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많은 집

밤새도록 목 놓아 운다 굵은 빗줄기로 두들겨 맞는 양철지붕   한 때, 눈부시게 빛나던 나이테 풀며 힘들게 견디는 숨  

전쟁 속에 핀 사랑

“전쟁 속에서 핀 사랑이야.” “네가 전쟁 속 사랑을 알아?” “영화에서 봤어.” “어떤 영화?” “노트북” “노트북? 치매 걸린 아내가 써놓은 일기

지금

톡 톡 건드리다 말다 찔러보다 말다   간지러워   앞마당에 배롱나무 꽃 움찔 가만히 앉아있는 긴부리꿀먹이새 붉게   여름 한

끝물

앞마당 화단에 몇 달째 3미터가 넘는 기다란 목을 늘어뜨리며 장하게 피던 용설란꽃이 다 지고, 마른 대만 남아 매달려 있다. 마지막까지

생일케이크

달이 내려앉는다 제날짜를 찾아   햇수만큼 환하다   손뼉 사이사이 떠오르는 둥근 달   한차례 침묵의 계절풍을 맞는 촛불 따라

희미하게 살해 충동이 느껴지는 발라드 (단편소설 연재)

울타리를 타고 계속 기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출입금지’ 표지판을 본 내 심장이 석고처럼 굳어진다. 경고판에 겁먹어선 안 된다. 아하, 역시

추석 2020

–경에게    작은 오두막에서 기억이 자란다 끓는 연탄불에 물솥을 올리고 외출 나갈 작은 오빠 운동화 두 짝을 솥뚜껑 위에 엎어놨다 따뜻해진 발은

희미하게 살해 충동이 느껴지는 발라드 (단편소설 연재)

아내가 자살했다. 스스로 손목을 그었다. 시신에서 흘러나온 혈액 바다에 그 동안 복용해 오던 ‘침팩스’ 캡슐들 그리고 보드카가 병째로 뒹굴고 있었다.

우는 신발

– 진학 형에게     하늘은 울 일이 없어 이 땅에 울다 가는 거다 다 울고 오라는 세상 얼굴 내밀며 울지 않으면 엉덩이를 맞는 거야 울러 왔다는 거 잊지 말라고 그래서 피카소도 열심히 그린 우는 여인   나는 소리 내어 울고 있는 신발을 본 적이 있지 하늘에 줄 하나 걸어놓고 세상을 내려다보며 떠나는 맨발을 올려다보며 울고 있는 가지런하고 어여쁜 구두를 보았지 울지 않으면 미치고 만다고 우는 아이들이 모여 평화스러운 골목 팀 스프리트 바람이 한참이던 양평의 들판 선아였던가 2월의 외딴 집

희미하게 살해 충동이 느껴지는 발라드 (단편소설 연재)

넌 나한테 죽은 사람이야. 넌 죽었어. 난 차갑게 미소 짓는다. 라이플엔 내 심장보다 뜨거운 블릿이 곧 장착될 것이다. 팔을 뻗어

꽃봉오리

얘들아 내 말 좀 들어줄래? 내가 왜 평생 혼자 사는지 아이도 못 낳는지   원래 난 예뻤거든 그날 그 일본

norfolk island*

섬의 길이 열리다   수평선을 넘고 넘다 고향 길 잃고 가족 친구까지도 잃어버린 나비 날개 찢어지는지도 모른 채 108배 넘는

잎 관 ㅡ마운틴 윌슨에서

늦은 여름날 장례식장 태양이 아직 머리를 드러내지 않았을 때   죽은 줄 알았던 유칼립투스들이 죽을힘을 다하여 끌어올리는 것   살아

땅에 내리고 싶어요

나는 게으르다. 팀을 따라 떠나는 단체 여행을 엄두도 못내는 이유다. 그런 내가 매년 1월1일이 지나면 여행을 떠난다. 전세계를 들썩이는 휴가가

스마트폰 3

ㅡ중독     생각을 묻는다 손안에   들여다봤을 뿐인데   일상의 틈새를 메우려 반려 했을 뿐인데 따로 두었다가도 요술램프 지니를

빗줄기에 매달리는 기억들

흐린 가을날씨에는 생각이 더 먼 곳으로 떠난다. 시야가 안개평야로 펼쳐져 있음으로 지칠 기색도 없이 멀리 아주 멀리까지 가보는 것이다. 거기에

전봇대를 따라

시드니 가을이 간다 저물어 걷는 환한 길, 사월 그믐   저녁 하늘을 향하여 길이 간다 줄이 간다 높은 줄이 저어기

그냥 좋다는 것

젊은 작가와 평론가가 진행하는 팟케스트 방송을 듣는 중이었다. 한 여성 패널이 집안 살림하는 시간을 줄여서 글을 쓰고 싶다며 인공지능 로봇이

감 잎

저녁 빛 흩어지는 산 가을 풀숲 마을에 해가 집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일 그만큼 기쁜 일이 어디 있을까 달뜬 걸음

트로트가 좋아

‘아 하~~~ 신라의 바아아암~~ 이이이여~~’ 라윤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노래를 부르다 까르륵 웃는다. 올해 다섯 살인 라윤이는 내가 유튜브에서 ‘조명섭’이란 트로트

파타고니아, 파타고니아

나에게는 두 개의 파타고니아(Patagonia)가 있다. 하나는 물론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남쪽 지방에 걸친 거대하고 황량한 대평원이다. 다른 하나는 등산갈 때마다 메고

이번 주 온라인 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