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 그래도 난 행복하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올리고 올려다본 동녘 하늘이 불그스름했다. 아~ 아름답구나 라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며칠 계속해서 거센 바람 불고 빗줄기 흩날리며 꾸물대던 날씨가 오늘은 화창해질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연금 나오는 날이다. 격주로 나오는 연금이지만 받을 때마다 고마움을 느낀다. 은행잔고 넉넉한 사람들이야 무덤덤하고 그러려니 하겠지만 내게는 기다려지고 기분 좋아지는 날이다. 동녘 하늘이 예고한대로 햇살 따사롭고 바람 잔잔하고 구름 숨죽인 쾌청한 하늘이 어서 나오라는 듯 소곤거린다.

오늘은 아내가 골프 치는 날이기도 하다. 손녀들 등하교 담당은 나다. 둘째와 막내 등교시켜주고 바로 쇼핑몰로 향했다. 쇼핑몰 안에 있는 은행이나 각종 상점은 오전 9시가 돼야 문을 열지만 수퍼마켓이나 카페는 오전 8시면 장사 시작한다.

내가 들락거리는 화장실도 이른 아침부터 열려있다. 늙으면 화장실 출입이 잦아진다. 늘 느끼는 거지만 쇼핑몰 화장실은 우리 집 화장실보다 깨끗하다. 소변기가 나란히 서있는 벽에는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니다’라는 얄궂은 표어도 없다. 정말 맘에 든다.

현금인출기에서 며칠 전부터 머리 속으로 계산해둔 돈을 인출하고 잔고를 확인한다. 다행이 마이너스는 아니지만 좀체 늘어나질 않는다. 절약하고 움켜쥐지 않으면 살 수 없었던 젊은 시절 가장 부러웠던 것은 “돈 있잖아!”라는 큰 목소리였다. 씁쓸하게도 나는 아직도 마음대로 사고 싶은 것들을 잠시의 주저함도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이 부럽다.

늘 그렇듯 몇 번 망설이고 멈칫거리고 머뭇거리다가 큰 결심을 하듯 카페에 앉아 커피를 주문한다. 격주로 한번 연금 나오는 날이면 행하는 나만의 행사다. 모두 제 할 일들로 외출한 텅 빈 집에 급하게 들어가야 할 이유가 없기도 하지만… 아, 집 지킴이 ‘테디’가 혼자 있긴 하다. 녀석은 주둥이를 제 앞다리 속에 파묻고 아직도 태평하게 자고 있을 거다.

어쨌건 격주로 한번이긴 하지만 이렇게 혼자 카페에 앉아 짙은 커피를 홀짝거리며 오가는 이른 아침 사람들을 멀거니 바라보는 것이 나는 즐겁다. 물론 일반인보다는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제복을 입은 사람들, 예컨대 청소하는 사람, 점포 문을 열어젖히는 종업원, 빠른 걸음으로 출근을 서두르는 예쁘게 화장한 여직원이 대다수이긴 하지만, 나는 그들의 생동감 있는 움직임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현금인출기에서 뽑아온 돈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커피를 마시면서 셈을 한다. 아들내외에게 보태는 변변치 않은 액수의 생활보조금을 봉투에 담는다. 손녀들에게 정기적으로 주는 포켓머니도 떼어놓는다. 연초에 할배 노릇하고 싶어서 막내손녀 칼리지 입학기념으로 사준 컴퓨터 대금 할부금을 봉투에 넣는다.

벌써 이만큼이나 갚았구나 하고 미소를 짓다가 아직도 이만큼이나 남은 잔액에 쩝쩝 입맛을 다신다. 멀리 떨어져 대학생활하고 있는 큰손녀에게 용돈이라도 좀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한숨이 나온다. 돈이 좀 많이 있으면 참 좋겠다.

다음주엔 아내 생일이 있다. 나는 지금까지 아내 생일만은 잊어본 적이 없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나도 형편없는 남편은 아닌가 보다. 허긴 요즘 세상에 제 아내 생일 잊고 사는 간 큰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만은….

하여간 아내 생일날 ‘축하해요’라고 입으로만 때웠다간 스쿠르지 영감으로 낙인 찍혀 남은 신상이 피곤하다. 현금을 봉투에 넣어서 주는 것이 나을지, 아니면 상품권을 구입해주는 것이 좋을지, 어느 것이 아내를 더 기분 좋게 할지를 생각한다.

한 달에 몇 푼이라도 모아야 서울도 가고 시드니도 가는데 그 몇 푼 모으기가 쉽지 않아 마음이 언짢다. 경제활동을 접은 후 나라에서 주는 연금이 유일한 수입이기에 한 푼이라도 모으지 않으면 아무데도 갈 수 없다. 못나고 염치없는 바람인 줄 알지만 연금 좀 더 주면 안되나? 그러면서 혼자 웃는다.

집에 돌아오면서 화이트와인 한 병 샀다. Sauvignon Blanc라고 하는데 고국의 부드러운 청주 맛과 비슷하다. 스테이크파이를 데워 데크에 앉아 와인 한잔 기울인다. 겨울이어서인지 햇살이 유난히 따사롭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