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날들

배를 움켜쥐고 숨이 넘어갈 듯 웃던 티 없이 맑고 순수했던 시절들…

무더운 여름 밤, 더위를 이기지 못해 부채로 밤을 새며 모기를 쫓느라 모닥불을 피워놓고 연기를 마시며 눈물을 흘렸던 날들이 있었다. 마당 한가운데 멍석을 깔고 모여 앉아 밤이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 꽃을 피우던 그 시절에는 더위를 잊는 수단은 부채뿐이었다.

 

01_어머니가 내 손이 약손이다’ 하시며 배를 문질러주시면

얼마나 더위에 시달렸으면 정월 대보름날 아침 일찍 ‘내 더위 사라’면서 더위를 내다 팔았을까. 게다가 걸핏하면 잘못 먹은 음식으로 배탈이 나서 밤새 고생도 많이 했고 몸이 싸늘해지고 식은땀을 흘리면서 떼굴떼굴 구르면 어머니가 ‘내 손이 약손이다’ 하시며 밤새도록 배를 문질러주시면 수월하게 잠이 들곤 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체온을 따뜻하게 하고 장을 운동시켜 혈액순환이 잘 되도록 한 옛 어른들의 지혜였지만 유난히도 정을 많이 주고 가신 어머님의 모습이 떠올라 눈시울이 뜨겁다.

동네 목수 일을 하시던 아버지 친구 분 중에는 탈장이란 병을 가진 분도 있었다. 장이 고환 쪽으로 내려오는 증상으로 여름철 비가 오려고 하면 증상이 더 심해진다고 들었다.

어릴 때 우리들은 이를 태산같이 크다 하여 ‘태산 부랄’이라 하며 신기해 하였는데 배에서 소리까지 난다고 소문까지 퍼뜨렸다. 오랜 투병생활을 하시다 돌아가신 그분의 기억이 선명히 지워지지 않는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도 있었다. 사촌이면 아버지 형제의 아들 딸들이다. 가장 가까운 친척을 비유하면서 남이 잘되는 꼴을 볼 수 없다는 우리의 국민성을 표현한 말이지만 왜 하필이면 논인가 말이다.

 

02_음악시간에 선생님은 ‘노래는 배에 힘을 주고 불러야 한다’고

지금은 밭이 재화의 가치가 더 있는데 그때는 우리의 특식이 쌀이었고 보면 논이 있어야 부자 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였나 보다. 그 시절의 밥상에는 보리밥, 감자밥, 옥수수, 밀가루 음식이 주식이었고 쌀밥 (이밥)은 특별한 날이 아니면 먹을 수 없었다.

배불리 먹어야 일을 할 수 있었기에 밥그릇은 지금의 두 배나 커서 이로 인한 과식으로 소화불량이면 소다수를 복용하여 소화시키곤 했다. 나는 젊은 시절 신경을 조금만 써도 갑자기 배가 아프기 시작하여 설사를 자주 하는 증상이 있어 ‘만성적 위 신경쇠약’이란 진단을 받아 모든 일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둔한 성격으로 바뀌어 ‘고무질 빵’ 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 돌아가신 어머님께서도 음식을 드시면 잘 체하셨고 항상 식도에 무엇이 걸려 있는 것 같다고 하시면서 태주 (아기의 혼이 몸 속에 들어와 있다는 무속인)에게서 전수한 칡 줄기를 물에 한참 담가 두었다가 그것을 혼자서 식도로 해서 배꼽까지 넣으셨는데 그때마다 올라오는 것은 없었으나 한결 속이 편하다고 하셨으니 신기한 일이었다.

뱃속 사정은 뱃심과도 통했다. 국민학교 시절 음악시간에 선생님은 “노래는 배에 힘을 주고 불러야 한다” 하여 논산 훈련소에서 신병교육을 받을 때 조교가 “원기부족 인가?” 하면서 배에 힘을 주고 군가를 부르라 하여 신병들이 목이 터져라 악을 쓰며 불렀던 기억도 즐겁다.

고등학교 하급생 시절, 상급생 들은 기합을 줄 때면 배에 힘을 주라 하고는 훅을 날려 맞는 순간마다 주저 않았는데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전날 이었다. 들뜬 기분으로 대청소를 하고 있으려니 종례를 마친 후 전원 남아있으라는 3학년으로부터의 지시가 있었다.

 

03_나를 보호하기 위해 연막작전을 쓰신 담임선생님

단체기합을 준다는 정보였다. 그 시절 상급생들은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는 후배들에게 기강을 바로 세운다 하여 ‘엎드려 뻗쳐’도 하고 목침대로도 때렸으며 개인적인 감정이 있는 학생에게는 더 심하게 구타를 했다.

반면, 잘 아는 학생은 슬그머니 빼주곤 했으니 정당한 이유 없이 당한다는 반항심이 솟아올라 친구 두 명과 나는 도망가기로 하고 후문으로 몰래 빠져 나와 백사장 쪽으로 향하다 감시하는 학생에게 발각되어 뛰기 시작했다.

평소 같았으면 빠르던 걸음도 발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4km는 달렸으리라. 어느새 쫓아왔는지 나는 목덜미를 잡혔다. 고양이 앞에 쥐가 꼼짝 못하듯이 호랑이 앞에 토끼가 혼을 빼앗기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그때처럼 무기력 한 적은 없었다.

그사이 친구 두 명은 멀리 달아났고 나 혼자 잡혀와 3학년 교실에서 훅을 몇 대 맞고 무릎을 꿇고 있으려니 이도건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셔서 나에게 호통을 치시면서 데려가셨다.

알고 보니 연막작전이었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 선수를 쓰신 것이다. 그렇게도 인자하셨던 선생님, 지금은 뵈올 수 없기에 더 더욱 그리워진다. 우리로 인해 그날은 기합이 없었고 방학이 끝난 후에도 도망간 두 명에 대하여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논리가 맞는 듯 훈계로 종결되었다.

 

04_부부가 잘 때는 배를 붙이고 자야 금슬이 좋아진다고 했는데

그렇게 젊음은 가고 결혼도 하고 나이가 들면서 이제는 언제부터인가 방을 따로 쓰게 되었다. 부부가 잠을 잘 때는 배를 붙이고 자야만이 금슬이 좋아진다고 했는데 정은 점점 멀어져 가는 가운데 외로움과 한구석이 텅 비어 버린 듯한 허전함 속에 의미 없는 하루, 또 하루가 간다

어릴 때 내게는 가까운 이웃이 있었고 못 살아도 무엇이든 나누어먹는 정서가 있어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생각에 향수에 잠기곤 한다. 내가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 우리 동네는 아홉 가구가 자연부락을 형성하여 살았다.

옆집 한의사 아버지 가이상 (강씨), 경찰 가족, 명열이네, 대장간 대현이네, 포목점 장똘뱅이 춘배형, 목수 일을 했던 춘자네와 북간도에서 살다 온 순제 형, 이발사였던 혁동 아저씨, 노동일을 하던 영달이네… 모두가 형제처럼 학교에서 돌아온 저녁이면 우리 집 마당에 모여 공을 차거나 자치기 제기차기를 하면서 놀았고 어머니께서 저녁 먹으라고 몇 번인가 불러야 끝이 나곤 했었다.

그렇게 즐거웠던 시절도 6.25동란을 맞이하면서 변화가 왔고 수복이 되면서 새로운 삶을 찾아 이주해가면서 한때 이웃들이 하나 둘 떠나갔고 그 이후로는 나는 이웃을 모르고 살았다.

배를 움켜쥐고 깔깔 숨이 넘어갈 듯 웃던 티 없이 맑고 순수한 동심에서 더불어 사는, 어릴 때 살던 시골의 이웃과 같은 공동사회가 다시 교민사회에서도 이루어지길 소망해본다.

 

글 / 홍봉표 (성심글벗세움 회원·시조시인)