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메뚜기

오늘도 베토벤의 스프링 소나타가 들렸다가 작은 여운을 남긴 채…

일년 내내 눈을 볼 수 없는 이곳 시드니에서도 내 마음의 눈은 음악과 함께라면 늘 내린다. 어느 겨울, 블루마운틴을 지나 오렌지타운에서 본 눈은 나에게 참으로 아름다운 선물을 주었다. 삶의 무게 때문에 좋은 마음이 조금씩 희석되어버리던 때에 추억의 밥을 잔뜩 먹고 왔다. 그날 내 마음에도 종일 흰 눈이 펑펑 내렸다.

 

01_흐려지는 차창 너머로 떠오르는 지난 세월, 음악선생님

오늘도 그날처럼 바람이 차갑다. 흐려지는 차창 너머로 선명히 떠오르는 지난 세월, 흰 눈 그리고 음악선생님…. 살아 보니 음악이 너무 좋다. 당시 음악선생님은 미남이었고 총각이었다. 게다가 피아노는 그 누구도 그렇게 잘 치는 걸 보지 못했다.

어느 늦가을인가?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우리는 첫눈을 맞으며 선생님과 눈싸움을 하며 눈사람도 만들었고 ‘눈’ 노래도 배웠다. 악보도 없이 하얀 건반과 검은 건반을 넘나들던 그의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이자 나는 신기하고 위대해 보여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였다. 어린 한 소녀는 꿈에 물들었다. 피아노 소리를 듣고 그를 보면서 아무도 모르게 난 그의 탤런트를 훔치고 싶었다. 천상의 소리인 듯 청아한 음색…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연주 했던 곡은 ‘베토벤의 스프링 소나타’이었다.

베토벤의 독특한 액센트의 음색이 감동적인 작품 중 한 곡으로 멜로디는 뛰어난 변주실력과 풍부함을 보여주는 멋진 곡이라서 음악선생님은 자주 그 곡을 연주하셨나 보다.

어린 시절, 처음으로 정신세계를 비추어준 등불. 인생의 새로운 이미지를 가지게 해주고 감동을 알게 해준 선생님이었다. 그의 음색을 통해 나는 봄이 화사하게 활짝 펼쳐지는 느낌을 가졌다.

 

02_나도 저렇게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가 뛰놀 거야!

마음 깊이 파고드는 그 곡을 들으며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가 뛰놀 거야!’ 하는 결심과 함께 그 곡은 사무치게 좋아지는 음악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친구들과 소꿉장난을 하다가 집에 불을 냈다. 재가 불씨가 되어 새벽 3시에 누군가 “불이야! 불!” 하는 소리에 가족들이 일어나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하지만 이미 곳간에 추수해서 갈무리 해놓은 쌀과 곡식들은 다 타고 집마저 불길에 휩쓸려 반쯤 타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이 맨발로 우리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엄마 품에 안겨서 피신하여 큰댁에서 잠시 살았다.

바로 그 즈음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엄마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밤낮으로 졸라댔다. 불이 난 사건으로 인해 우리 집은 피아노를 가르칠 형편이 못 되었다.

‘모차르트는 여섯 살에 피아노를 배웠다는데… 이미 나는 늦었을까?’ 날마다 음악이란 혁명이 마음을 흔들었다. 마음이 하늘을 향해 음의 화살을 쏘아댈 때마다 나를 태우고 또 태웠다.

 

03_결국 배우고 싶은 가슴앓이 때문에 드러눕고 말았다

그 불길은 잡을 수가 없었다. 아득히 내게 숨어든 그 곡으로 피아노를 치고 노래하며 벅차 오른 가슴은 이미 대서양까지 건너고 있었다. 그건 멈출 수 없는 감동이었고 감격이었다.

4분의 3박자 왈츠 곡에 춤을 추고, 난 도레미, 3화음의 곡을 타고 피아노를 치는 나를 상상하며 엄마를 못살게 굴었다. 매도 맞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배우고 싶은 가슴앓이 때문에 드러눕고 말았다.

아무것도 못 먹고 나중에는 천장이 빙빙 돌고 가족들도 모두 빙빙 돌았다. 죽을 것 같았다. 어느 날 누워 있는데 창 밖 우리 창 너머 옆집 사과나무에 사과가 주렁주렁 열려있다.

한 개라도 먹으면 좋아질 것 같아 따다가 달라 했다. 그것을 몇 개 먹고 겨우 기운을 차렸다. 훗날 철이 들었을 때 당시 엄마의 고통을 가슴에 담기엔 너무나 작은 나였기에 후회를 많이 했다.

창밖에는 눈이 펑펑 내리고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려는데 ‘베토벤의 스프링 소나타’가 또 들린다. 내 마음은 다시 꿈틀거리고 만다. 간절히 한 번 더 내 소원을 엄마에게 말했지만 봄은 오지 않았다.

 

04_메뚜기도 한철! 배움의 시기도 한철! 눈이 와도 비가 와도…

어린 마음에 음악이란 세상과도 바꿀 수가 있다고 느끼고 죽어도 피아노를 배우자고자 했던 마음이 어느 날 겨우 통했다. 철없던 나의 어린 시절… 메뚜기도 한철이라는데 난 그 한때를 음악선생님 후원으로 용케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메뚜기도 한철! 배움의 시기도 한철!

때를 놓치지 않고 나는 피아노를 배웠다. 눈비가 와도 난 눈과 비를 맞으면서 피아노를 치러가면 피아노선생님은 피아노를 치라 하고 잠을 잔다. 그래도 나는 더 열심히 검은 건반과 흰 건반을 넘나들며 열심을 부렸다.

나의 중요한 배움의 시기를 알맞은 시기에 연출해준 음악선생님! 박자와 춤추고 그 기술과 테크닉을 익혀 이후 음악에 기대어 삶을 지탱하고 살아왔다.

사실 그때는 글리산도, 다가포, 메조피아노, 이런 단어들과 평생을 살 것이라곤 상상을 못했다. 음악선생님은 내가 지금까지 피아노로 삶을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좋아하실까? 오늘도 ‘베토벤의 스프링 소나타’가 들렸다가 작은 여운을 남긴 채 사라진다.

 

글 / 유수임 (글벗세움 회원·피아니스트·공인주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