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결사

엉거주춤, 여인의 활약상을 지켜보던 노인의 딸이 내 기억 한편에 오래 머물길

얼마 전 작은 시골동네 커피숍에서 있었던 일이다. ‘덜그럭’ 하는 소리에 무슨 일인가 해서 돌아다보니 어떤 할머니가 들고 가던 커피잔이 넘어지는 소리였다. 층계 마지막 계단에서 살짝 균형을 잃으신 것 같다. “에이, 저런…” 사람들의 단말마적 신음은 마시기도 전에 쏟아진 커피 두 잔에 대한 아쉬움을 대신했다.

 

01_여인이 보여준 작은 미덕이 왠지 불편해 보였던 이유는?

할머니의 딸로 보이는 중년의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그때 커피숍 앞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젊은 여인이 번개처럼 일어나 “별일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며 할머니 손에 있던 커피잔을 자기가 받아 들었다.

그녀는 쏟아진 커피잔을 카운터로 가지고가 주인에게 리필을 요청했다. 리필 된 커피 두 잔을 노인의 테이블까지 가져다 준 후에야 그 여인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악당의 출연으로 아수라장이 된 도심 한복판을 눈 깜박할 사이 제자리로 돌려놓고 사라지는 슈퍼맨처럼, 모든 것이 완벽하게 처리되었다.

곤란한 처지에 있던 사람을 도와주는 광경에서 큰 감동까지는 아니라도 흐뭇한 마음이 들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여인이 보여준 일상의 작은 미덕이 왠지 불편해 보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고맙다.” 한마디 하실 만도 한데 할머니는 안심하라고 위로하는 여인에게 의외로 무표정이었다. 딸을 자리에 앉혀놓고 자신이 손수 커피를 시킬 정도면 정정하고 독립적인 분이 아닌가.

 

02_이런저런 생각 속엔 여인의 이미지와 중복되는 아버지의…

졸지에 자기 어머니가 처한 곤란한 상황을 손 놓고 구경만 한 딸의 입장은 뭐가 되겠나. 리필도 제삼자가 나서야 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할머니 자신이 해결할 수 있게 시간을 좀 드렸다면 좋지 않았을까? 내게 드는 이런저런 생각 속에는 여인의 이미지와 중복되는 아버지의 모습이 있었다.

내년이면 아버지는 아흔이 되신다. 더 늦기 전에 아버지와 좋은 추억을 만들어야 한다는 초조함 때문인지 나는 특별한 일 없이도 친정에 들르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기껏 즐겁게 지내다가도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는 늘 후회가 밀려드는데 “좀 더 참을 걸….” 이유는 아버지에게 터트린 내 신경질 때문이다.

자잘한 일상의 문제에 아버지가 늘 해결사 역할을 자처하시고 같이 보내는 시간 동안 쌓였던 불만이 돌아오기 전날 터지곤 한다. “물어봐. 전화해 봐. 더 달라고 해….” 주차하는 일부터 여행가방을 싸고 푸는 것까지 아버지는 사람들이 잠시 머뭇거리거나 생각하는 순간을 기다리지 못하신다.

 

03_이런 때는 나도 영락없는 아버지 딸인가 보다

우리도 우리 나름의 방식이 있고 생각이 있다고 나와 여동생은 저항도 하고 회유도 해보지만 그때마다 아버지는 “마흔이 넘어 옳고 그른 것을 너무 따지는 것도 미성숙한 거다”라는 말로 두 딸의 항변을 당당하게 막아내신다.

“뱉어! 뱉어!” 뜨거우면 어련히 뱉을까. 남편이 입천장을 델까 봐 입에 든 음식을 뱉으라고 성화를 부린 것이 여러 번이다. 이런 때는 나도 영락없는 아버지 딸인가 보다.

남편이 한번은 골이 난 표정으로 그런 일은 자기가 결정할 수 있으니 제발 걱정하지 말란다. 올해도 친정에 가볼 예정이다. 쌀자루에서 쌀이 새어 나가듯이 추억을 만들 세월은 줄어들고 있는데 아버지가 해결사 역할을 하시면 좀 어떤가.

엉거주춤 자기 자리에서 젊은 여인의 활약상을 지켜보던 노인의 딸이 고운 꽃처럼 내 기억의 한편에 오래 머물기 소망한다.

 

글 / 박해선 (글벗세움 회원·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