 하기 싫다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중간에 버리거나 포기한다는 것은 세상일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1. 작은 것이라도 소중히 생각하라

비록 작은 배역, 작은 일이 주어져도 자신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배역,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하라.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야말로 큰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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