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생각

아버님 사후 1년을 못 넘기시고 하얀 소복차림에 주무시듯 하늘나라로…

나의 어머님은 김수로왕을 시조로 모시는 김해 김씨이시다. 1917년에 태어나시었으며 소학교 4년을 다니시었고 8남매의 장녀로 태어나시었다. 17세 되던 해 결혼하셨는데 아버님과는 7년 연하이시며 9남매를 낳아 6남매를 기르시었다.

 

01_성난 얼굴을 본적이 없었고 언제나 낮은 자세로 따뜻한 손길을

함자 (銜字)가 ‘월’이셨는데 성품이 온화하시고 남달리 배려심이 많으셨던 전형적인 여성이셨다. 동생들과 함께 자라면서 어머님의 성난 얼굴을 본적이 없었으며 언제나 낮은 자세로 따뜻한 손길을 주셨다.

면사무소 서기였던 아버지와 갓 결혼하시고 신혼이셨던 1936년 병자년 포락 (浦落)… 살던 집과 함께 하루 아침에 전 재산을 잃어버리고 절망과 슬픔과 고난 속에도 삶을 이어가야만 했던 그 시절… 내가 자라면서 어머님은 그때의 이야기를 한숨으로 자세히 들려주셨다.

할머니 할아버지 유해를 찾아 몇 날을 두고 동해안 일대를 찾아 헤맸으나 찾을 수 없었다며 시름에 잠기던 모습… 어머님 마음을 모두 헤아릴 수는 없었으나 시부모님을 잃은 새 며느리의 마음은 얼마나 쓰리고 아프셨을까.

이후, 모든 시름을 떨쳐버리고 성장하면서 어머님과 함께했던 그 시절은 행복하였다. 어머니도 무럭무럭 자라나는 자식들의 건강한 모습에 희망을 얻으신 듯 어려운 일에도 언제나 즐거워 보이셨다.

포락으로 떠내려 간 집은 목조건물로 새로 지었다. 방 두 칸, 마루가 있는 목조건물의 새집은 가족이 늘면서 사람 사는 집 같아 보였다. 그곳 내 고향은 모두 아홉 가구가 촌락을 이루어 신작로를 사이에 두고 옹기종기 모여 부족함 없이 살았다.

 

02_비가 오는 궂은 날이면 감자전, 텃밭에서 따온 옥수수를 삶아

대장간집, 이발소집, 김목수댁, 장돌뱅이네, 한의원 가이샹, 노동일 하는 영달집, 우리는 동산에서 이사 온 집이라고 하여 ‘동산집’으로 불리었다.

어머님은 매년 아버지 생일날 아침이면 이웃어른들을 초대하여 아침식사를 마련하셨는데 전형적인 촌락의 아홉 가구가 그렇게 애환을 나누며 대소사를 함께했던 기억이 새롭다.

내가 성장하고 성인이 되면서 가족을 떠나 살게 되었고 어머님과의 그리운 그때의 추억은 옛 동화 속의 이야기인양 자꾸 조금씩 조금씩 희미한 과거사로 멀어지곤 하였다.

겨울 어느 날 아침, 땔감이 없어 생 솔가지 나무로 아궁이에 불을 지펴 연기를 마시며 아침밥을 지어주시던 어머님이 보고 싶다. 조막손 내밀며 누룽지 졸라대든 어린 형제들 밥을 뜨시고 부러진 수저로 솥 바닥을 긁어 누룽지 한줌씩 나누어주시던 어머님의 구수한 손길이 그립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궂은 날이면 감자전을 부쳐주시고 텃밭에서 따온 옥수수를 삶아 주시던 어머님. 생각만으로도 혀끝에서 맴도는 그 맛이 너무도 아련하다.

 

03_건강 좋아지시면 여행 다녀오고 싶다던 어머님의 꿈은…

늦은 가을, 김장철이 되면 배추를 리어카에 싫고 동해바다로 나가 청정 해수에 어머님과 함께 발목 담그며 배추를 절였던 꼬마 형제들, 그 시절은 마냥 즐겁기만 했었다.

이웃 엄마들 모여 김장해주시고 땅을 파고 항아리 그 속에 묻어 김치 담그니 깊은 겨울 긴긴 밤 김치 익어 가는 상상에 군침 흘리니 담근 김치 겨울 지나 늦은 봄 식탁에 올라 입맛 돋우니 묵은지는 어머님 맛 아니던가.

어른이 되어 사회활동을 하면서 어머니를 봉양하지 못하면서 속죄하는 마음이 쌓이면서 무거워지기만 했다. 아버님께서 중풍으로 쓰러지시고 어머님께서 10여 년 동안 간병을 하시었으니 연약한 몸으로 남은 자식들 키우시고 살림하시느라 힘에 겨워 밤이면 허리가 아프시다는 어머님의 신음소리.

아픈 허리 지긋이 밟아주면 한결 시원하다 좋아하셨다. 건강이 좋아지시면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 하시던 어머님의 꿈은 아버님이 앞서 돌아가시고 오랜 간병으로 기력이 소진된 어머님이 아버님 사후 1년을 넘기지 못하셨다.

하얀 소복 차림에 주무시듯 하늘나라로 조용히 가시었으니 얼마나 원통한지… 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

 

글 / 홍봉표 요한 (글벗세움 회원·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