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 잎

저녁 빛 흩어지는 산 가을 풀숲 마을에 해가 집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일 그만큼 기쁜 일이 어디 있을까 달뜬 걸음

트로트가 좋아

‘아 하~~~ 신라의 바아아암~~ 이이이여~~’ 라윤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노래를 부르다 까르륵 웃는다. 올해 다섯 살인 라윤이는 내가 유튜브에서 ‘조명섭’이란 트로트

파타고니아, 파타고니아

나에게는 두 개의 파타고니아(Patagonia)가 있다. 하나는 물론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남쪽 지방에 걸친 거대하고 황량한 대평원이다. 다른 하나는 등산갈 때마다 메고

유산

별 없는 하늘 이삿짐 가득 어두움 싣는다 노인이 살다 간 정부집 60불짜리 원룸 차례를 기다리는 대기실로 달려드는 깜깜한 집들 오랜

에릭 존슨 살리기

죽는다는 건 대단한 일이 아닐지 모른다. 사는 것이 장난이라고 가정한다면. 나는 존슨씨를 싣고 떠나는 앰블런스를 한 동안 지켜보다 등을 돌렸다.

딱 한 잔의 죽음

딱 한 잔 하려고 전화기를 치켜든다   불러낸 막걸리 한 병 선술집 둥근 양철 탁자를 술잔과 공전한다 어깨를 걸며 어우러지는

세실리아 미혜 하-장

‘82 년생 김지영’ 영화를 보았다. 왜 열광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내 나이가 벌써 쉰 고개를 넘은 지 오래지만 고루한 영화는

화석물고기

실러캔스* 낮은 소리로 불리던 이름 헛기침 아래 숨겨진 지천 여자가 무엇이냐고 다그칠 때마다 눈꼬리를 내렸다 허투루 피지 않겠노라고 고집하던 높은

춘자씨의 민트 3호

춘자씨의 첫 집. 하나의 거대한 저택처럼 보이지만 실은 열 가구가 다닥다닥 붙은 타운하우스를 보자마자 춘자씨는 단번에 그 곳이 마음에 들었다.

칼집

아내가 시장에서 사 온 둥근 호박에 칼집을 내달라고 한다 작게 칼집만 내주면 혼자 자를 수 있다고 한다 호박은 쉬이 칼을

아웃백 개론

단비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비에 ‘달다’는 말을 붙였을까. 오랜만에 내리는 비로 겨우내 움츠렸던 생명들이 기지개를 편다. 풀 죽어있던 수국이 당당해지고, 바싹

럭키의 봄

둘둘 싼 포대기 속 번개가 튄다   문이 열리자 쏟아지는 시궁창 냄새 목구멍 깊이 송곳니 날서는 저 문밖 어디를 지나왔는지

녹아버린 하루

눈이 내린다. 정원의 나뭇가지에 하얀 눈이 소복하다. 블루마운틴에서 지인이 보내온 영상에 렌즈 가득 하얀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 눈 구경을 한

빈 마음 짜는 일

노랑 파랑 덧신에 심은 꽃, 답들이 달린다   고요 틈으로 파고드는 뜨개바늘 털실뭉치에서 빠져나온 실 한가닥 바른 구멍 삐뚤어진 구멍

서커스 처음 본 날

갓 돌 지난 아기 간신히 몸 일으켜 허공으로 손을 뻗는다   까르르 까르르 부서지는 웃음, 가루 우르르 쏟아진다   강아지 꼬리치며 달려와도 잡을 수도 탈 수도 없는 미확인 비행물체   방 안을 질러가는 파리 한 마리 작은 손이 따라간다   공수진 (시인·문학동인 캥거루 회원·시집: 배내옷)

감자탕 (콩트)

“꼬라지가 간도 빼 묵것다.” 수아의 뒤꿈치가 자동문을 미처 빠져나가기도 전에 엄마가 내 면전에 쏘아붙였다. “잇다, 마 문디 자슥! 이기나 하나

죽을까 말까

아직 저승은 아닌 것 같고 머리맡은 온통 임종을 기다리는 눈빛   당장 눈을 뜬다 해도 곧추세울 리 만무한 생  

생명에 대한 변주곡

1 / 바다 앞에서 우주에 생명이 없다면 소리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리는 생명인가?  소리는 살아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주는 신호음인가?

깨졌다

전화벨 소리는 날카로운 브레이크 마찰음에 일그러졌다   주춤거리다 개찰구에서 통화는 시작됐다 플랫폼으로 예정에 없던 기차가 진입하며 소리는 점점 요란해졌다 설전은

이번 주 온라인 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